2017년 12월 통권 제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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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너머 세상 읽기

[책 걸음 한 발짝 두 발짝]
엄마, 도서관 다녀올게요

이지연 | 2017년 12월

매년 한국도서관협회에서는 도서관주간을 맞아 도서관 표어를 공모한다. 4월 12일부터 18일까지의 도서관주간에 도서관의 가치와 필요성을 홍보하는 것이다. 선정된 표어는 ‘내 영혼의 러브 마크’, ‘세상을 읽는 힘, 미래를 이끄는 힘’, ‘도서관의 봄, 책을 봄, 미래를 봄’ 등이 있다. 청주기적의도서관에서 일했던 지난 10년간 나름의 도서관 철학을 담은 표어를 신청했다. 선정된 적은 없지만 고심 끝에 매년 올렸던 표어는 ‘엄마, 도서관 다녀올게요!’이다.

어린이도서관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많은 어린이들을 보았다. 정확한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을 나름으로 읽은 것이지만, 대체적으로 어린이들은 책을 좋아해서 잘 읽는 어린이와, 책을 읽지 않거나 심지어 싫어하는 어린이로 나뉠 수 있다. 하지만 도서관에 오는 어린이들은 일단 책을 읽기는 한다. 좋아서 스스로 책을 읽거나 아니면 모종의 강압에 의해 읽거나….

습관은 무섭다. 어떤 습관이냐에 따라 평생의 부양토가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독서도 그런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같이 할 고상한 습관으로 독서를 생각하기 때문에 노력을 하면 그 결과로 독서 습관이 길러진다고 믿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독서에 대한 이런 맹목적인 신념이 어린이에게 억지로 책을 읽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의 흥미를 고려하지 않은 획일화된 독서 지도, 학교 공부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교과 보충으로서의 독서, 입시 국어 및 논술을 위한 필독서 읽기 등이 아이들로 하여금 ‘책=공부’라 여겨 책을 멀리하도록 한다. 많은 학교, 사설 독서 지도 기관, 심지어 일부 도서관에서조차 학년별 필독 도서 목록을 배포하고 그를 활용한 프로그램을 실시해 아이들에게 억지로 독후감을 쓰도록 한다. 강요한 습관도 정착되면 효과가 있으리라 믿는 부모에게 이끌려 서점이나 도서관에 온 아이들 손에는 부모 취향의 책들이-물론 자녀를 위한 책이라고 위로하면서-들려 있다. 많은 과외 활동을 하는 이 시대의 어린이들에게 독서는 시간이 많이 드는 ‘시간 사치 행위’일지도 모른다.

책은 친구와 같다. 대화법을 익히고 매너를 공부해서 사귀는 관계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경험과 시간을 함께해야 진정한 친구가 되듯이 책도 그러하다. 스스로 책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책을 통해 다른 이의 삶에 공감하고 행복해하며 책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독서의 중요한 목적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지닌 부모들이 방임하듯 아이들을 도서관에 두는 것을 많이 봐 왔다. 스스로 고른 책이 감동적이고 재미있음을 깨달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처음 청주기적의도서관에서 근무할 때 나의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방학이면 내내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출퇴근했다. 아침에 도서관에 데려다 놓으면 하루 종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다가 놀다가 하였다. 지금 대학생이 된 그 아이는 가끔 그때가 참 좋았다는 얘기를 한다. 읽고 싶은 책을 원 없이 읽을 수 있었던 때였다고 하면서.

자율독서, 즉 자기 의지로 읽은 책은 감동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책을 읽는 사람에게 의미를 준다. 책의 의미가 삶의 고난을 헤쳐 나가게 하는 힘이 될 때도 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말에서 3학년 올라가는 시기에 결핵성늑막염에 걸려 3개월간 학교를 못 나가고 집에서 지냈다. 대학 진학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공부 손을 놓고 누워 있었던 나로서는 큰 상실감과 자괴감에 빠져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누워 쳐다본 책장에서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세계명작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책이나 읽자는 마음에서 잡은 책들이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전쟁과 평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다. 처음엔 시간 때우기였으나 점점 독서에 빠져들었고 그 이야기가 마음을 서서히 치유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사랑하게 되었고 책 속에서 내 삶의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내가 도서관에서 근무하게 된 계기이었으리라.

