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1월 통권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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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다른 나라 그림책]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레오 리오니

서남희 | 2003년 01월

레오 리오니
한동안 도서관에서 화집만 펴놓고 앉아 넋 놓고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붓 터치 하나하나에 빨려들어갈 것 같았죠. 그런데 십수 년이 지나 시카고의 미술관에서 미술사에 나오는 수많은 그림을 진품으로 보는데, 맙소사, 감동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싶어 꽉 쥔 제 손에서는 공기만 새 나가더라고요. 마네, 모네, 드가……. 미술책에 나오는 그 그림들은 ‘그냥 그림’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지요. 화집으로 보더라도 감수성 예민한 때에 봐야 그림을 통째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무뎌진 감수성으로는 어떤 위대한 진품을 보더라도 그저 그런 이발소 그림처럼 느낄 뿐이라는 것을요.

신경이 가녀린 나이에 늘 샤갈의 그림을 보고 자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 커터인 아버지와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소년, 레오 리오니. 건축가인 삼촌은 조카에게 제도 용구를 선물하고, 현대 미술 수집가로 일하던 삼촌들은 벽에 샤갈의 그림을 걸어 주었지요. 신비로운 푸른색, 자유 분방한 상상으로 가득 찬 그 그림들은 이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다른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때 레오는 집 근처의 박물관에 가서 내내 드로잉 연습을 하곤 했다니 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네요. 후에 그는 렘브란트, 반 고흐, 몬드리안 그리고 건축과 음악이 자기에게 ‘one big mood’였다고 고백합니다.

『Little Blue and Little Yellow』표지
젊음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은 시절. 그 때 그는 공부라는 배를 타 버립니다. 부모가 권해서인지 열 가지 재주를 가져서인지는 몰라도 그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다 건져 올린 것은 경제학 박사라는 학위. 그만큼 공부했으니 유럽 어느 고풍스런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되어 실물 경제와 무관하게(!) 살아도 그만이었을 텐데, 배에서 내려 발 디딘 땅은 그림과 건축의 세계. 그는 밀라노에서 건축과 관련된 글을 발표하면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활동하기 시작하고 미국으로 와서 광고 회사와 유명한 Fortune 지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게 됩니다.

저는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긴 레오 리오니가 할아버지가 되어 세 살과 다섯 살이었던 손자 손녀들과 맨해튼에서 코넷티컷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가,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꼬맹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Life 지에서 노란색과 파란색 종이만 뜯어 내서는 그걸 이리저리 배열해 보며 『Little Blue and Little Yellow』의 이야기를 지어내 ‘우연히’ 그림책의 세계와 인연을 맺게 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레오가 어렸을 때, 늘 보았던 샤갈의 그림,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직접 따라 그려 볼 수도 있었던 암스테르담의 박물관, 아트 디렉터로 일하면서 만난 많은 사진, 그림, 건축 작품 등등이 그림책 작가로서의 그의 노년에 풍부한 정서적, 실제적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세월은 그저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세월의 강에서 만나는 인연들은 참으로 귀한 것.

