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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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찾아서]
언제나 새로운 그림을 실험하는 그림 작가, 김성민

공혜조 | 2001년 02월

한쪽 벽을 메운 책장 앞에 앉은 김성민 선생님
또 눈보라가 몰아쳤어요.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가 얼음 조각처럼 빛나게 하더니 또다시 하얗게 만드네요. 차를 타고 가면서 걱정입니다. 선생님이 사는 집이 꽁꽁 얼었다던데, 수돗물도 안 나오고 보일러도 고장났다던데 이렇게 또 눈이 내리면 어떡하나요? 걱정을 가득 안고 선생님의 작업실이 있는 고양시 행신동으로 갔답니다.

주택가의 한 건물 앞에 차를 대어놓고 3층에 자리잡은 선생님의 작업실로 올라갔지요. 어? 문이 열려 있네요? 잠시 현관 앞에 서 있는데 커다란 물통을 든 선생님이 올라오셨어요. 일층에서 지하수를 받아오시는 길이래요. 선생님과 함께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어요. 우와--, 이렇게 깔끔할 수가? 선생님 작업실 깔끔하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답니다. 하얀 벽에 알맞춤하게 걸린 이태수 선생님의 세밀화와 제 자리에 얌전히 앉은 그림 도구들. 한눈에도 묵직해 보이는 판화기는 또 얼마나 멋지다구요. 그것뿐이 아니예요. 작업실을 옮길 때 생겼다는 제도판은 또 선생님 작업을 얼마나 수월하게 해 드릴까요?
작업실 모습

작업실 중앙에는 보일러가 고장나서 가져다 놓았다는 작은 석유 난로가 작업실을 데우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답니다. 그 난로 옆 의자에 앉았지요. 바알간 난로 빛이 작업실을 따뜻하고 다정해 보이게 했답니다. 아무 장식도 없는 작업실 천장에는 선생님이 바꿔 달았다는 삼파장 램프가 불빛이 필요할 것 같은 곳마다 달려 있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작업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냐고 물었더니 "어지르는 사람 없으니까 그렇죠 뭐."라고 아주 쉽게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옷걸이도 깔끔, 슬쩍 엿본 부엌도 깔끔, 재떨이도 깔끔, 선생님은 아마 깔끔이인가 봅니다.

선생님은 1993년에 처음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렸답니다. 바로 『꼬마 단군』이라는 책이지요. 처음에는 외곽선이 두껍고 부드러워 동양화 느낌이 나게 그리다가 『모래알 고금』이라는 책부터는 외곽선이 아주 가늘어져서 서양화 느낌이 납니다. 그러다 1999년에 그린 『돼지 콧구멍』과 『샘마을 몽당깨비』라는 책의 본문 그림은 아예 로트링 펜으로 그렸어요.(<그림1>) 그래서 선생님께 까닭을 여쭈었지요. 그런데 참 뜻밖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랬어요? 몰랐는데요." 놀래는 기자의 표정에 선생님이 덧붙입니다. "전 일단 한번 작업이 끝난 책은 다시 들여다보지 않거든요. 스케치나 밑그림도 다 버려요." 지나치게 깔끔하시죠?

깔끔하게 정리된 그림 도구
<그림 1> 로트링 펜으로 그린 『돼지 콧구멍』의 본문 그림
선생님이 그린 그림은 어떻다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표지 그림도 아주 다양하지요. 『키다리 풍선 장수 아저씨』라는 책은 지점토로 만들고 색을 칠했구요, 『모래알 고금』이라는 책은 석고판을 파서 색을 칠했답니다.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책은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그렸다가 기름 묻힌 펜으로 퍼지게 했답니다. 그렇게 하면 그림이 뭉개진 느낌이 나서 어딘지 서툴러 보이면서도 부드러워 보인답니다. 책 내용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그림을 실험해 보는 선생님의 그림 욕심을 엿볼 수 있지요.

작업실의 판화기도 그런 그림 욕심이 드러나는 기구예요. 어떤 책은 본문 그림이 모두 목판화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 책의 그림을 그릴 때는 아무리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도 생각했던 분위기가 나오지 않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판화로 하면 그 느낌이 살아날 것 같아 해 봤는데, 괜찮아 보이더라고 해요. 그래서 그 책의 본문은 전부 판화 그림으로 채워졌지요.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요. 종이는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또 그리고 해서 시간이 더 많이 걸려요. 판화의 경우에는 그 판에서 결판을 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덜 걸려요."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어요. "저 책 만들 때 그림을 하도 늦게 그려 주어서 본문 그림은 다 그려 주고도 그림값을 못 받았어요. 워낙 본문 그림이 늦은 데다가 표지 그림을 그려 주지 못했거든요. 책 나올 날에 맞춰 작업을 할 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 출판사에 미안해요."

『재미가 솔솔 나는 우리 옛이야기』라는 책의 표지는 소멸판 방식으로 표지 작업을 했답니다. 가장자리를 목판으로 찍은 다음 가장자리 그림을 깎아 냈대요. 그런 다음 가운데에 호랑이 그림을 새겨 먹판을 찍고, 그 그림 위에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답니다. 본문은 붓펜으로 선을 그려 부드러운 동양화 느낌이 나도록 그렸지요.

