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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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내가 꼭 만들고 싶은 어린이책]
사소하고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게 하는 책

김태희 | 2003년 03월

아직도 못 만들어 본 책이 있냐구? 편집 육 년차, 그것도 어린이 책만 줄곧 만들어 온 나에게 만들고 싶은 책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새삼 부끄럽다. 2말 3초는 대학 생활에서도 꽃이지만 편집자 생활에서도 활짝 피어오르는 시기이다. 알 건 다 알고, 이 동네 사람들의 사생활을 줄줄 꿰고 있을 시기. 편집에 가속도가 붙고, 책 만드는 데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표내지 않으면서). 하지만 그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으니 사 년차, 오 년차에 들어서면 그래프는 다시 하향 곡선을 그린다. 연애도 오래하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고 시들해지는 것처럼.

『삐노끼오의 모험 1』표지와 본문

어린이 책을 만들며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만든 책 가운데, 애착이 가거나 애증이 있는 것들을 잠깐 짚어 보면 이렇다. 김유대 씨가 포트폴리오를 들고 찾아온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이야 물밀듯이 들어오는 일들을 거절하느라 바쁘겠지만, 그땐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이었다. 1998년 초였는데, 솔직담백한 연필선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같이 작업하게 된 것이 『삐노끼오의 모험 1·2』였다. 나도 일 년을 갓 넘긴 병아리 편집자요, 그도 기교는 없지만 의욕 넘치는 예비 일러스트레이터라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집도 가까운 터라 수시로 얼굴을 맞대고 일 얘기에, 사는 얘기에, 별의별 얘기를 다 했던 것 같다. 즐겁게 작업을 해서 그런지 (그림 크기는 편집하기 힘들 정도로 제각각이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나왔다. 이후 그와의 작업은 『학교에 간 개돌이』 『들키고 싶은 비밀』로 이어졌다.

『들키고 싶은 비밀』표지와 본문

『학교에 간 개돌이』는 ‘신나는 책읽기’라고, 1999년 창비에서 저학년용으로 새로 만든 시리즈의 첫 책이다. 그래서 부담도 많이 되고, 그만큼 애정도 많이 쏟은 책이다. 김옥 선생님은 이 책 한 권을 위해 그 동안 써 놓았던 원고를 수십 편 보여 줬고, 나는 작가의 다양한 글쓰기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는 원고만 엄선해서 다섯 편을 골라냈다. 그 가운데 「책벌레」는 굉장히 재미있는 발상과 놀라운 상상력이 결합된 원고였다.

도서관에 있는 국어사전에서 태어난 아기 책벌레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책벌레들(쉽게 말하면 벼룩 같은 거다. 얼마나 책을 안 빌려 봤으면…….)이 싸우는 건데 책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다양한 낱말과 그 뜻풀이를 이용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하지만 그 내용이 아이들한테 전달이 잘 안 될 것 같아, 나는 생각 끝에 초등 국어사전을 사서 사전 차례에 맞춰 최대한 사실성을 유지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자연스레 사전 보는 방법을 익히기 바라며(눈치 못 챈 사람도 많았겠지만). 김옥 선생님과는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껏 서로 참견하며 살고 있다.

『학교에 간 개돌이』표지와 본문

『똥이 어디로 갔을까』도 나 스스로 대견해하는 책 가운데 하나인데, 화가 유진희 씨하고는 그 작업을 하면서 친해졌다. 이 동네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마감 안 지키는 화가로 유명한 이가 두 분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유진희 씨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일단 그림이 너무 좋고, 사람이 너무 좋아서이다. 이 분하고는 회사에서 며칠씩 날밤을 새워가며 작업했다. 아무 거리낌없이 트림도 하고 방귀도 뀌는(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다. 정말로 아니다.) 편한 사이가 되자 그림도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표지 같은 경우는 그 자리에서 둘이 얘기를 하다가(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하자면 ‘브레인 스토밍’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장면을 잡아 완성한 거다.

『똥이 어디로 갔을까』표지와 본문

어린이 책 영역이라는 게 어린아이부터 청소년까지 아우르다보니 하는 일의 범위도 그만큼 넓어지게 마련이다. 청소년과 일반인을 아우르는 철학책(‘피노키오의 철학’시리즈 1∼4)을 만들 때는, 필자와 의견을 조율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 버려 정작 책 만들 시간이 안 날 지경이었다. 내네 마네 하다가(난 과감하게 버릴 건 버리고 세 권으로 가자고 했는데 결국 책은 네 권으로 나왔다.)

