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09월 웹진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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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우리 동화 제대로 보기]
슬픔 어린 눈으로 보는 고향

김서정 | 2001년 09월

얼마 전 백두산 천지를 보았다. 그리고 머릿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분화구 바로 밑까지 미친 듯 지프를 몰아 올라오던 중국인 운전수의 재촉,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 무리의 호들갑도 그 전율을 전혀 손상시키지 못했다.

『압록강은 흐른다』 표지
그 곳은 정말 달랐다. 단순히 장엄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신비스럽다거나 감탄스러운 경지를 넘어선 어떤 강력한 영적 기운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지상의 풍경이 아닌 것 같은 그 놀라운 곳이 바로 ‘우리’의 영토였다! ‘우리 민족의 영산’이었다. 나는 ‘민족’과 ‘나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막연하기도 하고, 정체가 애매하기도 하고, 감상적 허상이라는 혐의가 씌워져 있기도 했던 민족이라는 개념이 그 곳에서 그렇게 막강한 실체를 보여 주었던 것이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본문
천지를 보고 온 후에 읽은『압록강은 흐른다』는 또 다른 민족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 지금부터 80여 년 전,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지구 반대편 낯선 땅에 자리를 잡은 한 작가가 모국어가 아닌 남의 나라 말로 쓴 어린 시절의 조국 이야기는, 천지의 물처럼 잔잔하게, 그리고 명징하게 ‘나의 나라’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아주 놀랍고 낯선 감각이었다. 마치 내가 독일 사람이 되어 동방의 한 신비한 나라에 대해 처음 눈뜨게 된 듯한 경이로운 체험을 이 책은 안겨 주었다.

『압록강은 흐른다』 표지
1900년대와 1910년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고 독립 운동을 벌이던 혼란과 비극의 시기이지만 이 이야기는 그 혼란과 비극을 비장하게 옮기려 애쓰지 않는다. 쉰이 가까운 나이의 화자는 다섯 살 때의 일화를 시작으로 자신이 살아 냈던 그 시기를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미륵이 여유 있는 지주 집안의 외아들로 자라 한문과 신학문을 배우고 의대에 입학해 공부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어두운 바깥 사회는 그만한 집안의 그만한 나이 아이의 눈에 비치는 세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으로 “모든 교과서가 일본 말로 바뀌”게 된 일로 아이가 겪는 고통은 “학교 공부는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고, 시간도 많이 걸렸”기 때문에 “한밤중까지 책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적인 역사가 인정되지 않”고 “다만 오래 전부터 일본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힘없는 이웃 나라로 간주”되는 역사 교과서에 대한 언급도 다만 그뿐, 다른 울분이나 비분은 없다. 그보다 미륵에게 중요한 것은 사촌들과의 놀이와 공부, 누나들, 자기 집 땅을 부치는 소작인들의 생활, 아버지와의 관계 같은 개인적 세계이다. 책 전반에서는 그 개인적 세계가 간결하면서 기품 있는 문체로 아름답게 그려진다. 물론 다섯 살짜리 아이의 말이나 생각이 기품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소년 시절에 체험한 일들을 그리면서 그 안에 “한 동양인의 정신 세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작가의 시각과 언어 덕분이다.

『압록강은 흐른다』본문
험한 바깥 세상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어른이 되어 그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도록 어린 미륵의 세계를 튼튼하게 구축시켜 준 힘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 곁에 있을 땐 왠지 모르게 아늑한 품에 안겨 보호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할 만큼 아버지는 작가에게 튼튼하고 안락한 성채였다. 바깥 세상은 “파괴된 성벽이며 지붕이 헐린 성곽” 때문에 어린 미륵을 “산책하러 나가기도 싫”을 정도로 “슬프게 했고 공포감마저 가져다 주”는 곳이었다. “걱정 말고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고, 세상 일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세상에서 격리시키려고 했다기보다는 그의 유난히 여리고 민감한 영혼을 최대한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 얻어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채 쇠사슬에 묶여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는 농부를 보고 공포에 질려 온 몸이 불덩이가 될 정도로 상처받는 아들을 지켜 주려는 아버지의 속 깊은 배려. “나는 아버지의 핏줄을 이어 받았고 아버지는 나를 돌봐 주기 때문”에 아버지의 품 안에서는 안전하다는 소년의 믿음은, 민족이라는 추상적·집단적 개념에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실체와 생생한 느낌을 덧입혀 주고 있다.

