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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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었어요]
얼쑤 징가리!

정명기 | 2004년 01월

우리 집 둘째는 사내 아이인데 뭐든지 느리다. 첫째는 너무 빨라서 ‘다 그런 건가 보다.’ 하고 키웠는데 둘째는 너무 달랐다. 말문도 늦게 트여 애를 많이 태웠다. 걱정하는 아내에게 ‘대기만성’이라는 말을 입에 달듯이 말하며 지냈다. 우리 아이는 다섯 살이 되어도 말을 잘 못했다. 한 살 어린 사촌 동생이 뭐라 뭐라 이야기할 때면 순한 얼굴로 씩 웃기만 한다. 그리고 동생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한다. 속이 터진다. ‘이 아이가 바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여섯 살이 되어서야 말문을 열었다. 이불 깔아 놓으면 잠은 안 자고 웬 말이 그리 많은지……. 아이의 수다를 들으며 아내와 안도의 미소를 짓곤 하던 때가 작년이다.

우리는 아직도 둘째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다. 7살! 누구는 천자문을 떼었네 인수분해를 풀었네 어쩌네 하며 신동소리를 듣는 나이. 그러나 우리 아이는 초등 학교 입학이 이제 바로 코 앞인데 책을 못 읽는다. 아는 것은 받침 없는 글자 몇 개뿐이다. 그러고는 지극정성으로 책 읽어 달라고 조른다. 밤 10시 넘어 샤워하고 자리에 눕는 시간. 어김없이 들려 오는 소리가 있다. “오늘은 책 몇 권 읽어 줄 수 있어?”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의식을 치러야 하는 시녀와 시남은 그 순간 눈빛이 쨍 한다. 기 싸움이다. 상대의 기분과 자신의 하루 과실을 따져 자청하기도 하고 슬그머니 눈을 돌리기도 한다.

잠시 뜸 들이다가 “응~, 성하가 읽고 싶은 책 골라 봐.” 하면 다섯 권도 고르고 어떨 땐 일곱 권도 골라 온다. 웬 책 욕심은 이리도 많은지.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 책을 다 읽고 잔 적이 없으니까. 세 권 정도 읽으면 눈 감은 채 감상에 들어가고, 이 때부터 목소리를 더 깔아 나직하게 낭독을 하면 이내 곯아떨어진다. 나는 자리에 누워 내복 바람의 아이 몸에서 풍겨오는 비누 향기를 맡는 것이 좋다. 이 녀석을 꽉 안으면 온 몸에 알 수 없는 전기파가 찌르르 한다. 난 자꾸 안고 싶다. 그런데 아빠는 싫단다. 엄마한테는 착 달라 붙으면서.

『심심해서 그랬어』표지와 본문

아이가 자주 읽어 표지가 너덜너덜한 책이 세 권 있다. 그 중 하나가 세밀화가 이태수 씨가 그리고 윤구병 씨가 글을 쓴 『심심해서 그랬어』이다. 이 책은 시골에서 자라지 못한 우리 아이에게 시골집 ‘ 돌이 ’가 되어 들로 밭으로 소, 닭, 토끼, 염소를 쫓아 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생생한 체험을 하게 해 준다. 일찍이 소, 토끼, 염소에 경외심을 갖고 있던 우리 아이는 현실같이 생생한 세밀화 속에 들어가 오이 밭으로 돌진하는 송아지를 만나고, 감자를 파먹는 돼지, 배추를 뜯어먹는 염소를 만난다.

『사물놀이』표지와 본문

또 하나는 조혜란 씨가 그림을 그리고 김동원 씨가 구음감수를 하여 나온 『사물놀이』이다. 이 책의 첫 장을 열면 사물놀이가 비(장고), 바람(징), 구름(북), 천둥(꽹과리) 소리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각 악기의 음색을 CD로 들으며 익히도록 차근차근 안내해 준다. 책장을 넘기다가 사물 놀이패가 나오는 곳에선 효과음을 넣어 “ 얼쑤 징가리 ” “ 얼쑤 징가리 ” 하며 책을 꽹과리같이 두드리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아이도 같이 따라 일어나 탈춤 비슷하게 어깨를 들썩인다. 나중엔 둘이 손을 맞잡고 “ 얼쑤 징가리 ” 하며 콩 콩 뛰었다. 이 책장만 넘기면 약속한 듯이 몇 번 그러곤 했더니 아이가 탈춤과 사물놀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후로 양주별산대 공연장에 몇 번 데리고 갔다. 지금은 소매 긴 아빠 옷만 보면 벗어 달란다. 벗어 주면 그걸 입고 탈춤 흉내를 낸다. “ 얼쑤 징가리~” 제법 겅중겅중거리면서.

『갯벌이 좋아요』표지와 본문

세번째 책은 유애로 씨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갯벌이 좋아요』이다. 꽃발게가 흰구름을 잡으러 가는 길에 만나는 여러 바다 생물을 그림과 이야기로 자연스레 학습하게 만든 책이다. 책 마지막에 이야기 속의 바다 생물을 총 정리해 놓았는데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 아이가 바보가 아니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물어 보면 다 알아 맞추었다. 나도 알지 못했던 아귀, 쏨뱅이 이런 것들도 그림만 보고 다 알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성하’에게 편지 한 토막을 쓴다. “성하야, 엄마와 아빠는 너를 믿는다. 글 모르면 어떠냐, 계속 읽어 줄게. 언젠간 알게 되겠지. 너도 아빠가 되면 네 아이에게 분명 네 손으로 책을 골라서는 읽어 주겠지. 좀 늦으면 어떠니, 재촉하지 않을게.” 혹시 학교 선생님들께서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내년에 입학하는 제 아이같이, 더딘 아이들을 위한 따뜻한 배려 좀 부탁드립니다.
정명기 / 교육 서비스 기업인 대교에서 직원 교육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집 밖에선 애처가인 양 폼 잡지만 정작 집에선 인정 못 받는 ‘반푼수’이고, 내 딴에는 아이들을 엄청 위해 주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엄마를 더 좋아해 늘 서운한 마음으로 사는 40대 남자입니다. 아버지들이 모인 합창단에서 일 주일에 한 번씩 노래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삽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