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1월 통권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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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우리 동화 속의 아이들]
소망의 아이 창남이가 입은 ‘만년샤쓰’

김경연 | 2003년 01월

연재를 시작하며

방정환 선생님
몇년 전 우리 아동 문학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서양 아동 문학과는 달리 몽실이라든가 노마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캐릭터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작가가 관념 속의 아이를 그려 냈을 뿐 살아 있는 아이들을 창조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동화들을 얼마나 안다고 ……. 마음 한구석이 늘 편안치 않았다. 공부가 턱없이 부족함에도 이번 연재를 맡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기회에 우리 아동 문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동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주목하려는 이유는 우선 아동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동 문학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또는, 아이들이 읽어 주기를 바라며 작가는 작품을 쓴다. 이때 작가는 머리 속에 알게 모르게 어떤 아이의 상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상은 일정한 문학적 형식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작가가 갖고 있는 아이의 상은 작중 아이라는 인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언어 선택과 주제, 구성 등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 곳곳에 작가의 아동 상이 투영된다. 누가 의식적으로 어려운 어휘를 골라 쓰고 지나치게 복잡한 플롯을 설정하겠는가. 누가 동화에서 폭력의 미화나 노골적인 성 묘사를 기대하겠는가. 그런 일들을 피하는 것은 독자인 아이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동 문학에 대해 지니는 일정한 관념들이 아동 문학이라는 문학 체계의 규범을 이룬다.

문학 작품에서 특히 등장 인물은 그 주변 세계와의 연결 고리이자 작가의 이념을 담아 내는 그릇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등장 인물이 아동일 때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작가와 시대의 아동 상이 반영된다. 다른 한편 모든 체계가 그렇듯 일단 생겨난 체계는 그 체계만의 특수한 발전 논리가 있게 된다. 그것은 고유성이기도 하고 특수성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동 문학의 시작부터 우리 동화 속의 아이들의 모습을 추적해 보는 것은 우리 아동 문학의 고유성과 특수성,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역량에 한계가 있는 필자로서는 한 걸음에 거기까지 가기는 너무 먼 길이다. 당장은 아쉬우나마 주요 작가 주요 작품들을 대상으로 첫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만년샤쓰』표지
소망의 아이 - 『만년샤쓰』

우리 아동 문학의 시작에 우뚝 서 있는 이는 누구보다도 방정환이다. 한때 동심주의니 영웅주의니 눈물주의니 해서 비판의 표적이 되다가 요즈음 재평가가 한창인데, 그 가운데 위치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만년샤쓰』(1927)라는 단편 작품이다.

만년샤쓰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을 말한다. 이 제목의 사건이 파악되는 것은 추운 겨울날 체육 시간에 웃통을 벗어야 할 때이다. 창남이가 양복 저고리를 벗자 샤쓰도 적삼도 아무 것도 안 입은 맨몸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때부터 창남이는 ‘만년샤쓰’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런데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날은 양복 웃저고리에 조선 겹바지를 입고 버선도 안 신고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타난다. 사정을 들어 본즉 동네에 불이 났는데 살림살이가 다 타 버린 동네 사람들에게 옷을 나눠 주느라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이재복은 이 인물의 비현실성을 들며 영웅주의와 눈물주의를 비판하고, 원종찬은 문학사적 평가와 아울러 살아 있는 캐릭터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만년샤쓰』본문
사실 중학교 1학년짜리가 자신의 핍박한 삶에 그토록 의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기계적인 아이로 떨어져” 버렸다고(이재복, 『우리 동화 바로 읽기』) 읽기는 어렵다. 그것은 원종찬의 지적대로 일정 정도 “성격 창조”(원종찬,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종종 우리는 작중화자 내지 작가가 그 인물이 착하다고 규정해 놓지만 정작 어떤 면에서 어떻게 착한지에 대해서는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본다.

이와는 달리 『만년샤쓰』의 작중화자는 인물의 성격을 미리 규정하고 들어가지 않고, 묘사로써 독자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창남이의 쾌활한 성격을 드러내는 데 해당한다. “이 없는 동물이 무엇인지 아는가?”라는 선생의 질문에 창남은 기운 좋게 손을 들어 “이 없는 동물은 늙은 영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흰소리가 전혀 우습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웃음이야말로 시대적 사회적 제약 아래 놓이는 것이니 만큼 크게 탓할 생각은 없다.

