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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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다른 나라 그림책]
어린 시절의 진수를 뽑아 내는 윌리엄 스타이그

서남희 | 2003년 04월

윌리엄 스타이그
나이 예순이 되면 세상 사물의 이치가 눈에 잘 들어온다고 해서 ‘이순(耳順)’이라고 하지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기도 하고, 뜻밖의 깨달음 때문에 선의 세계로 몰입하기도 하는데……. 그럼 뉴욕의 만화쟁이 윌리엄 스타이그(William Steig) 할아버지가 이순이 지나서 비로소 만들어 댔던 (! ─ 그는 엄청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림책은 어떤 성향을 갖고 있을까요?

『Rotten Island』(엉망진창 섬)와 『The Zabajaba Jungle』(자바자바 정글), 그리고『Shrek! 』(슈렉!)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그리고 마음껏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란한 색깔과 만화 같은 그림은 그렇다 치고, 이야기도 무척 자유롭지요. 붕붕 날아 다닌다고나 할까요? 『Rotten Island』는 흉칙한 괴물들이 서로 침을 뱉고 불을 내뿜으며 서로를 죽이고 잔인하게 구는, 괴물들의 천국으로 그려집니다. 『The Zabajaba Jungle』은 자기가 왜 거기 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정글을 헤치고 나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위아래 도막이 뚝 잘려 나간 꿈에서 얼토당토않은 황당한 사건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지요. 『Shrek!』은 끔찍스럽게 생긴 괴물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면서 자기보다 더 역겹게 생긴 공주를 찾아가 불과 연기처럼 하나가 되어 영원히 무시무시하게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구태여 찾아내자면 이 세 권의 책에서 어떤 식으로든 도덕적인 교훈을 끄집어낼 수 있죠. 하지만 어린이들, 또는 책 선택권을 갖고 어린이들 뒤에 서 있는 어른들, 혹은 판매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출판사의 눈치는 구름 저 너머로 휙 던져 버리고, 자, 이렇게 마음껏 상상하고 그려도 되는 거야, 읽을 테면 읽고 말려면 말아 하며 신나게 웃어 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 유쾌해 보이네요.

『Rotten Island』(엉망진창 섬), 『The Zabajaba Jungle』(자바자바 정글),『Shrek! 』(슈렉!) 표지

꼬마들이야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이 할아버지는 원래부터 할아버지가 아니었답니다. 거진 한 세기 전, 1907년에 응애응애거리는 아기가 미국 브루클린의 오스트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다 아마추어 예술가였고, 형제들 또한 모두 예술을 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자라면서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그림 형제의 동화와 『로빈슨 크루소』,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 『로빈 후드』,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그리고 『피노키오』에 빠져 있었지요. 고등 학교 다닐 때는 교내 신문에 만화도 연재했지만, 특히 운동에 능했습니다. 타히티 섬은 고갱에게만 천국이 아니라 그에게도 천국처럼 보여서 언젠가는 그도 그곳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고, 운동을 직업으로 삼고 싶기도 했고, 멜빌처럼 바다 사나이가 되고도 싶었는데, 그만 경제 공황이 닥쳤습니다. 하야, 당장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만화를 그려 『The New Yorker』에 팔게 된 그는 그렇게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려서 수십 년 동안 명성을 쌓아 『Newsweek』로부터 ‘카툰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했지요. 그러다가 남들은 은퇴할 나이인 61세에 『C D B!』와 『Roland the Minstrel Pig』을 내서 그림책 세상에 뛰어들었습니다.

『The Amazing Bone』(멋진 뼈다귀) 표지와 본문

윌리엄 스타이그는 동물을 그림책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시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단 동물은 사람에 비해 이야기를 다양하게 끌어갈 수가 있고 (심지어 이렇게도 말하지요. “사람이 하면 미친 짓밖에 안 되는 것을 동물들한테는 마음대로 하게 할 수 있지 않남?깳콇), 아이들은 동물이 자기가 아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에 매혹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물들은 인간의 행동을 상징하고 있는 셈입니다.

『The Amazing Bone』(멋진 뼈다귀)에서 장미꽃 한 송이와 기발한 요술쟁이 뼈다귀 ─ 상상력을 상징하는 ─ 를 들고 다니는 돼지는 언제나 무언가를 꿈꾸고 있는 아이들의 정신 세계를 상징하고, 『Doctor De Soto』(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에서 환자인 여우는 남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며, 치과 의사인 작은 쥐는 현명한 사람이 할 바를 보여 줍니다.

『Doctor De Soto』(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 표지와 본문

이 같은 상징은 『Solomon, the Rusty Nail』(녹슨 못이 된 솔로몬)에서도 코딱지를 후비다가 갑자기 녹슨 못으로 변하는 토끼와, 그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온갖 꾀를 다 내는 애꾸눈 고양이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런가 하면 『Amos & Boris』(생쥐와 고래)에서는 바다에서 모험을 벌이다가 고래의 도움을 받는 생쥐와, 뭍으로 떠내려와서 생쥐와 코끼리의 도움을 받는 고래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 돕는 사회를 그려 냅니다.

