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06월 웹진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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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내가 꼭 만들고 싶은 어린이책]
오랜 비밀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책

문승연 | 2001년 06월

얼마 전 넘어져서 손바닥이 찢어졌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어느 새 새살이 돋아 자국도 희미해져 있다. 내 피부 세포들이 그 사이 부지런히 복구를 한 모양이다. 내년이면 내 나이가 사십이니 내 피부 세포들은 성장의 기억을 잊어 버린지도 오래 되었을 텐데 여전히 잘해 보려고 한다. 기특한 것들. 아마도 살아 있는 한 내 몸의 세포들은 내 의지보다 더 분명하게 자기 임무를 기억할 것이다. 이 기억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수억 년 전부터 실패를 거듭하며 내 몸에까지 새겨져 내려온 것이리라.

『우리 몸의 구멍』본문 그림
내 몸의 세포뿐 아니라 내 인식 또한 나에게서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많은 일들도 대체로 오랜 역사 동안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고 다듬어져 온 것들이다.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쌓여 온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알지 못하고 다만 호기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기웃거려 왔다. 쓸모없던 나의 호기심이 나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쓸만해지게 된 건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고부터이다.

내가 60년대에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어린이 책을 만들게 된 건 내 의지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도시 변두리의 좁은 골목에서도 새롭고 짜릿하고 애타는 일은 매일매일 넘쳐났다. 재미있는 일은 널려 있었고 놀기에도 하루해가 짧았다. 입시의 중압감에 시달리던 십대 중반 무렵부터 자발적인 의욕도 호기심도 사라지고 소심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읽기뿐이란 걸 알았고 할 수 없이 책과 친해지게 되었다. 다른 반항은 결의가 필요하지만 책은 아무거나 읽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우리 몸의 구멍』 표지 사진과 본문 그림
운 좋게 좋아하는 미술을 해서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이십대도 편치 않았다. 나의 행복과 사회의 선을 일치시키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궁금한 게 많았다. 관계에 대해서도 관습에 대해서도 이상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내색도 못하고 생활에 떠밀려 조금 덜 자본주의적인 디자이너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희망하면서 어린이 책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 서서히 나는 그림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림책이 시각언어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이 쉽게 매료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하고 풍부한 이 책들이 주는 감동과 즐거움을 알아차리면서 디자이너로서가 아니라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으로 내 직업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림책은 주로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단순하고 소박한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직관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본질에 가깝다. 나이가 들면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림책은 읽는 것보다는 보는 책이고 여러 번 보는 책이다. 볼 때마다 만족감을 줄 만큼 재미있거나 볼거리가 있거나 어떤 예감을 주어야 한다. 그야말로 예술적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림책은 상품으로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중적이어야 한다.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드는 것은 나무를 죽이고 환경을 오염하는 일이다. 예술이 대중을 의식한다고 해서 싸구려 대중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에게 아첨하려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기 반성의 계기가 된다. 이렇게 그림책에 매력을 느껴가면서 나는 무모하게 출판사를 차렸다.

『뭐하니?』 표지 사진
『아빠하고 나하고』 표지 사진
내가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 가는 책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를 상상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다시 보고 배워 간다. 이미 세상에 있었던 것들이겠지만 내가 호기심을 느껴 발견하는 즐거움은 남다른 것이다. 스스로의 호기심에 겨워 의욕이 넘치던 어린 시절처럼 나는 세상에 대해 전에 없이 관심이 많아졌다. 그런 관심으로 작가의 철학과 관점이 있는 지식정보책을 만들어 가고 있고『우리 몸의 구멍』이 그 첫 권으로 나왔다.

그림책을 만들다 보면 필연적으로 독자인 어린이를 생각하게 된다. 그림책에서 구성과 글과 그림이 책을 보는 독자의 연령에 따라 어떻게 소통 방식을 바꿔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고 그들의 욕망과 좌절과 생명력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탐구는 나 자신과 내 아이와 내 직업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연령의 특징이 뚜렷한 시기의 책들 『한 살배기 아기 그림책』『두 살배기 아기 그림책』『세 살배기 아기 그림책』『뭐하니?』『아빠하고 나하고』등 아기 그림책 시리즈를 만들어 가는 것을 시작으로 나는 이런 문제의 해답을 풀어가 보려고 한다.

이렇게 책을 만들어가는 것이 내게는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되고 책을 만들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은 내 삶을 풍부하게 한다. 어린이에 대한 헌신과 열정으로 나를 감동시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낮추어 나를 반성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나를 고양시키는 사람도 있고, 따뜻한 사람, 유쾌한 사람, 소박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관심사가 같기 때문에 대체로 금방 친해지고 신뢰감까지 느낀다. 아직 발간한 책은 별로 없지만, 또 얼마나 많은 책을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시도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나와 같은 시절을 지나가는 그들이 나는 고맙다.

나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은 없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 알고 있는 풍토와 기후와 문화가 우리 모두의 상상력의 출발점이라 생각하고, 여기서 출발하여 공간을 넘어 시간을 넘어 생각을 넓혀 나가며 즐겁게 책을 계속 만드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문승연 / 1963년 경기도 소사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대학교 응용 미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웅진 미디어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곰돌이』『세계의 역사』등과 같은 책을 만드는 데 참여했지요. 손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 좋아하신답니다. 수예, 요리, 그림 그리기 등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즐긴답니다. 책을 만드는 일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고 합니다. 편집 디자인 회사 ‘여백’과 출판사 ‘돌베개 어린이’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좋은 어린이 책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