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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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찾아서]
어린이 그림자만 보아도 동화를 쓰는 작가 노경실

공혜조 | 2001년 03월

선생님이 좋아하는 호퍼의 그림, 「밤도둑들」앞에서 활짝 웃는 노경실 선생님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펑펑 쏟아졌지요. 하늘도 땅도 사람도 모두 하얳습니다. 온통 하얀 눈 나라를 지나 선생님의 사무실이자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섰어요. 작업실 문에는 조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 있어요. 이십 년이 넘게 동화를 써서 그런지 선생님은 조카들의 그림처럼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입니다. 어떤 어린이든 만나면 오 분 안에 선생님 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는 말이 참말인가 봐요. 눈길에 꽁꽁 언 몸과 마음이 금세 녹아 버렸어요.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는 신비한 힘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많은 글을 쓰게 만들었나 봅니다.

창작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알고 있는 노경실 선생님은 참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동화들은 한결같이 우리 어린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특히 가난하거나 어려운 어린이들의 처지를 아주 잘 그렸지요.『동화책을 먹은 바둑이』나『상계동 아이들』, 『심학산 아이들』 같은 책에 나타난 어린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그렇게 실감나게 그려질 수 있었을까요? 『상계동 아이들』에 대해 먼저 여쭈어 보았지요. 상계동이란 말을 꺼내자마자 환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의 얼굴에 먹구름이 낍니다.

사랑스러운 조카들이 그린 그림
"상계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요. 전 늘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그래서 더 싫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햇빛이 곱던 날이었지요. 마치 에우리디케처럼 땅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으로 이사를 했어요. 햇살 한 줄기 안 들어오는 차디찬 샤시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고, 유리문을 열면 방이 있었어요. 화장실은 여러 집이 함께 쓰는 그런 집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선생님은 어린 천사들, 전지전능한 천사가 아니라 사랑과 손길이 필요한 어리디 어린, 세상 수풀 헤치며 살아나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작은 천사들을 만났답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을 보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 아이들 이야기를 글로 써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하소연하듯, 이 세상에 화풀이하듯 단숨에 써내려 간『상계동 아이들』이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5년 동안 같이 지냈지만 이제는 쮸쮸바를 건네 주기에는 민망스러운 커다란 손을 갖게 된 상계동 아이들을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들은 세상을 둘로 쫙 갈라서 보지 않고, 있는 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당당하기 때문이랍니다. 그 아이들의 가슴은 어느 아이들의 가슴보다 따뜻하고 폭신폭신하다고 선생님은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십 년이 넘게 써 온 선생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 많은 동네와 집을 상계동 아이들과 지낸 것처럼 선생님이 일일이 들여다보았을까요? 선생님은 고개를 젓습니다. "상상력이지요. 저는 아이를 보면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라요."『심학산 아이들』은 단 하루 그 동네에 가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듣고 온 뒤로 쓴 이야기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정말 굉장한 이야기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면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어린이들 이야기인데도 참 따뜻한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그렇게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릴 수 있냐고 여쭈었지요. 혹시 무슨 비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쓰고 나서 읽을 때도 그렇고 늘 '해학'을 염두에 두고 써요. 읽고 나면 입가에 비질비질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그런 이야기 말이죠. 우리 동화라면 '나도 그랬는데…….' 하는 느낌이 나는 이야기, '아, 저건 난데.' 하고 느낄 수 있는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60년대의 가난한 어린이를 그린『복실이네 가족사진』이야기도 읽으면 눈물과 함께 웃음이 나왔나 봅니다. 사진관 불빛에 놀라 도망가, 밥풀로 붙인 돌 사진으로 가족 사진에 가까스로 붙어 있던 남실이는 결국 병으로 죽고 말지만, 가족들의 따뜻한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지요.

어떤 슬픔 속에서라도 기쁨을 찾아내고야 마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어쩌면 선생님이 사는 모습 그대로일지 모릅니다. 가난한 집에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을 도우며 줄곧 가난하게 살아 왔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가난한 화가 고흐를 생각하고, 노래방에 가서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즐겨 부른다는 선생님은 "밥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답니다.