『Swimmy』표지
이 ‘예정된’ 작은 사건 하나는 콜라주 기법으로 만들어진 『Little Blue and Little Yellow』 (1959)라는 책으로 나오게 됩니다. 파란색 종이와 노란색 종이가 서로 겹쳐져 녹색 종이가 될 때까지 재미있게 놀지만, 결국은 헤어지는 이야기 전개로 인해, 이 책은 우정과 동질성에 관한 책이라는 평도 받고, 인종 차별에 대한 교훈이 깔려 있다는 평도 받게 됩니다. 교훈이라……. 레오 리오니의 책들을 펴 본 분은 아시겠지만, 그의 책 대부분에는 이른바 ‘교훈’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작은 물고기들이 힘을 합쳐 큰 물고기에 대항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담은 『Swimmy』라든가,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열심히 양식을 모으는 다른 쥐들과 달리 정신적인 양식을 모으는, 즉 물질만 추구하는 사회에서 예술가의 중요성을 알려 주는 『Frederick』, 새앙쥐와 태엽쥐의 우정을 담은 『Alexander and the Wind-up Mouse』, 새의 먹이가 될 뻔하지만 재치로 극복하는 조그만 자벌레 이야기인 『Inch by Inch』, 남과 달리 날개가 없어 소외되다가 황금날개가 생기자 도리어 그 때문에 더 소외가 되었지만, 필요한 사람들에게 황금 깃털을 하나씩 나누어 줌으로써 다른 새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하지만 이미 바깥 세상에서 배운 바가 있으므로 속으로는 다른) 『Tico and the Golden Wings』, 친구인 올챙이에게 다리가 나고, 펄쩍 뛰어오르고 하는 모습이 부러워 자기도 그걸 꿈꾸어 보지만, 마침내 ‘나는 나’라는 개성을 찾고 즐기게 되는 물고기 이야기인 『Fish is Fish』 등, 책 한 권 한 권마다에 교훈이 담겨 있어 어떤 사람들은 그림은 좋지만 내용이 너무 교훈적이라며 달가워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내용도 좋고 그림도 좋다며 텍스트와 그림 둘 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Alexander and the Wind-up Mouse』표지
『Tico and the Golden Wings』표지
이밖에도 무지개 연못에 살고 있는 욕심꾸러기 개구리 세 마리가 일으키는 사건을 통해 협동과 나눔을 이야기하는 『It’s Mine!』, 세상에서 제일 큰 집을 원하는 어린 달팽이에게 현명한 노인 달팽이가 들려 주는 이야기인 『The Biggest House in the World』(음……. 이야말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내용이구먼요), 독특한 악어 코르넬리우스에게서 독특한 개성의 즐거움을 알게 되는 『Cornelius』, 어느 날 미술관에 갔다가 자기가 화가가 될 운명임을 깨닫는 쥐의 이야기인 『Mattew’s Dream』, 나무에 찾아온 벌레가 글자에서 단어, 단어에서 문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쳐 주는 『The Alphabet Tree』, 달걀이라고 생각한 알에서 태어난 아기 악어에 대한 개구리들의 고정 관념을 다룬 『An Extraordinary Egg』 등에서 작가는 전체적으로 같은 기조-분명한 메시지와 잔잔한 그림-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Fish is Fish』표지
『It’s Mine!』표지
이 중에서 제 마음에 쏙 드는 책, 『Frederick』에 대해 들려드리지요. 소들이 풀을 뜯고, 말들이 뛰어다니는 초원의 한편에 낡은 돌벽이 있습니다. 그 돌벽에는 들쥐 다섯 마리가 살고 있지요. 네 마리는 모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날마다 열심히 일을 하며 다가올 겨울을 위해 옥수수 알갱이와 밀과 짚을 모으는 데 여념이 없건만, 프레드릭은 늘 눈을 반쯤 감고 공상에 빠져 있지요. 다른 쥐들이 “넌 왜 일을 하지 않니?”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일하고 있는 거야. 춥고 어두운 겨울을 대비해서 햇살을 모으고 있어. 다가올 겨울은 우울한 회색일 테니 난 색깔들을 모으고 있어. 겨울날은 길 테니 우린 말할 거리도 떨어지게 될 거야. 그래서 난 말을 모으고 있어.”

