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01월 웹진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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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김서정 | 2002년 01월

1944년 3월 어느날, 스톡홀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를 둔 37살의 평범한 주부였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산책을 나갔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이 부러졌고, 하릴없이 일 주일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에 실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사진
“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던” 이 젊은 엄마는, 평소 아이들에게 들려 주었던 이야기를 종이에 옮겼습니다. 그것이 바로『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었습니다. 1941년 병석에 누워 있던 일곱 살짜리 어린 딸이, 아마도『키다리 아저씨(Daddy Long-Legs』에게서 영향을 받은 듯 불쑥 ‘삐삐 롱스타킹 이야기 해 줘!’ 하고 던진 말에 응해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던 이야기였답니다.

원고를 완성한 그녀는 당시 열 살이던 딸의 생일 선물로 책을 내 주려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부모 보호도 없이 혼자 사는 어린 여자아이가 터무니없이 힘은 세지, 돈은 물 쓰듯 쓰지, 어른들을 우습게 알고 조롱하기 일쑤지,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945년 드디어 나온『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은 단번에 어린 독자들을 사로잡았고, 스웨덴뿐 아니라 전 유럽의 어린이 문학에서 한 분기점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은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그 후 50년 가까이 놀라운 필력으로 아이들과 어른들을 동시에 즐겁게 하고 감동시키는 작품들을 100권 이상 써냈습니다. 스웨덴에서 러시아까지 수많은 나라에서, 안데르센 상에서부터 슈바이처 상까지 수많은 상을 그녀에게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업적에 대한 찬사는 이런저런 상보다는 전 세계의 독자들이 그녀의 작품에 보여 준 열광적인 반응과 사랑이 더 잘 보여 줍니다.

롤프 레티시가 그린 삐삐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삐삐는 억눌려 있는 아이들의 원초적이고 야성적인 꿈과 소망을 구현하고 있는 캐릭터라는 설명입니다. 아니카와 토미처럼 얌전하고 부모 말 잘 듣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도 모든 제약과 경계를 파괴하고,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그 욕망을 현실에서 날 것 그대로 표출하고 실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안 된다’는 것만 가지고는, 정말 안 됩니다. 부인하고 억누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욕망이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형태를 바꿔 문화적으로 표현하고 분출하는 법도 함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문학, 음악, 미술 등등의 예술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생기는 결과물입니다. 어린이 문학도 예외는 아닙니다.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마음껏 우당탕거리며 뛰어 논 다음 속이 후련해져서 다시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게 하는 역할은 다른 어느 예술 장르보다 어린이 문학에서 더 중요하게 담당해야 합니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꼬마 백만장자 삐삐』『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표지
삐삐는 아마 모든 아이들을 대신해서 그런 역할을 맡아 준, 어린이 문학 최초의 캐릭터일 것입니다. 그러니 삐삐가 현실적인 덕목들, 어른 말 잘 듣고, 학교 잘 다니고, 세상의 질서와 예절과 외양과 경제 개념을 따르는 따위의 일을 우습게 여긴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삐삐의 문학적 기능과 특성을 간과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스웨덴 어로 ‘삐삐’가 ‘미쳤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퍽 시사적입니다. 이 이름을 어른 작가가 아니라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원했다는 사실도 재미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일곱 살 전후의 아이들이 부모 ‘꼭지가 돌 정도로’ 말 안 듣고,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노는 모습을 보면 정말 ‘삐삐’가 따로 없다 싶을 정도입니다. 아이들은 아마 자기 자신 안에 ‘삐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감지하고, 그 난처한 사실을 인정받고, 정당화시키고, 나아가 위로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 삐삐의 성공에 아이들이 환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사자왕 형제의 모험』표지
삐삐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그렇게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잘못 사용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자기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놀랍다기보다는 당연하다고 해야 겠군요. 주인공은 언제나 결국 옳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겪은 후에는 언제나 바르고 행복한 결말을 보여 준다는 것이 어린이 문학의 특성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칼하게도 삐삐는, 지극히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삐삐가 편드는 쪽은 언제나 위기에 처한 약자이고, 골려 주는 쪽은 권위와 경직과 탐욕과 폭력을 상징하는 어른들이나 좀 큰 아이들입니다. 삐삐는 그 괴력을 가지고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약간 독특한 장난을 치거나 위협을 하는 정도입니다. 자기 금화를 훔치러 들어온 도둑들을 붙잡아서 주는 벌도, 춤추기입니다! 과격할 정도로 창의적인 힘과 장난과 언어 능력을 구사하는 삐삐는, 가만히 보면 폭력을 싫어하고 개개의 생명을 존중하는 휴머니스트입니다. 삐삐뿐만 아니라 다른 책을 봐도 그렇습니다. 죽음과 전쟁에 관한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사자왕 형제의 모험』같은 책에서조차도 슬픔과 연민,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에 대한 희망이 들어 있는 어조를 느낄 수 있습니다. 1987년 스웨덴에서는 린드그렌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그녀의 이름을 딴 동물 보호법을 제정했다고 합니다.