『만년샤쓰』본문
이재복은 방정환에게서 영웅주의와 눈물주의를 문제 삼으면서도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높이 산다. 그런데도 『만년샤쓰』의 이야기 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사뭇 의아하다. 창남의 성격 묘사는 우선 모든 것을 웃음으로 돌릴 줄 아는 의연함과 태평함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과묵한 성격이 이야기되는데, 이 때는 작중 화자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서술로 처리한다. 화자가 독자의 판단을 선취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노력하는 성격을 이야기할 때는 다시 철봉 연습이라는 사건을 통해 묘사한다.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체육 시간의 맨몸 사건을 통해 창남의 가정 형편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면서 다시 한번 창남의 의연함과 태평함을 강조한다. 이를 작가는 체육 선생의 입을 통해 창남의 ‘의기’와 ‘용기’로 해석해 준다. 작중 화자가 개입하지 않고 대사의 형태로 제 3자를 끌어들인 것은 화자 자신의 판단이 객관성을 갖는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장치로 읽힌다. 한 마디로 화자가 독자 또는 청자를 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점차 창남의 성격을 각인시켜 나가는 것이다.

『만년샤쓰』본문
흥미로운 것은 창남이 만년샤쓰라는 별명을 얻은 다음에 벌어지는 장면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자초지종을 밝히는 대화법이다. “너는 양복바지를 어찌했니?” “없어서 못 입고 왔습니다.” [……] “어째서?” [……] “…… 저희 집 동리에 큰 불이 나서 저희 집도 반이나 넘어 탔어요. 그래서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며 창남은 어머니하고 단 두 식구가 살며, 집은 반밖에 안 타, 먹고 잘 것이 있는 터라 당장 입을 것만 남기고 여벌 옷들을 어머니의 제안에 따라 떨고 있는 동리 사람들에게 나눠 줬는데, 하도 딱한 노인이 있어 입고 있었던 양복 바지를 벗어 주었음을 알린다. 그에 대해 “그래, 너는 네가 입을 샤쓰까지 버선까지 다 벗어 주었단 말이냐?”는 질문이 이어지고 버선과 샤쓰까지도 못 입게 된 사연이 펼쳐진다. 당대의 신파극이 그랬으리라 싶을 정도로 한없이 최루를 자극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희, 저희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눈이 멀으셔서 보지를 못하고 사신답니다.”라는 대답에서 절정을 이룬다.

참으로 기구한 삶이다. 듣는 이들은 너나할것없이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토록 어렵고 신산스런 삶을 쾌활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용기와 그 와중에도 남까지 생각할 줄 아는 사랑의 정신. 방정환이 그린 만년샤쓰 창남이의 모습이다. 이 인물에 공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눈물주의니 영웅주의를 비판할 수도 있고, 자신보다 훨씬 어려운 형편에서 꿋꿋이 이겨 나가는 모습을 소박하게 귀감으로 삼을 수도 있다. 1920년대 곤핍한 식민지 치하에 살지 않는 현재 독자로서는 전자의 태도를 취하기가 쉬우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만년샤쓰’라니, 결핍을 승화시키는 기막힌 유머가 아닌가. 유머에서 “이념과의 대조를 통해 유한성을 무(無)로 만드는 전도된 숭고”를 본 독일의 미학자이자 작가인 장 파울이 떠오른다.

『만년샤쓰』본문
캐릭터 창조에 성공적이라고 본 원종찬도 이 대목에서 “다소 통속적인 교훈성”을 짚는다(원종찬, 「‘방정환’과 방정환」 『문학과 교육』2001년 여름). 그러나 다시 한번 읽어 보자. 문답의 과정을 보면 앞에 간단히 소개한 대로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듯이 유희적이다. 또한 화자는 서사적 거리를 취하며 창남과 듣는 이들의 반응을 기술하는 데 머물지만, 정작 창남은 독자의 반응을 극대화시킬 줄 아는 이야기꾼으로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마치 창남이 대신에 작가가 들어선 듯하다. 게다가 그 진술은 아무리 작중 청자나 독자들이 믿을 수 있는 정황에서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당사자 창남의 입을 통해 전달되고 있을 뿐이다.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쁜 짓인 줄은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교묘하지 않은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그러나 제 한 몸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돌볼 줄 아는 아이를 보여 주기 위해 아아,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직접 말할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만 같다. 말하자면 신파에 가까운 통속성은 듣는 이의 신명을 휘어잡을 수 있는 능숙한 이야기꾼이 이용한 유희적인 장치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창남은 한 마디로 작가 방정환이 소망하던 그 시대 아이의 모습이다. 소망의 아이는 당연히 현실의 아이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때로는 속옷도 입지 못하고 겨울을 나고 신발도 살 수 없을 정도의 절대적 빈곤 속에서 산다. 그곳은 무지개 나라가 아니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그렇다.


‘만년샤쓰’가 그려진 동화책들
김경연/서울대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와 경원대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여성신문사의 기획실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풀빛 출판사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 외국 아동 문학을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생생하고 감각 있는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미니 이야기’ 시리즈와 ‘프란츠 이야기’시리즈를 비롯하여 『그림 동화』『나무 위의 아이들』『왕도둑 호첸플로츠』『바람이 멈출 때』『달려라 루디』『행복한 청소부』『욘 할아버지』 들의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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