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04월 웹진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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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내가 꼭 만들고 싶은 어린이책]
어린이책의 지평을 넓히는 책

신수진 | 2001년 04월

어느 날 한 서점에서, 갖가지 그림책을 잔뜩 골라 와서는 계산대에 ‘턱!’ 하고 내려 놓는 아이를 보았다.『강아지똥』이니 ‘퍼시 아저씨 시리즈’니『뽀끼뽀끼 숲의 도깨비』니 하는 책들을 끙끙대며 들고 오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엄마는 옆에서 “얘, 그만 좀 사……” 하면서 오히려 애걸이다. ‘세상에, 내 눈으로 이런 애를 다 만나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하며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강아지똥』과 『뽀끼뽀끼 숲의 도깨비』 표지 사진
“와, 이 책들 언제 다 읽을 거예요?”
“금방 봐요.” 으쓱∼ 하며 대답하는 아이. 이 대목에서 하나 더 묻는다.
“근데, 퍼시 아저씨가 좋아요, 디지몬이 좋아요?”
“디지몬이오!” 씩씩한 대답. 당연하지요, 하는 표정! …… 아, 어떻게 해야 디지몬보다 재미있는 책을 만들어 아이들을 홀릴(?) 수 있을까. 애초에 이기려는 생각을 아예 말아야 하는 것일까?

사실, ‘범생이’로만 살아 온 나의 고리타분함과 클래식한(?) 우리 회사의 분위기가 합체하여 내가 만드는 책은 늘 재미없다고 찍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걱정이다. (실제로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 흐흑∼) 그러나 어린이가 원하는 것, 어린이가 좋아하는 것만을 담아 책을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폴 아자르가『책·어린이·어른』(시공사 1999)에서 말한 좋은 어린이 책의 요건 가운데 하나가 “예술의 본질에 충실한 책”이다. “직관에 호소하고 사물을 직접 느낄 수 있는 힘을 주는 책. 읽는 순간 이해할 수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책. 어린이들의 영혼에 깊은 감동을 주어 평생 가슴 속에 추억으로 간직되는 책.”

『책·어린이·어른』표지 사진
어른이라면 누구든 어린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가치나 덕목들을 나름대로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 덕목 가운데서 예술성이란 측면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어렸을 때 최고의 예술 작품을 주고, 예술에 대한 안목을 길러 주자는 것, 이런 책을 읽고 자란 어린이들이 많아지면, 그 아이들이 만드는 세상은 분명히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천박한 세상과는 다른 곳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좋은 그림책의 역할이 정말 크다고 생각한다. 그림책이란 간결하고도 깊이 있는 글과 한쪽 한쪽 정성을 다한 그림이 어우러지는 것으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접하는 장르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각대장 존』같은 작품을 우리 나라에서 누가 만들어 왔다면 담당 편집자는 분명히 “초등학생들은 그림책을 안 보니까 존을 유치원에 다니는 애로 해 주세요.”라는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 비아냥을 한 선배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정말이지, ‘어린이 눈높이’라는 것을 핑계삼아 이런 식으로 검열(?)을 하는 편집자가 되진 말아야지 다짐하곤 한다.

The Highwayman과 Zagazoo 본문 사진
나는 찰스 키핑의 The Highwayman(Oxford University Press, 1981)이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어린이 그림책에 ‘피 흘리며 쓰러진’ 노상강도가 등장하다니……. 최근에는 퀜틴 블레이크의 Zagazoo(Jonathan Cape Ltd., 1998)라는 그림책에서 부부가 아이를 던지며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고도 ‘흐억!’ 했다. 이런 대목에서, 나라면 과연 “저……너무 심하지 않아요……? 좀 고쳐주시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요즘 다짐한다. “독자환경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요……” 하는 핑계를 대며 작가의 생각을 잘라 내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펼칠 수 있게 하는 편집자가 되겠다고. “어린이 책 시시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예술 세계를 보여 줄 만한 책들을 작가와 함께 고민하며 차근차근 만들고 싶다고.

내 딴에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만들었던 책 가운데 하나는『고래는 왜 바다로 갔을까』(창작과비평사, 2000)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고래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이 다음 생에서는 꼭 혹등 고래로 태어나서 뿌우 뿌우∼ 노래를 부르며 온 세상 바다를 헤매어 다닐 거다.) 1997년 가을, 포항 앞 바다에 돌고래 떼가 다시 돌아왔다는 신문 기사가 크게 난 적이 있다. 어린이 책을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섬광처럼 생각이 스쳐 갔다. 그래, 우리 나라 고래를 소재로 책을 만들어 보자!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얘기부터, 사라져 가는 귀신 고래 얘기까지. 사실 우리 나라에 고래가 얼마나 많았는데…….

『고래는 왜 바다로 갔을까』표지 사진
그런데 ‘무슨 무슨 과학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인 책은 많아도, 이렇게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만든 지식 책은 (우리 나라 필자가 쓴 것으로는) 거의 없어서 시장에서의 반응이 어떨지 좀 떨리기도 했다. 그러나 용감하게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머릿속으로 대충의 구도를 그리고 나머지는 전문 필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과학아이’라는 기획 단체를 떠올렸다. 곧 만나서 함께 목차를 짜고, 샘플이 될 만한 외국 책들을 모아서 살펴 보고, 사진 자료와 그림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완성된 원고를 받은 것은 기획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두세 번의 수정을 거쳐 디자이너(달·리 크리에이티브)에게 보낸 뒤로는, 아무래도 시각자료가 제대로 보여야 할 테니 두 페이지 단위로 이야기가 끊어지는, 좀더 낮은 학년을 위한 정보서로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책 뒤에는 독후 활동 페이지를 넣기로 했는데, 주사위 놀이, 고래 상자 접기 등 별것을 다 생각하다가 제작 현실과 단가 등을 고려해 귀신 고래가 독자들한테 편지를 보내 오는 형식으로 하기로 했다. 이 책 맨 뒷장을 보면 물빛 봉투 안에 고래가 보낸 편지가 들어 있고 그 옆에는 답장을 쓸 수 있는 페이지도 있다.

『지각대장 존』표지 사진
또 한번 폴 아자르의 이야기를 빌리건대 “어린 영혼의 싹을 짓뭉개 버리는 주입식 책이 아니라, 영혼 속에 지식의 씨앗을 뿌리고 건강하게 기르려는” 책을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책이라 참 뿌듯하다.

앞으로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도, 어른들도 자랑스럽게 볼 수 있는 어린이 책을 만들고 싶다. 그 책으로 인해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촉발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어린이 책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럼으로써 어린이 책 전반에 대한 인식과 공부가 깊어지게 하는, 그런 선도적인 책을 만들고 싶다. 작가의 상상력, 아이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넓혀 주는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 이런 꿈을 꾸며 오늘도 작가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신수진 / 어릴 때는 물론 대학 때도 동화책과 그림책을 즐겨보며 살았습니다. 1996년부터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고 있지요. 현재 창작과비평사 어린이 책 팀장입니다. 매주 화요일에는 SBS의 라디오 프로그램인「책하고 놀자」에 패널로 참석하여 좋은 어린이 책을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