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1월 통권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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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내가 꼭 만들고 싶은 어린이책]
아이들은 어렵고 복잡한 책을 좋아한다

강응천 | 2003년 01월

올해 초등 학교 3학년인 예슬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시리즈이다. 예슬이뿐 아니라 그 또래 아이치고 이 책을 읽지 않은 아이를 보지 못했다. 『문명 속으로 뛰어든 그리스 신들』이라는 책을 쓰면서 그리스 신화를 공부했던 내게 이런 현상은 좀 뜻밖이었다. 그리스 신화는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신화라서 구조도 복잡하고 내용도 어렵다. 게다가 우리에게 낯선 그리스 이름이 수백, 수천이나 나오기 때문에 읽다 보면 무척 헷갈려서 맥락을 놓치기 쉽다. 또 어린이가 읽기에는 부적절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내용을 적당히 잘라 내고서는 그리스 신화 전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표지
아무리 만화 형식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그리스 신화를 어떻게 어린이가 열광하는 수준으로 빠져들게 만들 수 있었을까?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던 중 예슬이랑 이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아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 전부 몇 명이야?”
“한 300명 정도 될 걸.”
“그렇게 많아?”

아이는 놀라더니 그 자리에서 손을 꼽아 가면서 자기가 읽은 책에 나오는 신들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대지의 여신이자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가이아, 크로노스를 비롯한 티탄 열두 명, 올림포스의 열두 신……. 그렇게 세어 나가더니 마침내 손가락을 오므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300명이 맞는 것 같네!”

앉은자리에서 그 많은 신들의 수를 300명까지 센 것이다. 놀라서 아이가 읽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뒤적여 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신들의 계보를 외우기 딱 좋게 구성된 책이었다. 예슬이는 마치 게임에서 장애물을 하나하나 넘으면서 단계(stage)를 넘어가듯이 복잡한 신들의 계보와 이야기 구조를 머리 속에 집어 넣으면서 다음 장, 다음 권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그리스 신화 열풍이 분 까닭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이 책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용 그리스 신화라면 어른용 그리스 신화를 쉽고 단순하게 ‘축소’하는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내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그 인기의 전사(前史)는 아마도 무수히 등장하는 괴물들 각각의 이름과 그들의 관계를 외워야 하는 포켓몬스터, 디지몬 등 몬스터 시리즈였을 것이다.

『한국생활사박물관』표지
나는 어린이 책 전문가도 아니고, 자기 딸의 생각도 잘 모르고 있었을 만큼 어린이 교육에도 둔감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정말 어린이에게 좋은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예슬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도 만들고 싶은 어린이 책의 상(像)을 갖게 되었다.

웬만한 어른은 복잡하고 골치 아파서 읽을 엄두도 못 내는데 아이들은 호기심과 정복욕을 갖고 덤벼들어 읽는 책. 아주 어렵고 복잡한 책.

사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를 만들면서 뒤적이게 된 어린이용 역사 책들에 있다. 역사를 신문 형식으로 보여 준 『역사신문』을 본떠 어린이용으로 쉽게 만든 책, 어린이라면 이런 것은 알아야 한다면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며 설명한 책, 우리 역사를 그림과 함께 요점 정리하며 서술한 책 등등, 시중에는 많은 어린이용 역사 책이 나와 있다.
『한국생활사박물관』본문
그런데 과문(寡聞)한 탓일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어린이 책은 어린이 수준에 맞게 유치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만들어진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제목부터 아주 단순하고 ‘유치한’ 것이 많고, 책에 담긴 내용도 기본적인 사실들을 재미있는 말과 단순한 그림으로 포장해서 맛만 보여 주거나 변죽만 울리고 넘어가기 일쑤이다. 어린이가 가져야 할 지식의 한계를 감안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정말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고민한 결과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눈높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어른들은 흔히 어린이와 눈높이를 맞추려면 항상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키를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때때로 어린이가 어른 머리 꼭대기에서 놀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어린이의 눈을 자기 눈에 맞추려고 끌어내렸다가는 어린이의 기만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린이와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어린이가 어른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는 어른과 ‘다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린이는 종종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사고하기도 하고 어려운 것도 좋아한다. 단편적인 상식의 연속이나 단순한 지식의 나열은 지식에 대한 정복욕으로 불타오르는 어린이의 관심을 끌 수 없다. 어린이가 게임의 규칙을 숙지하고 그 복잡한 단계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놀랍기 짝이 없다. 적절한 구조와 질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어린이는 어떤 복잡한 정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복잡함이야말로 어린이의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요소이다.

『역사신문』표지
게임과 그리스 신화 같은 이야기를 복잡한 구조 속에서 흥미롭게 구성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나 과학, 예술 같은 지식·정보를 어린이의 호기심과 정열에 걸맞게 꾸려서 복잡하게, 즉 ‘시시하지 않게’ 보여 주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에게 “얘야, 이게 꼭 알아야 하는 좋은 내용이니까 어서 와서 보거라.”라고 말하는 듯한 계몽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소수의 ‘영재’들을 빼면 어린이는 자기가 봐서 재미있지 않은 한, 어른이 유익하다고 권하는 것은 오히려 더 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물론 정보 책, 즉 논픽션 책은 억지로 권하지 않아도 어린이가 흥미를 느끼고 덤벼들어 보도록,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얻도록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흥미롭고 복잡한 구성을 만들어 내는 기획 편집자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의 유기적 팀워크가 절대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팀워크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잘 알고 있는 것은, 어린이는 쉽고 단순한 책이 아니라 어렵고 복잡한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강응천/사계절 출판사의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편집 주간을 맡고 있습니다. 어린이 책의 ABC도 모르다가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를 만들면서, 이 책이 출판가에서 어린이 책으로 분류되기도 하면서 어린이 책 편집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고 합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지식욕에 불타는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좋은 정보책을 만드는 소망을 갖고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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