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통권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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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찾아서]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리는 작가, 신혜원

공혜조 | 2001년 01월

그림을 그리는 신혜원 선생님
어진이에게 줄 과자도 샀고, 사진기에 필름도 넣었고……. 준비, 끝! 이제 신혜원 선생님 댁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선생님 댁은 일산 신도시. 우와, 높은 곳에도 살고 있어요. 16층! 어지러워라……. 올려다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하지만 승강기를 타고 단숨에 주우욱! 초인종을 누르니 어진이가 문을 열어 주었어요.

앗! 이게 뭐야?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선 기자는 깜짝 놀랐답니다. 집이 좀 어질러져 있다고 말은 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아냐? 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야 있겠어요? 그런데 신혜원 선생님의 남편인 이은홍 선생님은 기자의 마음을 벌써 읽어 버렸나 봐요. "어질러진 모습을 보고 싶다길래 일부러 좀 어질렀어요. 아휴, 어지르다 보니 너무 어질렀나?" 능청맞기도 하여라. 역시 그림을 그리는 이은홍 선생님의 너스레에 속마음을 들킬 새라, "그럼요, 어지르려면 이 정도는 어질러야지요." 얼른 대답하고 어진이에게 줄 과자를 꺼냈어요. 그런데 과자를 놓을 데가 없는 거예요. 얼른 식탁 위에 있는 물건을 옆으로 밀치고 거기다 꺼내 놓았죠.

신혜원 선생님은 무엇을 하고 있냐고요? 부엌에서 돼지 불고기를 볶고 있어요. 아직 점심을 안 드셨다고 하네요. "그런데 밥은 어디서 먹죠?"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은홍 선생님이 얼른 마루에 있는 네모난 작은 상 위의 물건을 후다닥 치우더니 행주질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가족이 무릎을 맞대고 앉았지요. 물론 저도 한쪽 면에 앉았지요. 역시 선생님 가족과 무릎을 맞대고 말이에요. 김치찌개와 돼지불고기와, 맛있는 김치와 고사리 나물과 젓갈! 다들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어요. 저도 물론 밥알 한 톨 안 남기고 깨끗이 먹었죠.

기자와 얘기하는 동안 쓱쓱 그린 작업실 모습
자, 이제 선생님의 작업실로 출동. 어디냐구요? 이 집에서 제일 큰 방이지 어디겠어요? 우와아, 책상이 하나, 둘, 셋, 넷……. 따로 또 같이 놓인 책상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어요. 의자도 하나, 둘, 셋……. 그리고 가장 많은 건? 맞아요, 온통 책꽂이인 한쪽 벽면을 빼곡이 메운 어린이 책이지요. 선생님이 그림을 그린 책, 선생님이 다른 분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책이 질서정연하게 꽂혀서 선생님이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도록 나란히 줄을 서 있어요. 뿐만 아니에요. 선생님과 선생님의 남편이 쓰는 연필, 지우개, 색연필, 물감, 붓, 물통, 먹물통, 종이 등이 알맞춤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답니다. 거실이나 부엌, 어진이 방에 어질러진 물건들과는 달리 이 작업실의 모든 물건은 스스로 제 자리를 찾을 줄 아는 신기한 힘을 가진 듯했어요.

그럼 이제 선생님이 책에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알아 봐야 되겠지요? 작년까지 선생님은 주로 그림 그리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올해 여름 선생님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 책을 펴냈지요. 바로『어진이의 농장 일기』랍니다. 어린이 책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두 궁금해 할 것 같았거든요.

그림을 그리려고 찍어 둔 옥수수 사진
"주말 농장을 한 일 년 다니다 보니까 거기 오는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책을 만들어 보여 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기를 썼지요. 물론 처음부터 꼼꼼하게 쓴 건 아니고요. 가계부에 써놓기도 하고 메모를 해서 모아 두기도 하고……." 순간 귀가 번쩍 뜨였어요. 가계부? 이렇게 집을 어질러 놓고 사는데 가계부 쓸 정신이? 믿을 수가 없었어요.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정말 값진 구경을 하게 되었답니다. 신혜원 선생님이 십 년이 넘게 써 온 가계부, 그 안에는 이은홍 선생님과 살았던 추억과, 어진이와 함께 했던 따뜻한 순간들이 몽땅 적혀 있는 거예요. 저는 얼른 주말 농장에 대해 적어 놓은 부분을 찾아보라고 했지요. 선생님이 펼친 어느 면의 28일이라고 쓰인 난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어요. "돌밭을 옥토로 만들고 왔다. 온 몸이 욱신욱신……. 금방 잡은 돼지고기도 먹었다. 개벽 가서 술도 먹었다." 이 짧은 글이 하나 둘 모여 어진이의 농장 일기를 쓸 때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겠지요.

이듬해부터 선생님은 주말 농장 이야기를 꼭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고 해요. "그런데 쓰다 보니 소설처럼 되는 거예요. 그때 어진이가 일곱 살이었는데, 주인공을 4학년이나 5학년 정도로 생각하고 썼거든요. 그래서 잘 안 되는 건가 하고 주인공을 바꿔 보았어요. 그래도 마찬가지더라구요.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때 절감했지요. 그래서 내가 가장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한번 해 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만화와 일기를 합친 형식으로 만들기로 했답니다. 그리고는 그림부터 그리기 시작했대요. 그래서 제일 처음 그린 그림이『어진이의 농장 일기』16쪽에 나오는 장면이랍니다. 이 장면을 그리기가 무척 까다로웠는데, 이 장면을 그리고 나니 그 앞의 장면들이 떠올랐다고 해요.



