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웹진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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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어린이 문학]
바다의 노래

오석균 | 2001년 11월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워즈워스가 자신의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쓴 구절을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겐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별다른 인생의 경험이 없는 어린이들이 어른의 아버지라니……. 나는 이 구절을 그저 어린이들에게 유별난 애정을 가졌던 한 서정시인의 감상적인 표현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얼마 전, 하이타니 겐지로의『바다의 노래』를 읽으면서 문득 이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바다의 노래』표지
국제 안데르센상 특별상을 받았으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는 17년 동안 교단에 섰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들을 썼다. 창작을 하면서 그가 자신의 철학으로 삼은 것은 ‘어린이에게 배운다’는 원칙이었다. 자칫 고루하고 일방적인 교훈으로 끝나기 쉬운 이러한 신념이 싱싱한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시간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또 그들로부터 배우면서 웅숭깊어진 마음의 눈 덕분이다. 그의 작품들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게 되면, 그 마음이 대상을 얼마나 더 넓고 깊게 비출 수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 준다.

하이타니 겐지로는 때로 어린이들의 생각이 어른들보다 깊은 이유를 어린이 특유의 감수성에서 찾는다. 그가 『바다의 노래』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뚜렷하게 느끼고, 생명의 아주 작은 흔들림까지 섬세하게 파악”하는 고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거칠고 삭막한 생존 경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시들고 찌들어 가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의식을 합리화시키는 어른들과 달리,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아직 훼손되지 않은 감수성으로 자기 밖의 모든 존재를 공생의 관계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수한 생명들의 맞물림과 어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린이들의 이런 순수함이야말로 우리 어른들이 다시금 회복해야 할 심성일 것이다.

『바다의 노래』본문 그림
『바다의 노래』는 대단히 서정적이면서 또한 서사적인 작품이다. 등장 인물들의 감성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풍부하면서도, 진행되는 사건과 상황들의 얽힘이 무척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겐타는 어부인 아빠와 둘이서 산다. 겐타는 아빠를 닮아 무뚝뚝하고 말주변도 없지만 속이 깊다. 겐타는 아빠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밤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따라가 보고는 어느덧 아빠의 힘든 사정도 넌지시 헤아리는 소년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반으로 올라가면서 단조롭기만 하던 겐타의 생활에 변화가 생긴다. 담임을 맡게 된 노리코 선생님은 숫기 없고 내성적인 겐타의 마음을 처음으로 흔들어 놓는다. 겐타가 엄마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노리코 선생님은 눈에 띄게 드러내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각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겐타의 마음을 보듬어 준다. 노리코 선생님은 겐타와 함께 겐타 아빠의 배를 타고 삼치잡이를 나가기도 하고, 바닷가에 서서 지는 해를 같이 바라보기도 한다. 그 때, 갑자기 노리코 선생님이 겐타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한다. “겐타의 어머니는 바다에 계셔. 할아버지도 바다에 잠들어 계시구. 겐타가 바다에 끌리는 마음을 이제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아. 그게 참 기뻐.”

『바다의 노래』본문 그림
사춘기로 접어든 소년의 미묘한 심리는 가나코와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시에서 전학 와서 겐타의 짝이 된 가나코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매우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씩씩하고 쾌활한 소녀 가나코에게도 겐타와 비슷한 그늘이 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지금은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것이다. 겐타는 자기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밝히는 가나코의 태도에 내심 놀라면서도 점점 마음이 끌린다. 노리코 선생님과도 그랬듯이, 바다는 겐타와 가나코를 한결 가까운 사이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겐타의 반에는 아빠가 어부인 친구들이 셋 있지만, 아빠의 뒤를 이어 어부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는 겐타 혼자뿐이다. 가나코는 노리코 선생님과 함께 이런 겐타의 가장 든든한 마음의 후원자가 된다.

겐타의 친구들이 어부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어른들의 말마따나 이제는 어업이 ‘한물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줄어들고, 고기잡이 경쟁은 더 치열해지며, 배를 사기 위해 수산업 협동 조합에서 빌린 빚은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까지도 어둡게 만든다. 그런데 현재 어업이 안고 있는 문제를 자유 연구 형식으로 공부해 보자는 노리코 선생님의 제안은 겐타와 친구들에게 건강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된다. 현장 학습을 통해 이 문제를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아이들은 옛날 방식의 고기잡이를 고집하는 마사키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한다. 대량으로 물고기를 남획하는 어업 방식에 비판적인 마사키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여기서 보면 바다는 참 아름답지. 그렇다면 물고기들한테도 아름다운 바다일까?”

『바다의 노래』본문 그림
‘왜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게 되었나’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교과서 밖의 공부는 자연스럽게 바다의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욕심 때문에 황폐해지고 있는 바다를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터전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마음의 키가 훌쩍 자란다. 나는『바다의 노래』를 읽으면서 내 마음까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렇게 간결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생활의 치열함과 더불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잘도 그려냈는지. 게다가 살아서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고 각기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한데 모두어가는 사람들……. 끝으로, 왜 이번 글의 제목을 작품에서와 똑같이 ‘바다의 노래’로 정했는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 이유를 헤아려 주시기를.
오석균 / 성균관대학교와 독일 뮌헨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어린이 책을 비롯하여 여러 책들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산하 출판사와 계림북스쿨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을 만들었으며, 지금은 도서 출판 청년사의 주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