『Solomon, the Rusty Nail』(녹슨 못이 된 솔로몬) 표지와 본문

소설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행동을 드러냅니다. 『Abel’s Island』(아벨의 섬)에 나오는 일 년을 섬에서 외톨이로 생존해야 했던 쥐는 로빈슨 크루소의 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ominic』(도미니크)에 나오는, 자유와 삶을 사랑하는 의협심 많은 개는 유쾌하고 주먹 센, 하지만 마음이 여린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그런가 하면 『The Real Thief』(진짜 도둑)에서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린 왕궁 보물의 창고지기인 거위는 잘못한 일도 없는데 엉뚱한 죄를 뒤집어 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가 막힐지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Abel’s Island』(아벨의 섬) 『Dominic』(도미니크) 『The Real Thief』(진짜 도둑)표지

물론 『Brave Irene』(용감한 아이린), 『Spinky Sulks』(부루퉁한 스핑키), 『The Toy Brother』(장난감 형), 『Pete’s a Pizza』(아빠랑 함께 피자 놀이를)처럼 사람이 등장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행동에 한계가 있고 도덕적 교훈이 들어가기 쉬운데, 작가도 그 덫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책들이 즐거움을 주는 까닭은 표정 묘사 때문이지요.

『Brave Irene』(용감한 아이린), 『Spinky Sulks』(부루퉁한 스핑키), 『The Toy Brother』(장난감 형), 『Pete’s a Pizza』(아빠랑 함께 피자 놀이를) 표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 선생님은 할아버지 목수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집을 그릴 때는 대개들 지붕부터 먼저 그리는데, 그 할아버지 목수는 주춧돌부터 그리기 시작한다지요. 현장 체험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진솔한 그림 그리기 방식이죠. 윌리엄 할아버지는 표정 묘사를 자기 그림의 주춧돌로 삼았습니다. 그림 그릴 때 언제나 얼굴을 먼저 그리는 거죠. 표정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단순한 선으로 갖가지 미묘한 감정을 썩 잘 드러내고, 동물보다는 사람의 경우에 감정을 더 잘 잡아내니, 아무래도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그렇게 된 걸까요?

『장난감 형』본문에서
윌리엄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진수’를 뽑아서 책을 만듭니다. 신나는 상상, 꿈, 요술……. 어린 시절은 이런 것들에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지요. 또한 그는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으로는 착하고 아름다운데, 노이로제가 평화와 행복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을 현실로 확인시켜 준 사건이 있었지요.

『Sylvester and the Magic Pebble』(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에는 아들이 없어지자 엄마와 아빠가 경찰을 포함해서 이 동물 저 동물에게 자기 아이를 못 보았느냐고 물어보러 다니는 장면이 있지요. 이 책을 보고 경찰 쪽에서 항의를 했습니다. 내용인즉, 시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도 하지 않고) 넘겨 버리는 살찐 돼지로 경찰을 묘사했다는 거였지요. 그래서 몇몇 주의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치워 버리는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인간의 노이로제가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뉴욕 타임즈』에 입장을 밝혔습니다. “전 아이들을 정치적인 선전으로 괴롭히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결과는 물론 경찰의 패배!

『Sylvester and the Magic Pebble』(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 표지와 본문

언젠가 이윤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난 내 애들한테 출퇴근하는 직업을 갖게 하기 싫어.” 그 집 아이들이 더 커 봐야 알겠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윌리엄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아이들이 ‘nine-to-five jobs’를 갖게 하고 싶지 않답니다. (9시에 출근, 5시에 칼퇴근이면 그것도 좋을텐데), 예술적 재능으로 넘치는 이 집안 아들은 재즈 플루티스트로, 딸 둘은 각각 화가와 배우로 끼를 빛내고 있군요. 가스등의 시대, 말이 끄는 소방(마)차 시대에 태어났던 할아버지는 수많은 그림책을 내고 지금은 거의 은퇴한 상태이니, 이제 자손들의 끼를 기대해 볼까요? 이들도 예순이 넘어 갑자기 그림책 세상으로 뛰어들지 모르니까요.
서남희/개인 홈페이지 ‘The Cozy Corner(www.cozycorner.new21.net)’에 영어 그림책 이야기를 엮어 올리고 있습니다. 서강 대학교와 서강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CLA Extension에서 TESOL(영어 교수법)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서 10년 간 살면서 Haslett Adult Education의 영어 클래스에서 보조 교사, 이스트 랜싱에 있는 ‘한마음 한글 학교’의 외국인반 교사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미국 유치원 교육에서 활용하고 있는 ‘꼬마책(Mini-Books)’을 아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구성한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만들었답니다. 그림책, 소설책, 시를 좋아하고, 북한산, 도봉산, 지리산, 속리산, 소백산 등 바위산을 좋아하며, 무엇보다 잠 자는 것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스스로 뾰족뾰족하다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과 더불어 누구보다 둥글고 넓게 살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