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1월 통권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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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책 이야기]
행복한 추억이 쌓인 책꽂이

한숙향 | 2003년 01월

4년 전의 어느 늦가을 주말, 언제나 그랬듯이 서울역 근처 서점에서 기차 출발시간만을 기다리며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만나러 가는 주말은 왜 그리도 길고, 그 날의 모든 시계들은 왜 그리도 굼벵이가 되어 제 속을 태우던지……. 또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왜 그리도 눈물이 마르지 않던지…….

『할머니의 수프』본문
막 돌이 지난 아이를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직장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 시절에는 오직 주말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주말바라기(?) 엄마였습니다. 그 날도 그렇게 5분이 멀다 하고 시계를 바라보며 기차 시간을 기다리던 중, 문득 낯익은 시인의 시집이 눈에 들어와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헉∼!’하며 가슴과 머리에 꽂혀진 그 시는, 지금까지 앞만 보며 달리던 삭막한 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로, 류시화 님의 잠언 시집에 실린 ‘성장한 아들에게’라는 시였습니다.

“종일 바쁜 엄마의 손은 아이와 함께 작은 놀이를 함께할 만큼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이가 그림책을 가져오면 아이의 곁에 있어 주고픈 엄마의 마음은 그저 조금 있다가 하자라는 말만 남긴 채 일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빠른 세월에 아이는 성장하여 자신의 비밀을 쌓아 가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그림책들도, 함께 할 놀이도, 잘 자라는 엄마의 입맞춤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늘 바빴던 엄마의 두 손은 할 일이 없게 되었고, 긴 하루에 보낼 만한 일도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회한(悔恨)합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네가 함께 놀아 달라던 그 작은 놀이들을 할 수만 있다면…….”

『할머니의 수프』표지
그토록 아이 옆에서 책을 읽어 주고 싶었던 제 마음은 이제, 아이 방 가득 채워진 책만큼이나 행복에 싸여 있습니다. 그 동안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녔던 연극이며, 뮤지컬, 극장, 전시관 …….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닌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올해 여섯 살 된 딸아이와 일 주일이 멀다 하고 찾았던 아지트는 바로 종로 서점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부도를 맞아 저희 모녀의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간 주범이 되고 말았지만, 그 곳에서 아이와 함께했던 따뜻하고 행복했던 추억은 저희 집 책꽂이 곳곳에 고스란히 쌓여 있습니다.

그 곳에서 구입한 책들 가운데, 아이가 너무나 좋아해서 작년 이맘 때쯤부터 겨우내 읽어 주었던 『할머니의 수프』를 소개할까 합니다. 아마도, 우리 아이 마음 깊은 곳에 할머니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과 표지의 그림만 보아도 푸근함이 물씬 풍깁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입니다. 지붕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창을 통해 보이는 할머니의 수프 끓이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꼬옥 껴안고 싶을 만큼 따뜻해 보입니다. 이제, 솔솔 냄새를 풍기던 수프는 완성되고, 할머니가 드시고자 그릇에 덜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똑! 똑! 똑!

『할머니의 수프』본문
의아해 하며 할머니는 문을 열어 봅니다. 향긋한 수프 속에 담긴 홍당무 냄새를 맡고 찾아온 작은 토끼였습니다. 할머니는 따뜻한 미소로 맞이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조그만 냄비에서 덜어 토끼의 접시에 나눕니다. 그 때 또다시 들리는 문소리. 똑! 똑! 똑! (아이는 이 글자를 읽으며 무척 재미있어 했습니다.) 이번에는 야채 수프 속에 담긴 순무 냄새를 따라온 여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토끼가 뛰어나와 할머니와 딱 둘만 먹을 수 있는 수프밖에 없다며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접시를 하나 더 꺼내어 할머니와 토끼의 접시에서 수프를 덜어 여우의 접시에 담습니다.

