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04월 웹진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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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다른 나라 그림책]
숨을 깊이 내리고 그리는 작가 Uri Shulevitz

서남희 | 2002년 04월

Uri Shulevitz
봄눈 녹듯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애타게 한 줌 집어 올리면, 한 겨울 기왓골까지 덮어버릴 정도로 펑펑 내린 하얀 눈 속을 뒹굴면서 폭신한 눈도 퍼 먹고 혀가 붙어 버릴 정도로 차갑고 단단한 고드름도 따 먹곤 하던 풍경이 떠오릅니다. 눈 내리던 그 어린 시절의 정취를 가장 잘 살린 그림책을 고르라면 저는 에즈라 잭 키츠 (Ezra Jack Keats)의 "The Snowy Day"와 유리 슐레비츠 (Uri Shulevitz)의 『Snow』를 고르겠습니다. 에즈라 잭 키츠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가이죠. 그럼 유리 슐레비츠는 대체 누구냐고요?

그는 폴란드계 유태인입니다. 2차 대전이라는 불행한 시절을 배경으로 삼아 태어난 유태인들은 아주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했지요. 독일군이 폴란드에 쳐들어 왔을 때 유리 슐레비츠는 겨우 네 살이었지만 그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전쟁의 광기는 벗어나기 힘든 심리적 상처를 안기지요. 그의 가족은 8년 동안 방랑자 생활을 하다가 1947년에 파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그만 만화와 사랑에 빠져 친구들과 만화책도 많이 만들죠.(저도 어렸을 때 많이 해 본 가락이긴 하나, 누군 그림책 작가가 되었고, 누군 이렇게 그에 대한 소개글을 쓰고 있는 차이가 있군요. 운명 탓일까요, 재주 탓일까요? 음……. 역시 후자겠죠?)

『Snow』
『Dawn』
『Rain Rain Rivers』
『The Secret Room』
『The Secret Room』
『The Golden Goose』
1949년은 도처에서 돌팔매질 받던 유태인들에게 경사가 난 해입니다. 국제적인 이해 관계가 맞물려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내쫓고 그 자리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지요. 유리 역시 다른 이들처럼 그곳으로 이주해서 거기서 고무도장장이의 도제 노릇도 하고 페인트공 노릇도 하고 예수님처럼 목수 노릇도 해 보는군요. 1952년부터는 텔 아비브에서 미술학교를 다니고 Teacher’s Institute에서 문학, 해부학, 생물학 코스를 밟기도 했죠. 군복무 중엔 청소년 잡지의 미술 담당으로 일도 해 보고. 그 뒤 뉴욕으로 건너와 Brooklyn Museum Art School에서 공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출판사에서 어린이를 위한 유태계 책에 그림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때는 자기 마음대로 못 그리고 간섭받던 시절이었죠.

1961년에 같은 길을 걷고 있던 Helene Weiss를 만나 결혼, 1962년에 전화를 받으면서 낙서를 하다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발견합니다. (레오 리오니도 그랬잖아요? 낙서장이 그림장이 만세!) 이제 삽화를 그려 보고 싶어 포트 폴리오를 들고 Harper and Row 출판사의 편집자 Susan Hirschman을 찾아가니 편집자는 그림 그릴 원고를 주는 대신 다른 제안을 합니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 보라고. “Write my own story?” 그는 두려워집니다. 자기는 아티스트지 작가는 아니니까요. 말을 다루어 글이라는 걸 쓴다는 건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I don’t know how to write.” (난 글 쓸 줄 몰라요)
“Why don’t you try?” (시도를 해 보셔야지…….)
“But I have been speaking English for less than four years.”(하지만 영어라는 걸 써 본 지 4년도 안 된 걸요!)
“Don’t worry, we’ll fix your English.”(걱정도 많소이다. 영어야 우리가 고쳐 주면 되지.)

그래서 나온 책이 첫번째 책인 The Moon in My Room이었지요.

그런데 사람은 늘 무언가 깨달으며 사는 것. 유리가 책 만들다가 깨달은 것은 자기 문화권에선 말이 넘쳐난다는 사실. 보다 함축적인 동양 문화로 눈을 돌려 그는 뜻을 명확히 표현하되, 말은 조금만 하려 애쓰게 되죠. 그러다 보니 그림이 좋아질 건 당연한 일. 펜, 잉크, 수채화, 일본의 reed pen (갈대로 만든 펜? 실물을 본 바 없어 어떤 건지 모르겠어요), 중국의 붓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을 쓰며 좋은 그림책을 만드니까 상을 많이 받게도 됩니다.