볼로냐 도서전에 갔을 때 신혜원, 김용철, 김환영, 고대영 선생님들과 함께, 가운데가 노경실 선생님
작가들은 보통 여행도 많이 다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작년까지만 해도 설악산도 못 가 보았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바로 작년에는 볼로냐 도서전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간 김에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고 왔답니다. 남들이 설악산에도 못 가 봤다고 놀릴 때마다 "두고 봐, 나는 내 돈 안 내고 유럽 여행 할 거야."라고 했더니 진짜 그렇게 되었다고 하네요. "간절히 소망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어요."라고 선생님은 활짝 웃습니다.

유럽을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여전히 가난한 선생님은 일산의 흰돌 마을에 있는 영구 임대 아파트에 산답니다. "우리 아파트에는 영세민이나 생활보호 대상자, 혼자 사는 노인, 장애인들이 많이 살지요. 강남의 부유한 아파트와는 무척 달라요. 경비 아저씨와 동네 사람들은 정다운 이웃이지요. 동네 아줌마들이 국수를 삶거나 죽을 쑤거나 부침개를 만들면 꼭 아저씨들께 갖다 드려요. 아저씨들은 무척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드시고요. 사람 사는 정이 느껴지는 동네예요. 저는 이런 동네가 좋아요. 저 자신도 명절 때가 되면 선물을 드려요. 경비 맡으신 분들이 나이가 지긋하시잖아요.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런지 아버지를 뵙는 것 같고……." 흐려지는 말끝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선생님의 마음결을 드러내는 것 같아 얼른 말머리를 돌렸어요.

어린이 문학 협의회 초기 모임, 맨 왼쪽이 노경실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만 쓰잖아요,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만 쓰실 것인지 여쭈었지요. "요즘 아동 문학계에서 환타지만을 유난히 강조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 삶을 작품으로 다 토로한 다음에 환타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처음부터 환타지만 생각해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거든요. 환타지에만 집착하는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까워요." 아마 앞으로도 한참 동안은 생활 속에서 나온 유쾌한 동화를 노경실 선생님한테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욕심꾸러기 같아요. 동화 작가로 이름이 나고 나서도 소설가로도 데뷔를 했지 뭐예요? 동화로 등단을 했는데 왜 또 소설로 데뷔했냐고 여쭈었더니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당시만 해도 어린이 문학을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동화를 쓰는 사람도 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동화 쓰는 게 더 즐겁고, 어린이들과 만나는 게 가장 행복했어요." 어린이와 만날 때 행복하다는 선생님은 새 책이 나오면 선생님이 인연을 맺었던 가난한 아이들에게 보내고 중학교, 고등 학교 때 선생님과 대학교 때 배웠던 최인훈 선생님과 박완서 선생님께 가장 먼저 보내 드린다고 합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 가난한 어린이들 외의 사람들 만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선생님은『상계동 아이들』책이 나왔을 때 그 책을 받아든 주인공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이 늘 떠오른다며 아스라히 미소를 지으시면서 말을 잇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과 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정작 그 아이들은 책을 사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파요. 그래서 저는 제 앞으로 보내 오는 동화책들은 다 싸서 아이들에게 갖다 주어요. 그런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갖다 주고 싶지만 혼자서 그런 일을 하기는 너무 벅차거든요. 누군가 이런 운동을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의 어릴 적 사진
인간의 추악함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영혼의 울림이 있는 또스또예프스키의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는 선생님의 책상 뒤에는 특이한 그림이 한 장 있습니다. "저는 그림을 참 좋아해요. 그래서 좁은 집이 온통 그림으로 가득 차 있어요. 진짜 그림을 살 돈은 없구요, 화집을 많이 사 보는 편이에요. 벽이란 벽은 온통 그림이죠. 하도 그림을 많이 붙여 두어서 사람들이 냉장고가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예요. 특히 에드워드 호프의 그림을 좋아해요. 그 화가가 그린 도시 풍경이 참 좋아요. 도시의 적막함과 쓸쓸함이 보이거든요. 정신의 창백한 고갈 같은 게 느껴져요. 제가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런 느낌이 참 좋아요."