주말 농장에 처음 간 날이 기록된 가계부
이제 힘을 내어서 3년 동안 모았던 달력과 가계부와 메모장과 사진을 보면서 한 장면 한 장면을 구상했답니다. 그리고 그해에는 비디오 카메라로 농장 모습을 찍어와서 연구했답니다. 비디오를 보면 그때 분위기가 떠올라서, 어떤 장면을 그릴 때 그 장면의 분위기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답니다. 그렇게 애써도 마음먹은 것처럼 잘 그려지지가 않았대요. 그럴 때는 '이 책을 완성하지 못 하면 나는 그림 작가의 길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대요.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고 그림을 그리는데 이전에 삽화 그림을 그려 주기로 약속한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큰일났지 뭐예요? 그래서 선생님은 스케치된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찾아갔어요.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이 책을 완성할 때까지 그 일을 좀 미뤄 달라고 부탁하러 간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대요. 그 편집자는 신혜원 선생님의 초고를 보더니 그 출판사에서 '좋은 어린이책 원고'를 공모하니 꼭 내라고 알려 줬대요. 그래서 1999년 11월 30일에 초고를 다듬어서 출판사에 냈지요. 그리고 2000년 2월의 어느 날 그 편집자로부터 기획 부문 대상에 당선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선생님은 뛸듯이 기뻐했고, 가까운 사람들이 선생님 집으로 몰려와 축하해 주었답니다.

『어진이의 농장 일기』의 출발점이 된 첫 번째 스케치
하지만 바로 그때부터 선생님은 아주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답니다. 작업실 한쪽에 작은 상을 펼치고 그 뒤에는 이부자리 한 채를 갖다 놓았지요. 선생님은 상으로 볼로냐 국제 아동 도서전에 가는 경비를 받게 되었는데 볼로냐 도서전에 가기 전에 책을 완성하고 싶어서 일에 박차를 가했어요. 그래서 서둘러 세밀한 스케치 작업에 들어갔지요. 이렇게 해서 재고를 마련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채색화를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채색화를 그리는 작업은 무척이나 힘들었답니다. 아침에 부시시 깨면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이를 닦고, 세수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오빠, 밥!"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이은홍 선생님이 밥을 차려다 주셨대요. 정말 사이가 좋은 부부이지요? 그렇게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볼로냐 도서전에도 안 가고 일을 계속하려고 했더니 주위에서 말리는 바람에 볼로냐에는 갔다 왔대요. 좋은 책을 많이 구경하고 와서 더욱 힘이 난 선생님은 집 밖으로, 아니 작업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매달렸답니다. 아, 참 주말 농장에는 꼬박꼬박 갔답니다. 그건 그림 그리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니까요. 처음에는 같은 그림을 망쳐서 또 그리고 또 그리고 하는 바람에 이틀이나 사흘에 겨우 한 장을 그릴까 말까 했는데 몇 달 동안 열심히 하다 보니 어떤 날은 하루에 한 장, 어떤 날은 하루에 두 장도 그리게 되었대요.

첫 번째 스케치를 보완하여 다시 그린 두 번째 스케치
그림이 완성되자 드디어 선생님은 집 밖에 나갔대요. 어디냐구요? 출판사지요. 선생님이 말풍선을 그려 놓은 곳에 글자를 인쇄해서 붙일 때 선생님이 옆에서 보아야 했대요. 말풍선이 너무 크거나 작으면 말풍선을 다시 그려야 했답니다. 말풍선 크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글자를 이쁘게 붙일 수 없잖아요? 이 밖에도 여러 일을 하느라 책이 나올 때까지 꼬박 매달려 마음을 졸였답니다.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의 독특한 그림체에 대해 물어 보았어요. "특별히 누구를 본받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고, 어린이들 그림을 많이 보고 연구하는 편이에요. 이호철 선생님의『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같은 책을 보면 정말 놀랍지요. 중국 어린이들 그림이 실린 책도 많이 보구요. 또 다른 여러 나라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특별히 어떻게 그려야 되겠다고 마음먹지는 않구요, 보이는 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그때마다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요." 그럼 신혜원 선생님의 선생님은 어린이들이 되나요? 하긴 남편인 이은홍 선생님이 구성하고 신혜원 선생님이 그린『글자 없는 그림책』을 보면 어진이네 가족은 누구나 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글자 없는 그림책』은 이은홍 선생님이 기획하고 신혜원 선생님이 그린 책이지요. 선생님은『글자 없는 그림책』을 만들 때 그 책이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부모님들이 그런 책은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 주시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어요. 선생님이 아는 어떤 분은 초등 학교 4학년 선생님인데 그 책을 수업 시간에 얘기 감으로 주면 어린이들이 정말 재미있고 창의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다면서 그림책을 어린아이들이나 보는 책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좀 답답하대요.또 언제 선생님 그림이 그려진 책을 볼 수 있냐고 물었더니 『호랑이 뱃속에서 고래 잡기』라는 책이 며칠 안으로 나올 거라고 하네요.

얘기를 끝마치고 작업실에서 나오니 어질러져 있는 거실과 부엌, 어진이의 방이 새롭게 보였어요.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정신을 자유롭게 두고 사는 사람들의 삶터는 이렇게 모든 것들이 자유스럽게 놓여 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나도 오늘부터 어지르기 대장이나 되어 볼까 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올라오지 뭐예요?
물감과 색연필로 다시 그린 그림이 책이 되었어요
공혜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여러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에게 좋은 읽을거리를 권해 주고 싶어서 좋은 어린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어린이』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좋은 어린이 책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어린이들이 행복에 겨워 웃음 터뜨릴 날을 기다리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