똑! 똑! 똑! 또 문소리가 들립니다. 덩치 큰 곰이 하얀 눈을 털며 들어섭니다. 이제는 여우가 욕심을 부리며 문을 막아서지만, 할머니는 넉넉한 웃음으로 세 개의 접시에서 수프를 조금씩 덜어 곰의 접시를 마련합니다. 그 때 다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어쩌면, 여우와 토끼는 노크 소리에 가슴이 쿵쿵 내려앉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노크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람쥐와 새 등 숲 속의 작은 친구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과연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실까요? 아! 할머니는 마치 손님들이 찾아올 것에 대비한 듯 찬장에 있는 작은 접시를 몽땅 꺼내 옵니다. “할머니 수프는 신기한 수∼프.” 토끼와 여우와 곰이 합창합니다.

『가장 멋진 뽀뽀』표지
이제 집 밖에서 보는 네모난 창에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수프를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 하는 할머니와 손님들이 보입니다. 반짝반짝 노란 별들이 눈이 그친 하늘에 수를 놓고 있고, 숲 속 한쪽 끝에 보이는 작은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집니다.

추운 겨울에 만났던 이 책은, 어린 딸에게 할머니의 끝없는 사랑,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형제 없이 혼자 자라면서도 욕심을 내거나 고집을 부리지 않고 주위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아이를 보면서, 작은 동화책 한 권의 힘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저 또한 이렇게 사랑이 전해져 오는 책을 대할 때면 행복에 빠지곤 합니다.

아이의 귀가 쫑긋쫑긋 세워지고, 눈이 초롱초롱 빛날 수 있는 멋진 구연 동화 선생님으로 탈바꿈하기 위하여 목이 컬컬해질 때까지 연습하곤 하던 때에, 네 살 된 우리 아이가 자주 꺼내 보던 책은 『가장 멋진 뽀뽀』였습니다.

아기 곰이 책상 밑에 앉아 재미있게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하다 일어나는 순간 그만 책상에 부딪칩니다. “꽝∼!” 아이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집니다. 하지만 “아가야 엄마가 뽀뽀해 줄게. 그럼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면서 엄마 곰이 아이의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는 장면에서는 일그러진 표정이 펴지더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책 속의 이야기처럼 아이에게 반창고 붙여 가며 따라해 보았으면 좋았을 걸 싶습니다.

『가장 멋진 뽀뽀』본문
이렇게 아기 곰이 다칠 때마다, 엄마는 언제나 넉넉한 몸짓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가야, 엄마가 뽀뽀해 줄게. 그럼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며, 다친 부위에 반창고를 붙여 주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슬픈 얼굴을 보게 된 아기 곰은 엄마가 하던 그대로 엄마를 위로해 줍니다. “엄마, 내가 뽀뽀해 줄게요. 그럼 괜찮아질 거예요!”아기 곰은 엄마 배랑 코에다 뽀뽀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엄마의 온 몸에 뽀뽀를 하기 시작합니다. 뽀뽀, 뽀뽀, 뽀뽀, 또 뽀뽀……. 행복감에 무아지경이 된 엄마 곰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뽀뽀를 마친 아기 곰은 뭔가를 찾으러 나갑니다. “이거요! 뽀뽀한 다음에는 반창고를 붙여야지요!” 엄마 몸 여기저기에 더덕더덕 붙여 놓은 사랑의 반창고! 그 그림이 어찌나 재미있고 가슴을 뿌듯하게 하던지 아이와 저는 한참 동안 행복에 겨워 웃었답니다.
한숙향/1968년 생으로, 10년 정도 국방부에서 군인들 못지않은 씩씩한 군무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아이와 함께 알콩달콩 살고 있는, 평범하면서도 조금 눈에 띄는(?) 주부랍니다. 중국어과를 졸업한 이후 한동안 한자와는 담을 쌓았지만, 평소 생활 신조가 ‘열심히 노력하며 살자’인 만큼, 지금은 한자 능력 검정 시험 1급을 준비하면서 이웃 초등 학생에게 취미로 한자를 가르치고 있답니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많은 어린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쳐 주고 싶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