『압록강은 흐른다』 본문 그림
그런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소년기를 보낸 미륵은, 피를 보고 떨던 아이에서 시체를 해부하는 의대생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민족 모두에게 관계되는 일이라면 우리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고 파고다 공원의 독립 선언 현장에 참여한다. 시위 참여자에 대한 포위망이 좁혀 오자 조국을 떠나 머나먼 독일 땅으로 유학을 떠나는 미륵. 압록강변에 선 그는 강 하구가 바다처럼 넓은 것을 보고 “기절할 만큼 놀”라고, 물결을 헤쳐 가는 배 안에서는 “마치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과장법은커녕 감정의 노출조차 극히 절제하는 단정한 문장들 속에서 이런 강도의 비유법이 쓰인 대목은 각별히 눈길을 끈다. 고향 땅을 떠나던 순간의 비감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압록강은 흐른다』본문
중부 독일의 작은 도시에 거처를 정한 미륵이 고향에서 편지가 왔는지를 살피러 매일 우체국에 가지만 다섯 달 동안 번번이 허탕을 치고 돌아오다가 어느 집 정원의 꽈리 앞에 멈춰 서는 장면은 참으로 애잔하다. 집주인이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도로 넋을 잃고 서 있다가 고향 이야기를 해 주고 꽈리 가지 하나를 얻은 그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며 감격해한다. 그 눈물겨운 에피소드는 결국 어머니의 별세를 알리는 편지로 마감되지만, 가족과 고향을 향한 더욱 가슴 저미는 그리움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압록강은 흐른다』 본문 그림
이미륵은 이 책에서 민족애를 부르짖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나라의 가장 큰 과제였던 일본의 퇴각과 조선의 독립을 외치지 않았다. 그는 목숨 걸고 독립 운동 전면에 나선 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국으로 물러나, 민족 중흥과는 아무 관계 없는 동물학을 공부했고, 무엇보다도 우리 말이 아닌 독일 어로 작품을 쓴 독일 작가였다. 그런데도 그의 이야기는 내 고향 내 나라와 내 가족 내 동포를 우리 안에서 불러 일으킨다. 머리 속에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피부 위에서. 그것은 고향 이야기로 일관되는 그의 작품 소재 덕분이라기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듯한 봄날의 미풍 같고, 빛 바래 가는 나뭇잎을 쓸쓸하게 비춰 주는 가을 날의 햇빛 같은 묘사 덕분이다. 서울로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잃지 말라고 당부했던 “온화한 성품”을 그는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섯 살 어린 때, 글을 읽지 못해 아버지에게 혼나는 사촌의 눈물을 보면서 느꼈던 슬픔 어린 눈으로 고향을 보고 있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본문 그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형을 면하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천자문을 짓고 백발이 되어 버린 시인 이야기에서부터 “집집마다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회색 지붕들은 서서히 여름 밤 안개 속으로 잠겨” 가는 고즈넉한 저녁까지, 세상 모든 풍경에서 간단없이 슬픔을 느끼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아늑한 소년기를 보냈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슬픔의 마음을 갖고 있던 그는 의대 지원 이유를 묻는 일본인 면접관에게 “삶과 죽음의 원인을 알고 싶다”고 대답할 정도로 “차원 높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힘겹고 눈물겨운 과정을 겪어야 하는 모든 인간에 대해 그가 품고 있던 안타까운 연민의 정은 가족과 고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개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과꽃이나 족두리꽃이 아닌 안개꽃. 우리 나라 작가가 쓴 우리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나라 번역가가 다시 우리 말로 옮겨야 하는 이 묘하게 복합적인 상황과,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과 정서를 아주 단정한 번역투 문장으로 읽는 낯선 맛이 고향집 울타리 안의 안개꽃이라는 이질적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조화가 아니다. 고향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면서도 낯선 세계를 경이와 찬탄으로 받아들인 작가 우리에게 새롭게 열어 준,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경이의 눈이다.
김서정 / 1959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뮌헨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한국프뢰벨 유아교육연구소의 수석 연구원과 공주 영상 정보 대학 아동 학습 지도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동화 작가와 아동 문학 평론가,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화 『믿거나 말거나 동물 이야기』『유령들의 회의』를 썼고,『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행복한 하하호호 가족』『용감한 아이린』『어린이 문학의 즐거움』(시리즈)『용의 아이들』등 옮긴 책이 아주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