『키다리 풍선 장수 아저씨』 표지 사진
『모래알 고금』 표지 사진
『아빠하고 나하고』 표지 사진
『재미가 솔솔 나는 우리 옛이야기』표지
이 책의 그림을 그리면서 선생님은 내용 증명이란 것을 받기도 했다고 해요. "99년 1월에 계약서를 썼는데, 2월말까지 그림을 그려 주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자꾸 그림이 늦어지고 내게 연락도 안 되니까 출판사에서 내용 증명을 보냈어요. 빨리 그림을 보내 달라고요. 그때가 6월이었죠.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 뒤로도 그림이 잘 안 돼서 끙끙대다가 8월에야 겨우 그림을 다 그려 주었어요." 이번에는 그림값을 받으셨냐고 했냐고 했더니 아주 겸연쩍은 표정으로 "지금 생각해도 그 편집자에게 미안해요. 그땐 왜 그리 그림을 늦게 그려 주었는지……."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선생님은 출판계에서 악명 높은 그림 작가가 되었어요. 얼마나 악명이 높은지 어떤 그림 작가가 마감을 안 지키면 '김성민 2호'라고 우스개 소리를 한답니다. 어떤 여성 작가분이 '여자 김성민'이라는 희한한 별명을 얻었다는데 아시냐고 물었더니 또 겸연쩍게 웃으시네요. 새로운 그림 방법에 관심이 많으셔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했더니 "꼭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이것저것 해 보는 거예요. 제발 약속 안 지키는 작가라는 말을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해야죠."하며 말머리를 돌리세네요.
<그림 2> 스케치 그림

요즈음은 어떤 작업을 하시냐고 여쭈었더니 푸른 숲에서 나올 옛이야기 세 번째 책의 삽화 스케치를 하고 있답니다. 작업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우선 스케치한 그림을 불판에 올려놓고 그 위에 밑그림을 그려요. 저는 밑그림을 아주 꼼꼼히 그리는 편이에요. 그 밑그림을 다시 불판 위에 올려 연필과 콘테와 유화 물감으로 선과 먹을 그리고 도화지에 복사해요. 처음에는 채색에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해 보았는데 콘테로 그린 부분이 종이에 밀착하는 느낌도 나고 좋았어요. 복사를 해서 그리면 색깔 입히다 실수했을 때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하는 부담이 줄죠. 그러면 좀 더 편안하게 색을 칠할 수 있거든요." 스케치한 그림이나 밑그림을 몽땅 버린다는 말이 떠올라 지금 그리는 밑그림을 좀 빌려주실 수 없겠냐고 부탁드렸어요. 곤란해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읽고 스캔만 받고 돌려 드린다고 빌려왔지요. 그 그림들이 바로 <그림2>와 <그림3>이랍니다.
<그림 3> 스케치를 불판 위에 놓고 다시 그린 밑그림

어떻게 해서 화가가 되었냐고 여쭈었어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림을 잘 그리니까 어머니께서 유화 물감을 사주셨어요." "초등 학생한테요?" "심심할 때면 그림을 그리곤 하니까…….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물론 그 전에 수채화도 그렸지요.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대를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선배가 하는 화실에 잠깐 나간 적이 있어요. 그러다 대학 졸업하고 잠깐 화실에 나갔지요. 그래서 사실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린 편은 아니예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오늘까지 온 거죠." 그러니까 선생님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그림 작가가 된 것이지요.

아이들 책이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림으로 표지 전체를 얼렁뚱땅 디자인해서 만드는 게 싫어요. 어떤 기획물을 시작하면 그 기획에 걸맞은 표지 양식을 정하고 그림을 앉히면, 그림도 살아나고 그 책도 살아나 보일 텐데……. 어린이 책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도 달라지려고 노력해야지요. 미리 설정된 개념에 따라 책을 만들어야 같은 이름으로 묶인 책에 통일성도 생길 텐데……. 그림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편집자와 얘기를 많이 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지요. 그럴 때는 그 출판사에서 만드는 책에 통일성이 없어요."

『꽁지 닷발 주둥이 닷발』 표지 사진
『돼지 콧구멍』 표지 사진
여태까지 선생님이 작업한 책 가운데서는 보리 출판사의 '겨레 아동 문학 선집'의 『돼지콧구멍』 표지를 가장 잘 된 표지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런 식의 디자인은 그림을 돋보이게 하고 책을 단정해 보이게 하니까요.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옛이야기 보따리' 의 『꽁지 닷발 주둥이 닷발』도 마음에 드는 표지랍니다. "이 시리즈를 만들 때 제일 첫 권의 그림을 맡았어요. 편집자와 이야기를 무척 많이 했어요. 민화에서 도안화시켜 만든 문양집 책을 보고 표지 오른쪽 면의 문양을 선택해서 넣고, 그림을 왼쪽에 넣었지요. 이 시리즈는 모두 이런 식으로 표지를 앉혔어요. 그래서 표지만 보아도 보리 출판사의 '옛이야기 보따리' 시리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지요."

"아이들 책이 너무 커요. 규격이 일률적인 데다 그 규격이 너무 커서 들고 다니며 읽기에 적당하지 않아요. 만화책 크기의 동화책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작은 책, 가로가 11센티미터 가량 되고 세로가 17 센티미터 가량 되면 초등 학교 고학년이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적당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요즈음 아주 오싹오싹하고 무서운 그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답니다. 어린이 책은 재미있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지요. 그런데 우리 옛이야기 가운데에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도 있답니다. 선생님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고 싶어한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화장실 문 열기가 두렵던 마음을 요즘 어린이들도 겪어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싹한 이야기도 우리 전통의 한 부분이 아니겠냐고 물으시는 선생님의 표정은 전혀 오싹하지가 않아요.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맑답니다. 선생님이 만들고 싶어하는 그런 그림책이 나온다면 우리 어린이 책의 그림이 더욱 풍부해지겠지요. 하루 속히 그 날이 오기 바라면서 깔끔한 선생님의 작업실을 뒤로하고 눈이 그쳐 더 깜깜해진 밖으로 나왔답니다.
공혜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여러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에게 좋은 읽을거리를 권해 주고 싶어서 좋은 어린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어린이』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좋은 어린이 책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어린이들이 행복에 겨워 웃음 터뜨릴 날을 기다리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