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2월 통권 제3호
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열린 주제 열린 글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어린이 서평

[새로 나온 그림책 들여다보기]
새로 듣는 옛이야기, 내 여우 누이 ‘끝지’

최선숙 | 2003년 02월

눈 속에서 피눈물처럼 얼어붙은 백당나무 붉은 열매를 보았습니다. 이 그림책을 보자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따뜻한 열매가 서늘한 피울음을 우는 듯해서 오래 잊혀지지 않습니다. 옛이야기의 선과 악이 명쾌하게 우리를 몰입시켜 버린 그 뒤의 온갖 정한에 마음을 가져간 작가의 시선과 손길이 놀랍고 새롭습니다.

옛이야기는 옛이야기대로 재미있습니다. 여럿이 모인 으슥한 밤에 어른들을 졸라 듣던 무서운 이야기 한 자락은 얼마나 오싹하고 재미있던지요? 그 무섭던 얘기 속의 셋째 아들과 여우 누이가 이름을 얻었습니다. 한 개인으로 선 이 그림책 속의 주인공들, 순돌이와 끝지는 더 이상 옛이야기 속의 전형일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야속한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생한 인물로 우리 속에 스며들어 와 말을 겁니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원수이면서 또 정다운 오누이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오랜 시간 우리의 옛이야기를 형상화시키려는 욕심을 품어 왔던 작가가 이 책을 시작으로 그의 옛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먼저 옛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오누이로 자란 두 사람의 사랑과 비극적 운명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인간 심리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그림책, 그런 그림책을 익숙한 서사 구조의 옛이야기 속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쫓겨난 지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순돌이는 누이동생 끝지를 보자 멀리 달아나고 싶기도 하고, 얼른 달려가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꼬랑지 오빠를 보자 한걸음에 부엌으로 가 밥상을 차려 오는 이 고운 누이에게 식구들은 다 어디에 갔냐고 묻는 순돌이가 과연 원수를 죽일 구슬을 꺼낼 수 있을까요? “작은오빠 죽은 건 큰오빠가 알고, 큰오빠 죽은 건 아버지가 알고, 아버지 돌아가신 건 어머니가 알고, 어머니 돌아가신 건 나도 모르는걸.” 하고 말하는 끝지는 또 제어미를 죽인 사냥꾼 가족의 하나 남은 원수를 과연 죽일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그저 우리를 향해 열어 놓을 뿐입니다.

검은 밀랍으로, 단색으로 그려 간 그림이 두 인물의 갈등과 비극적 운명을 깊이 있게 전해 줍니다. 흰 바탕에 검은색만으로 동세를 살린 강렬한 선과 부드러운 음영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언뜻 미완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여백이 많은 그림이 미묘한 감정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군더더기 없이 시원한 글과 잘 맞아떨어져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런 한편 글과 함께 나아가는 그림의 장면 구성이 아주 동적인데다, 등장인물의 표현이 더없이 우리 얼굴이어서 이야기의 맥이 펄펄 살아 있습니다.
최선숙│오픈키드 컨텐츠 팀장.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공부했습니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하다 재미있는 어린이 책을 실컷 보려고 오픈키드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일곱 살 난 딸아이에게서 그림책 독법을 배우기 바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