장난꾸러기같이 환히 웃던 선생님의 마음속은 쓸쓸한가 봅니다. 그래서 더 동화를 많이 쓰는지도 모르지요. 어린이들을 영원히 친구로 삼으려고 말이에요. 선생님의 이런 속마음이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에게 전해졌을까요? 이번에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선생님의 작품이 실렸다고 합니다. "전에 발표했던 동화집에 실렸던 작품인데요, 중학생이 읽기에 알맞게 고쳤어요.「철수는 철수다」라는 작품인데요, 정말 기분이 좋아요."

어떤 작품으로든 독자를 만나길 즐거워하는 선생님은 참 열심히 글을 씁니다. 어디에 실리는 글이든 써 주기로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끝까지 써내고 맙니다. "전문가는 변명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든 자기가 맡은 일은 해야지요. 어떤 사보에 연재 기획 꽁뜨를 맡아 쓰고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눈앞이 캄캄했지만, 많은 사람과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었어요. 이를 악물고 글을 썼지요." 누구와 한 약속이든 약속을 하면 지키고야 마는, 어린이와 만나기로 했으면 재미있는 동화를 써내고야 마는 선생님 같은 작가들이 있어서 우리 어린이들은 행복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지요.

『복실이네 가족사진』 표지 사진
『갑수는 왜 창피를 당했을까?』 표지 사진
『상계동 아이들』 표지 사진
선생님은 살아 가면서 가장 신기한 게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이고요, 둘째는 글을 쓴다는 것, 셋째는 마흔 살에 자전거를 배운 것이랍니다. 자전거?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 "자전거를 배우기 전에는 하루에 세 시간씩 걸었어요.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카세트를 가방에 넣고 이어폰을 꽂고 하루에 세 시간씩 걸어 다녔어요. 자전거를 타게 된 다음에는 이어폰을 꽂고 자전거를 세 시간씩 달렸죠. 요즘은 출근하느라 그럴 틈이 없네요." 아, 참 선생님은 지금 계림북스쿨 출판사의 기획 위원이랍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선생님의 작업실이 있어요. 글도 쓰고 출근도 하면 힘들지 않으실까요? "전에도 푸른나무 출판사와 푸른숲 출판사에서 기획 위원으로 일한 적이 있어요. 출근하니까 오히려 활력이 생기는 것 같아서 좋아요. 집에서 혼자 글만 생각하면 지칠 때가 있거든요. 이런 작업실이 생긴 것도 행복하구요." 언제 어디서나 행복할 구실만 찾는 선생님 같아요.『복실이네 가족사진』에 나오는 복실이나 효돌이처럼 말이에요.

어린이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갑수는 왜 창피를 당했을까?』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책이 나올 거라고 하네요. 바둑이가 밤중에 무얼 하는지 궁금한 주인공이 강아지의 몸에 사는 이로 변해 강아지가 밤중에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다고 합니다. 강아지들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비열함과 따뜻함, 추악함과 선함을 그렸답니다. 똥개들에게도 우정이 있다고 하는 선생님은 강아지를 무척 좋아한대요. 강아지를 얼마나 좋아하느냐 하면, 길을 가다가 강아지를 만나면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랍니다. 아마 선생님이 강아지 띠라서 그런가 봐요.

욕심쟁이 공주가 죽어서 피어났다는 전설을 지닌 튜울립 꽃을 가장 좋아한다는 선생님의 사무실을 나섰더니 눈이 더욱 펑펑 쏟아집니다. 눈 오는 날 신춘 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또 다른 눈 오는 날에는 신춘 문예 소설에 당선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선생님께 얼마나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걸까요? 32년만의 폭설이라는 그 날 생각한 동화로 글을 써서 온 나라의 어린이들과 몽땅 친구가 되는 그런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공혜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여러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에게 좋은 읽을거리를 권해 주고 싶어서 좋은 어린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어린이』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좋은 어린이 책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어린이들이 행복에 겨워 웃음 터뜨릴 날을 기다리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