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01월 웹진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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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었어요]
너무나 투명한 현재

이효인 | 2002년 01월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가 그 아이에게 품은 꿈은 무척 소박한 것이었다. 자라서 나와 같이 산에 다니는 것, 그뿐이었다. 끝없는 책임과 의무만 줄 것 같은 존재였지만 그 두려움 반대편에는 새 연인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감 그리고 기쁨이 잔뜩 있었다. 그 감정은, 구체적으로는, 나와 같이 산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산길이 묻혀 버린 강화의 산을 등에 업힌 채 다녔고, 북한산은 말할 것도 없고 업고 걸려서 일찌감치 지리산에 올라야만 했다. 이후 산에 낯선 어른들보다는 훨씬 더 산을 잘 오르게 된 그 아이는 이젠 북한산 승가사 오르는 길에 오면 “야, 공원이다, 공원!”하며 풀풀 뛰어다닐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에 접어들자 산에 가는 일을 노골적으로 꺼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부모 위주의 산행이라서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걔 역시 세상의 놀이에 더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엉이와 보름달』표지와 본문
『부엉이와 보름달』을 읽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침에 마시는 우유보다 하얀 눈길”을 부엉이를 보러 간 아이의 이야기였다. 말을 하면 부엉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또 춥기 때문에, 꼭꼭 입을 감싼 채 아이는 아버지를 따라 설레는 가슴만으로도 용감하게 밤길을 걸을 수 있었다. 부엉이 소리를 내서 만난 부엉이와 한참 동안 말없는 대화를 나눈 후 아이는 “부엉이 구경을 가서는 말할 필요도, 따뜻할 필요도 없단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확인하고 내려온다. “저렇게 눈부신 부엉이와 보름달 아래를, 침묵하는 날개에 실려, 날아가는 소망”만을 안고 내려온다.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내 아이가 산을 꺼리게 된 것은, 내가 산행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이라는 자책을 하며 내/려/왔/다.

『돌리틀 선생의 바다여행』표지
그 자책의 하행길에서『돌리틀 선생의 바다여행』을 만났다. 돌리틀 박사는 의학박사 출신의 박물학자로서 개, 앵무새, 오리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돌고래 심지어 물고기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집엔 집을 관리하는 잡종견 지프, 가정부 노릇하는 오리 다브다브, 그에게 동물의 말을 가르쳐 준 앵무새 폴리네시아, 원숭이 치치 등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된 스타빈즈는 자청해서 돌리틀 박사의 조수가 되어 떠다니는 거미원숭이섬을 찾아나선다.

갖은 위기가 있을 때마다 박사의 기지와 동물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찾아간 그 섬에서 돌리틀 박사는, 그가 그토록 찾던 최고의 박물학자인 인디언 롱 앨로우를 구출한다. 그러다가 졸지에 그 섬의 왕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엔 닷새동안 바다달팽이의 껍질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흥미진진한 책은 천재적인 상상력의 산물인 것만은 아니다. 전장에서 아이들에게 편지로 보낸 이야기를 엮은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산물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아이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대하는 태도가 경건해진다.

『나의 아빠 닥터 푸르니에』표지와 본문
그 경건한 마음으로 내 아이가 문득 권한『나의 아빠 닥터 푸르니에』를 들고는 책장을 넘겼다. 훌륭한 의사였으며 자애로웠고 헌신적인 닥터 푸르니에에게는 장모와 아내 그리고 아이(저자)가 있었다. 닥터 푸르니에는 술을 너무 좋아했고, 환자들과 주막의 술친구들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만, 가족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종교적 규범과 세속적 질서를 무시했고 상식적 삶을 기피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그는 결코 좋은 사위, 남편, 아빠가 아니었다. 술집에서는 그렇게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아빠를 보면서 저자는 “왜 아빠는 자식들에게는 한번도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주지 않았을까?”고 원망했다. 또 저자가 열다섯 살 되던 해 닥터 푸르니에는 마흔세 살의 나이로 무책임하게 삶을 마감해 버렸다.

『나의 아빠 닥터 푸르니에』본문 그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난 아빠보다 더 나이가 많다. 아빠를 더 잘 알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난 아빠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사는 게 간단치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좋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약한 이들을 너무 원망해선 안 된다는 것을.”이라고 후기에 썼다. 내 딸이야 이 책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건넸지만, 솔직히, 내 딸이 이 후기를 의미심장하게 봐줬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닥터 푸르니에처럼 너무 그렇게 ‘좋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자위도 해 본다. 미래는 불투명한데 현재는 언제나, 너무 투명해서 힘들다.
이효인 / 영화를 사랑하여 영화 평론가가 된 선생님은 초등 학교 5학년 딸을 세상에서 제일 예뻐합니다. 영화 가운데서 우리 나라의 독립 영화를 제일 사랑하는 선생님은 한국 독립 영화 협회에서 발간하는 계간『독립 영화』편집위원을 맡고 계시기도 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우리에겐 영화밖에 없다』라는 책도 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