『삐노끼오의 모험 2』표지에서
극적으로 화해해 지금은 서로 안부를 묻는 편한 사이가 됐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고달팠다. 홍보용 책자도 만들었는데, 그것도 참 애착이 간다(예리한 독자라면 이쯤에서, 편집자와 책은 애증 관계에 있음을 눈치챘으리라). 앞 뒤 표지에 들어갈 말들을 구상하고(가령 이런 식이다. “뭐야, 유치하게. 어릴 적 죽도록 읽고 만화 영화로도 실컷 본 그 나무 막대기 피노키오가 철학을 한다고? 과연?”), 각 책의 한 부분씩을 보여 주며 본문에 사용한 그림을 이용, 만화 콘티를 짜 넣었다. 돈 주고 사는 책이 아니어서 그렇지, 녹슨 머리에 기름칠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 참, ‘돈 주고 사는 책이 아닌 책’을 또 한 권 만들었다. 지난해는 창비아동문고가 200권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였다(그 해 7월에 아기를 낳은 나에게는 더욱 기념비적인 해였다). 기념 자료집에 포스터며 각종 행사 자료를 만드느라 몸이 가벼울 때보다 더 극성을 떨며 일했던 것 같다. 기념 자료집은 한 번 쓰고 말 거라 만들면서도 내내 아쉬워했는데, 힘들여 만든 만큼 지금도 계속 쇄를 거듭해 찍고 있다(필요하신 분은 연락주시라∼).

그리고 드디어, 그림책에 첫발을 내디뎠다. 『잘 가, 토끼야』라고, 창비에서 처음 선보이는 그림책이다. 다른 그림책을 볼 때마다 짐작은 했지만, 이건 정말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실 난 책 만드는 일이 겁난다. 새로 시작하는 책이 됐건, 늘 만들어 오던 책이 됐건 두렵다. 지금은 정말 어린이 책에 대한 모든 기준이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삼 년차의 자신감은 무모함이었으며, 이제서야 비로소 내가 지금껏 ‘우물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철든 개구리가 된 심정이다. 왜 십 년, 이십 년 된 선배 편집자들이 세월이 갈수록 더 신중해지고, 묵묵하고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잘 가, 토끼야』표지와 본문

앞으로 책을 잘 만들려면, 육 년차로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으려면, 난 ‘슬로비족’이 되어야 하리라. ‘천천히, 훨씬 더 훌륭하게 해내는 자여, 그대 이름은 편집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어진이의 농장 일기』는 내게 정말 소중한 책이고, 책갈피 대신 씨앗 주머니를 달아 주려고 했는데 실패한 만큼 아쉬움이 큰 책이다. 아이들에게서는 지금도 꾸준하게 편지가 날아온다. 만약 그때 씨앗 주머니를 달아 줬다면 어떤 편지가 올까? “내 배추는 싹이 안 나와.” “내가 키운 배추 사진이야.” 지금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고민 어린 이런 저런 사연들이 날아오지 않았을까?

『어진이의 농장 일기』표지와 본문

아이들은 사소한 데 관심이 많다. 우리 아기도 벌써부터 제 장난감은 팽개쳐 두고, 리모콘이며 전기 코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이불 한가운데 데려다 놓으면 어느새 구석으로 기어가 작은 먼지나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애쓰며 논다. 이제야 어미 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겠다.

패스트푸드, 인터넷, 컴퓨터 게임, 텔레비전만 존재하는 삭막한 세계로 우리 아이를 내몰게 될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사는 집도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요, 노는 세계도 똑같으니, 이 아이들이 과연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창조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까? 거창하게 인간 복제 얘기까지는 안 하더라도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하게, 기계적으로, 몰상식하게 변해 간다. 그 속에서 종이 책을 만들고 있는 나란 존재가 새삼스레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삐노끼오의
모험 2』본문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은 이런 거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의 소중함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작은 경외감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키는 책, 지극히 사소한 관심이 특별한 주제로 연결되게 하는 책(거창하게 말하면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으로의 연결 통로를 만들어 주는 책. 말이 쉽지, 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냐?). 그리고 어떤 책이 됐든, 내가 만든 책에서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사람 냄새가. 글을 쓴 사람과 그림을 그린 사람과 만든 사람들의 달짝지근한 땀냄새와 숨결이 독자한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아울러 우리 아기한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아니 자랑스레 보여 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김태희/대학과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고 창작과비평사에서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7개월로 접어든 아기와 눈높이를 맞추다 보니, 그 전에는 안 보이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답니다. ‘미피’와 ‘푸우’스티커를 유리창에 붙이면서 우리한테는 왜 ‘개돌이’나 ‘몽실이’같은 캐릭터가 없을까 또 한번 고민에 빠지게 됐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