1985년까지 만든 그림책은 스물다섯 권 이상. Arthur Ransome이 우화를 다시 풀어 쓴 The Fool of the World and the Flying Ship에 삽화를 그려 1969년 Caldecott Medal를 받아 이름이 높아집니다. 그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 The Treasure은 1980년 Caldecott Honor Book으로 뽑혔지요. 그의 책 가운데서 Rain Rain Rivers는 1970년 Leipzig International Book Exhibition의 동메달, Dawn은 1975년 Christopher Award, 1976년 International Board on Books for Young People을 받았지요. 또한 그는 Robert Louis Stevenson의 Touchstone, Isaac Bashevis Singer의 The Fools of Chelm, The Golem에 그림을 그렸고, Soldier and Tsar in the Forest는 1972년 Book World’s Children’s Spring Festival에서 Honor Book으로 뽑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Snow』는 1998년에 나온 책 중에서 가장 시적이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책으로 꼽힙니다. 눈이 오지 않을 거라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일기 예보, 눈앞도 제대로 못 보는 어른들의 대사와 눈이 오고 있다는 아이의 대사가 시소를 타는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쿵덕쿵덕 장단을 맞추어 오고 가죠. 간결하면서도 위트가 넘치는 문장이 재미있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어른들은 계속 “It’s only a snowflake.”“It’s nothing.” “It will melt.” “No snow.” 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흐릿한 하늘에서 겨우 눈 한 송이 떨어지는 걸 보고 “It’s snowing.” 하며 나가 놀 채비를 하지요. 바로, 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페이지는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 덮여 있고, 아이는 단 한 마디, “Snow.”

이 책이 2차 대전을 겪었던 작가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는 평론도 있긴 하나(눈을 보는 어른들의 시각은 어떤 면에서 폭력이라고 얘기될 수 있다는 거겠죠.) 그건 너무 비약시킨 얘기 같아요. 아래의 수상 연설을 읽어 보면 느끼실 거여요.(이래서 전 평론을 싫어해요. 이론과 칼과 어긋난 끼워 맞춤이…….)  

『Snow』로 The Golden Kite for Illustration을 받았을 때 수상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Dawn (새벽)』 본문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술 취한 이 두 명이 가로등 옆에 서 있었지요. 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한 사람이 가로등을 가리키며 말했지요.
‘이건 태양이야.’
다른 이가 맞받았지요.
‘달이여!’
논쟁엔 늘 중재자가 필요하죠. 그래서 그들은 지나가는 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둘 중 누구 말이 맞나요?’
그의 대답,
‘지는 이 동네에 안 사는데유?’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뭐냐고요? 어딘가에 국한된 진실(local truth)이란 없다는 거죠. 진실이란 사는 곳에 따라 다를 수 없을 터. 하지만 날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동네에 눈이 16인치(약 44센티)나 내렸는데 근처 이웃 동네에선 날씨가 좋았지요. 하지만 날씨가 어쩌네, 하고 불평하는 대신 저는 그 날씨에 대한 그림책을 만들었죠. 그게 바로 이 책, 『Snow』입니다.”

유리 슐레비츠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한 톤이 낮습니다. 마치 숨을 깊이 내리고 인간에 대해, 자연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 번역하여 소개되어 있는 유리 슐레비츠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Dawn (새벽)』을 펴 봅니다. 새벽이란 어느 곳에서 맞든 의미가 깊지만, 고요한 호숫가에서 동터오는 새벽을 맞는 소년과 할아버지는 그대로 그 실바람과 연푸른 호수와 일체가 된 듯 합니다. 또한 『Rain Rain Rivers (비오는 날)』에서는 다락방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애가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생각을 키우고 있고, 『Monday Morning』은 비오는 월요일에 빈민가 소년이 카드를 한 장 한 장 펴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습니다. 작가는 자기 감정을 폭발적으로 내보이지도 않고, 아름답게 치장하지도 않습니다. 핏기 하나 없이 애잔하고 희미한 그림이 드러날 뿐입니다.

『The Secret Room(비밀의 방)』 본문
화려하게 채색된 그림에서도 그는 춤추지 않습니다. 『The Secret Room(비밀의 방)』은 수채화 기법을 쓰면서도 색깔이 매우 강한 그림이 나옵니다. 하지만, 아라비아의 어떤 왕과 사막의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 텍스트는 어린이 그림책으로서는 어렵다 싶을 정도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어야 합니다. 왕의 괴임을 받아 재무상으로 일하면서 분명 빼돌린 재물이 집 안 비밀의 방에 가득 쌓여 있겠거니 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얕은 마음 바닥을 드러내지만, 그 비밀의 방 안에는 사막에서 그가 짚던 막대기만 있을 뿐이지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한 가운데 서서 노인은 말합니다. “전하. 여태까지 모든 명예와 부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를 지나치게 채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I must not get too full of myself.) 그래서 저는 날마다 이 방에 들어와 저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저란 인간은 여전히 예전에 전하께서 사막에서 만났던 센 머리와 검은 수염을 기른 바로 그라는 것을…….”

이 글을 읽는 그대여, 비밀의 방을 마련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방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지요?
서남희 / 개인 홈페이지 ‘The Cozy Corner(http://cozycorner.new21.net)’에서 영어 그림책 이야기를 엮어 올리고 있습니다. 서강 대학교와 서강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CLA Extension에서 TESOL(영어 교수법)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서 10년간 살면서 Haslett Adult Education의 영어 클래스에서 보조교사, 이스트 랜싱에 있는 ‘한마음 한글학교’의 외국인반 교사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 유치원 교육에서 활용하고 있는 ‘꼬마책(Mini-Books)’을 아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구성한『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만들었답니다. 그림책, 소설책, 시를 좋아하고, 북한산, 도봉산, 지리산, 속리산, 소백산 등 바위산을 좋아하며, 무엇보다 잠 자는 것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스스로 뾰족뾰족하다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과 더불어 누구보다 둥글고 넓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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