『Frederick』표지
우리가 ‘개미와 베짱이’에서 익히 알던 베짱이가 이 책에서는 온순한 듯하지만 자기 설명을 잘하는 들쥐 프레드릭으로 바뀌어 있지요. 프레드릭이 말한 대로 겨울은 닥치고, 얼마 안 있어 음식도, 얘깃거리도 떨어지고 맙니다. 이젠 춥기만 하고 어느 누구도 재잘거릴 기분이 아닌데, 프레드릭은 돌 위에 올라가서 말하지요. (음 ……. 무대 체질이구만.) “눈을 감고 노란색을 떠올려 봐. 내가 황금빛 햇살을 보내 줄게.” 쥐들은 그 따뜻한 노란 햇살을 느낍니다. 프레드릭은 비를 보내 주는 ‘Springmouse’, 꽃에 색을 칠하는 ‘Summer’, 호두와 밀을 갖고 오는 ‘Fallmouse’, 그리고 차가운 발로 오는 ‘Winter’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우린 이 네 계절을 다 갖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모두 박수를 치며 하는 말, “넌 시인이구나!” 그러자 프레드릭은 얼굴이 빨개져서 수줍어하며 말하죠. “나도 알아.”

영혼의 양식의 중요성을 레오는 이 조그만 시서(poet-mouse)를 통해 작은 소리로 말하지만, 그 작은 소리는 추운 겨울에 프레드릭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노란 햇살과 다채로운 색깔만큼 따스하게 마음 속으로 번져 나갑니다. 그의 그림 또한 소리치지 않지요. 여백이 많고 은은한 색으로 속삭이는 그림은 강렬한 색채만큼 마음을 확 잡아당기지는 않지만, 조용히 스며드는 맛이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도 그의 그림은 프레드릭처럼 수줍어하는 색입니다. 레오는 이 색을 드러내기 위해 대부분 콜라주 기법에 색연필, 크레용, 파스텔, 유화, 수채화, 잉크펜 할 것 없이 다양한 도구를 쓰고 신문 쪼가리와 벽지 찢어진 것, 채색 유리까지 골고루 사용하지요. 똑같이 콜라주를 많이 써도 수줍은 색이 주조라서, 화려한 느낌의 에릭 칼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입니다.

『Cornelius』표지
『Mattew’s Dream』표지
제가 제 홈페이지에 처음 작가 소개를 올릴 때 레오 리오니에 대해 썼었지요. 그때만 해도 그는 생존해 있었고, 어느 초등 학교 사이트에는 이렇게 현재형으로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레오 리오니는 두 군데서 살아요-이탈리아와 뉴욕에서. 그림 그리고 산책하는 걸 좋아하지요. 책상은 세 개가 있어요. …… 찰흙과 종이로 쥐를 만들 줄 알아요.”

그런데 몇 달 후, 1999년 10월 12일에 레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가 본 그 사이트에는 이렇게 과거형으로 글이 바뀌어 있더군요. “레오 리오니는 두 군데서 살았어요-이탈리아와 뉴욕에서. 그림 그리고 산책하는 걸 좋아했지요. 책상은 세 개가 있었어요. …… 찰흙과 종이로 쥐를 만들 줄 알았어요.”

그렇게 옛사람이 되었으나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기듯 그대는 죽어서 좋은 그림책들을 남겼으니 레오여, 그대의 영혼은 복될지어다.
서남희/ 개인 홈페이지 ‘The Cozy Corner(www.cozycorner.new21.net)’에 영어 그림책 이야기를 엮어 올리고 있습니다. 서강 대학교와 서강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CLA Extension에서 TESOL(영어 교수법)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서 10년 간 살면서 Haslett Adult Education의 영어 클래스에서 보조 교사, 이스트 랜싱에 있는 ‘한마음 한글 학교’의 외국인반 교사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미국 유치원 교육에서 활용하고 있는 ‘꼬마책(Mini-Books)’을 아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구성한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만들었답니다. 그림책, 소설책, 시를 좋아하고, 북한산, 도봉산, 지리산, 속리산, 소백산 등 바위산을 좋아하며, 무엇보다 잠 자는 것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스스로 뾰족뾰족하다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과 더불어 누구보다 둥글고 넓게 살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

Matthew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레오 리오니]
Matthew's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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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lius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레오 리오니]
Cornel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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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phabet tree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레오 리오니]
the alphabet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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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co and the Golden Wings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레오 리오니]
Tico and the Golden W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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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ggest House in the World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레오 리오니]
The Biggest House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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