『산적의 딸 로냐』표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삐삐가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가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솔직하게 쏟아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 자기의 행복했던 놀이와 꿈을 혼신의 힘을 다해 털어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모든 작품에는 내 어린 시절이 들어 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스웨덴의 작은 마을 빔머비에 사는 농부의 네 자녀 중 두 번째 딸이었던 린드그렌은 “우리보다 더 재미있게 논 아이들이 있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재미있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텔레비전도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었지만, 재미있는 자연과 재미있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삐삐와 아니카와 토미가 함께 나무 집에 올라가서 노는 일,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면서 팬 케이크 구워 먹은 일, 마을에 서커스가 들어와 가슴 두근거리며 찾아가는 일 등은 모두 린드그렌의 체험이었습니다. 최초의 ‘물건 발견가’는 린드그렌의 동생 군나르였습니다. 삐삐의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도 모두 어린 린드그렌의 머리에서 풀려나왔던 이야기였습니다. 린드그렌의 형제들과 친구들은 낡은 창고 안에 들어가 헌 매트리스와 담요를 쌓아 올려 놓고, 자기들이 완두콩 위에 앉아 있는 공주라고 상상하면서 그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었습니다. 생감자를 갉아먹으며 몇 번이나 읽었던 낡은 책에 다시 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는가 하면, “한 친구가 팬츠에 오줌을 쌀 정도로” 웃어댄 일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뭔가 유익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그 재미있는 어린 시절을 진심으로 나누어 주고 싶어했습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아버지의 말솜씨를 물려받은 데다가 글재주까지 뛰어나 ‘빔머비의 셀마 라걸뢰프’로 불리던 린드그렌은, 사람들이 모두 저 아이는 작가가 될 거라고 여겼지만 “책은 절대로 안 쓰리라고 혼자서 고집을 부렸”다고 합니다. 삐삐처럼 청개구리 노릇을 한 거지요. 그러나 일단 책을 쓰기 시작하자 그녀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라스무스와 방랑자』『엄지 소년 닐슨』
그녀는 많이 썼을 뿐 아니라, 다양하게 썼습니다. 거침없는 환상, 다층적인 구조, 깊이 있는 상징을 구사하는 장편 판타지인 『산적의 딸 로냐』,『미오 나의 미오』,『지붕 위의 칼손』등이 있는가 하면 아기자기하고 작은 아이들의 생활 이야기인 『떠들썩 마을의 아이들』,『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세 명의 아이들이 스릴 넘치는 모험을 즐기며 살인범을 밝혀내고 도둑을 잡는『명탐정과 보석 도둑』시리즈, 떠돌이 고아 소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라스무스와 방랑자』시리즈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책을 통해 그녀는 한결같이 과장하지 않고, 위압적으로 가르치지도 않고, 솜사탕 같은 잠언성 진술로 향기를 풍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은 작가의 메시지와 작품의 구조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맞물려서 탄탄한 문학을 만들어 냅니다. 그녀의 책들은 가히 동화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나이 아흔을 훌쩍 넘겨 백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한다는 소리도 높지만, ‘동화’만을 쓴 작가에게 노벨상을 줄 수는 없다는 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가 그 많은 어린 독자들의 마음 속에 풀어 놓아 준 자유의 바람과 그녀가 그들에게 주기 원했던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시각”은, 세계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불평등과 폭력과 억압의 어두운 구름들을 몰아내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서정 / 1959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뮌헨 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한국프뢰벨 유아교육연구소의 수석 연구원과 공주 영상 정보 대학 아동 학습 지도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동화 작가와 아동 문학 평론가,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화『믿거나 말거나 동물 이야기』『유령들의 회의』를 썼고,『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행복한 하하호호 가족』『용감한 아이린』『어린이 문학의 즐거움』(시리즈)『용의 아이들』등 옮긴 책이 아주 많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