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08월 웹진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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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었어요]
아이도 어른도 책도 하나가

김창석 | 2002년 08월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표지
“이제 아기 토끼가 잠을 자야 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아기 토끼는 아직도 아빠 토끼와 함께 놀고 있어요.
아기 토끼는 아빠가 자기 마음을 얼마나 잘 아는지 궁금했어요…….”

아빠가 책 읽어 주는 소리에도 여민이는 시큰둥하다. 이제 18개월이 다 지나가는데 이런 스토리가 있는 동화책도 좋아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여민이 표정은 여전히 별 변화가 없다. 오히려 감동을 받는 건 내 쪽이다. 아기 토끼가 아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려고 기를 쓰지만 아빠 토끼의 사랑을 따라가지는 못한다는 줄거리다. 책 제목도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이다. 나는 읽히고 싶은데 왜 여민이는 읽지 않는 걸까.

내가 여민이에게 읽히고 싶은 책 가운데 또 하나는 역시 제목이 감동적인 『아빠는 너를 사랑한단다(I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였다. 어느 겨울날 아빠 곰과 아기 곰이 길을 가는데 아기 곰이 힘들다고 투정을 시작한다. 아빠 곰이 목도리를 감싸 주고, 업어 주고, 목욕을 시켜 주지만 아기 곰은 여전히 투덜댄다. 그래도 아빠 곰은 넓은 품으로 아기 곰을 끝까지 감싸주고 재운다는 얘기다. 얼마나 아빠의 사랑이 잘 표현되었는가. 이런 마음을 여민이도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는 너를 사랑한단다(I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표지와 본문
그렇지만 그건 결국 아빠인,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른’인 내 욕심이었다. 아빠의 사랑을 책을 통해서 전해 주고 싶었지만, 여민이는 책 선정이 잘못됐음을 무관심으로 표현한 셈이다.

내가 최근에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아내와 내가 여민이에게 보여 준 책 가운데 여민이가 유난히 관심을 보였던 책들의 공통점을 확인한 뒤였다. 아내와 나는 여민이가 태어난 지 채 한 달이 되기 전부터 책을 보여 줬다. 이때 아내와 내가 세운 원칙은 아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의 강요로 책을 싫어하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여민이는 책을 너무 좋아했고 옆에 책을 놔 주면 항상 시선을 고정하면서 관심 있게 보는 등 어떤 형태로든 책을 보여 달라고 표현했다. 너무 신기했다.

이때 보여 준 책이 『꾸벅 인사 놀이』라는 기무라 유이치의 일본 그림책이다. 인사를 할 때마다 두 달도 안 된 여민이 눈을 반짝이며 약간 놀라는 표정으로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리 부부는 모든 자극은 일찍 주는 게 좋다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고 여민이는 돌이 되기 전까지 상당한 집중력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여민이가 계속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꾸벅 인사 놀이』 표지와 본문


그렇지만 상황이 반전됐다. 걷기 시작하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여민이에게 이전에 보였던 책에 관한 집중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을 보기보다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거나 집안의 물건들을 직접 탐색하려고만 했다. 그렇다면 돌이 되기 전에 책에 관심을 보인 건 책 내용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아내와 나는 약간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빨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을 보는 대신 물어뜯는 데 더 관심을 보이기까지 했다. 아, 절망! 영유아기 때의 독서습관이 평생을 좌우하고 이때 제대로 책을 보는 습관을 들이면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여러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런 혼돈의 시기에서도 여민이가 열심히 본 책들이 있었다.

여민이는 그냥 눈으로 보거나, 스토리 중심으로 흐르는 평면적이고 밋밋한 책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자신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책들을 좋아했다. 여민이에게 책은 ‘읽거나 보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노는’ 대상이었던 셈이다.

『두드려보아요!』(사계절)는 대표적인 경우였다. 푸른 나무 밑에 작은 집이 있고 파란대문이 보인다. 다음 장을 넘기면 왼쪽 페이지에는 ‘문을 두드려 보아요. 똑!똑!’이라는 글자만 보이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문이 나타난다. 이 때쯤이면 여민이는 벌써 문을 두드린다. 책을 보여 주면서 엄마와 아빠가 가르쳐줬던 노크를 기억해 내는 것이다. 다음 두 페이지에는 꼬마 미카엘이 어질러 놓은 방이 펼쳐지고 방 한 쪽에는 빨간색 문이 보인다. 그러면 여민이는 오른손을 들어 빨간 문을 두세 번 두드린다. 문이 열리면 토끼 일곱 마리가 당근과 상추로 식사를 하는 방이 나오고 한쪽에 초록색 문이 보이는 식이다. 노란 문, 하얀 문, 파란 문까지 지나고 집을 나서면 달님이 나타난다. 이 책을 보고 난 뒤로 여민이는 ‘똑똑’이라는 의성어를 알게 되었다.