최근에는 이러한 자율적 독서 활동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주어진 권장도서 목록이 아니라 참여자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하는 형태의 독서 활동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라클팩토리’라는 부산의 한 자율독서동아리가 그 예다. 소개 받은 책들 중에서 공감을 가장 많이 받은 책을 이달의 책으로 선정, 같이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현재는 많은 중학교에서도 자체적으로 혹은 학교도서관과 연계하여 자율독서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언어학자 스티븐 크라센의 『읽기 혁명』이라는 책에서는 어린이의 자율독서를 이렇게 정의한다. 독후감을 쓸 필요가 없고, 한 챕터가 끝난 다음에 퀴즈에 답하지 않아도 되며, 단어의 뜻을 모두 사전에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좋아하지 않는 책은 그만 읽고, 원하는 책을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자율독서를 통해서 언어 학습에 극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으며, 창의적인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자율독서를 제시하고 있다.

자율독서가 답이라고 말해도 자율독서로 이끄는 방법을 확실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어린이에게 책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할 방법이 무엇일까? 도서관에 근무했던 나로서도 ‘무조건 도서관이 답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도서관이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난 9월 청주기적의도서관에서 일본의 유명한 그림책 작가인 고미 타로의 특강이 있었다. 일흔을 넘긴 시골 할아버지 같은 작가의 이미지는 밝은 색감과 귀여운 터치의 그림책과 매치가 잘 안 되는 듯했지만 오히려 내공이 느껴졌다. 자녀를 둔 대부분의 특강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한 질문이 ‘어린이 그림책의 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느냐?’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게 만들까?’였다. 나는 어린이 같이 장난기 다분한 고미 타로의 대답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가 만든 책은 그림책이지만 어린이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그저 그림이라는 방식으로 내 책을 만들 뿐입니다. 나는 어린이를 위한 주제를 따로 정하여 그림 그리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로 그림을 그릴 뿐인데 그걸 아이들이 좋아해 주는 것이지요. 부모들이 책을 권하면 아이들은 착해서 부모를 위해 책을 읽는 척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책에 흥미를 갖게 하려면 부모가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으면 됩니다.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고 낄낄 웃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엄마 무슨 책이야? 재밌어? 하고 물을 것입니다.” 다음 말에 작가의 위대함이 보였다. “나도 보여 줘, 하는 아이들 말에 부모는 책을 탁 덮고 보여 주지 마세요. 그리고는 무슨 책이니까 도서관에 가서 한번 찾아보든지…. 하고 그저 흘려 버리세요.”

특강에 참여했던 학부모들은 아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으리라. 좋은 그림책, 좋은 책들을 아이들에게 제시하고 도서관에 꼬박꼬박 데려가고 서점에서 책도 많이 사 주고 작가 특강에도 빼먹지 않고 참여하는, 부모 역할을 나름 잘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독서도 자녀에게로 대물림 되는 습관이라는 말에 본인의 독서 습관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정작 부모들은 책 한 권 안 읽으면서 자녀들에게 책 읽으라 강요했던 자신을 말이다.

이 글은 학교와 도서관에서의 독서 프로그램, 독서 지도, 추천 목록 등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 읽기의 과정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며 그에 대한 인프라가 형성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상적이지만 내가 그리는 독서하는 어린이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온 후 자신이 흥미 있고 궁금해 하는 것을 도서관에 와 스스로 찾아 읽고 깨달으며 자긍심을 느끼는 어린이다. “엄마, 저 도서관에 다녀올게요!”가 자연스러운 어린이. 또한 책을 좋아하는 부모. “오늘은 무엇이 궁금해서 왔니?”라고 물어보는 도서관 사서들. 이러한 모든 환경이 잘 조합된다면 아이들이 진짜 책을 좋아하며 자라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지금 도서관에 들어오는 바로 저 어린이가 스스로 고른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 책으로부터 인생의 고난을 헤쳐 나가는 힘을 얻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거면 족하다.
이지연 | 청주기적의도서관에서 10년 동안 문화행정팀장 및 평생교육사로 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