『두드려보아요!』표지와 본문

『꾸벅 인사 놀이』도 마찬가지로 여민이가 질려하지 않는 책이었다. 여러 동물들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머리 부분이 큰 플립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할 수 있도록 한 구조다. 예를 들어 내가 “병아리 삐삐(고양이 야옹이, 강아지 바둑이 등등)가 쪼르르 달려와서…. 안녕하세요” 하면 여민이는 동물들의 머리 부분을 얼른 잡고 인사를 시키는 식이다.

여민이가 『Guess who!』를 좋아한 이유는 탭을 잡아당겨야 어떤 동물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조에 있었고, 『The Very Hungry Caterpillar』를 좋아한 것은 줄을 매단 연한 철사로 책속에 뚫어진 구멍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넘기는 페이지마다 작은 플립들이 5개 이상씩 있어서 무엇이 숨어있는지를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Welcome to Blue's Clues』도 여민이가 즐기는 독서목록에 포함돼 있다.

『The Very Hungry Caterpillar』 표지와 본문

어쩌면 현재의 여민이 월령대가 이런 식의 책과의 상호작용을 원하는 때인 것 같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아이의 경우 이런 토이북이 책을 좋아하도록 이끄는 데 효과가 크다. 물론 꼭 이런 기능성 책들이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책도 있다.

『달님 안녕』 표지와 본문

『달님 안녕』의 경우에 달님을 가리는 구름이 나타날 때마다 여민이는 여지없이 울어버린다. 너무 슬프게 울어서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다. 여민이가 책을 보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최근에는 ‘응가’를 하기 직전 또는 직후에 보여주는 『The story of the Little Mole』에도 상당한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다.(『The story of the Little Mole』은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로 번역되어 국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표지와 본문

스토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가 그만큼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토이북과 스토리북을 적절히 배분해 아이에게 보여 주면 아이는 나름대로 자신의 당시 선호에 따라 책을 선택해 즐긴다.

그동안 책 읽어 주는 아빠로서, 또 엄마로서 우리 부부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아이가 책을 선택하고 읽고 반응하는 모습을 관찰해 보면 아이의 기질에 따라 저마다 좋아하는 책이 다르고 감정을 표현하는 정도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른들은 내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아이의 즐거운 친구가 될 수 있는 책을 아이와 함께 선택하고 마음껏 가지고 놀고 즐기면 그만이다. 어른들은 그 속에서 아이와 함께 새로워지는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슬픈 장면이 나오면 아이와 함께 마음껏 울고 기쁜 장면이 나오면 손을 올려 힘껏 만세를 부르자. 함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면 아이와 마음껏 사랑을 나누자. 이렇게 순간을 즐기면 된다. 아니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소리 지르며, 때로는 속삭이면서 아이와 수다를 떨면 된다. 책의 상황에 몰입되면 아이도 어른도 책도 하나가 된다. 앞으로 여민이는 또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될까?
김창석 / 1968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94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씨네21, 한겨레신문 사회부, 한겨레21 등에서 일했습니다. 주로 맡은 취재분야는 좀 삭막하다 할 수 있는 사회분야의 사건 취재 쪽이었습니다. 1998년 결혼해서 2년만에 아이를 가진 뒤 2001년 1월에 아들 여민이와 해후했습니다. 근무하고 있던 『한겨레21』 지면에 인권 출산의 개념을 소개한 「출산기」를 실은 게 계기가 되어 아이가 태어난 지 5개월째 되던 지난해 봄 육아 휴직을 하게 되었는데, 이후 육아에도 관심이 많은 좋은 아빠로 과대포장되어 사실은 무척 괴롭기도 하답니다. 맞벌이 부부이면서도 육아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대부분의 시간을 희생하는 쪽은 아내인데도 그런 얘기를 일부에서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이 자리를 빌어서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 따뜻한 남편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