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5월 통권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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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내가 꼭 만들고 싶은 어린이책]
세상 모든 이야기를 책으로!

김순이 | 2003년 05월

출판사에서 월급을 받은 지 어언 18년째, 아직도 나는 어린이와 책이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 첫사랑을 할 때처럼 세상이 온통 그 중심으로 돈다. 그래서 내게 어린이 책은, 정지용의 시 제목처럼 ‘또 하나의 태양’이다. 어린이들의 손끝에서 닳고 닳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한없는 갈망으로 웃고 우는 내게, 때론 너무 눈부시지만 따뜻한 태양……. 그 태양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 뭘까 생각해 본다.

『빨간 머리 앤』본문에서
나는 가끔 아주아주 재미있는 어린이 책을 읽고 싶다. 사무실에서, 전철 안에서, 화장실에서, 버스 안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의 웃음보를 터뜨리는 그런 책을 읽고 싶다. 전래 동화 「진지 담배」처럼. 전철 안에서 그 이야기를 읽던 나는 와하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터지는 웃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참을수록 더 이상한 소리로 웃음이 새는 바람에, 망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그것도 3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이 빠지도록 웃어젖혔다. 아이고, 그 날 뻗친 망신살이란. 하지만 아침 출근길에 책 읽다가 껄떡껄떡 숨 넘어가게 웃는 아줌마 덕분에 사람들 역시 잠시라도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곤한 아침잠을 깨워 미움을 받기도 했겠지만. 이렇듯 나는 내가 만든 책을 보고 데굴데굴 굴러 가며 웃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데 어린이 책은 나를 너무 자주 울린다. 교정지 위에, 화장실 변기 위에, 전철 안 옆 사람에게 빌린 휴지 위에, 너무 자주 눈물을 떨구게 한다. 아, 읽을 때마다 나를 감동에 젖어 울게 만들던 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 그리고 서점 구석 자리에서 삼십 분이 넘도록 나를 울게 만든 슬픈 그림책 『할머니가 남긴 선물』(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서 본 책이라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 등등.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도, 그래서 내 단춧구멍만한 눈이 아예 붙어 버려도 난 나를 울리는 책이 정말 좋다. 진심으로 나도 어린이들을 울리고 싶다. 어린이들 마음을 감동으로 때려서, 울다가 웃게 하는,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다시 책을 들여다보게 하는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할머니가 남긴 선물』『그리운 메이 아줌마』표지

그리고 어린이 책은 곧잘 나를 기쁜 추억에 잠기게 한다. 내 어린 시절 가장 소중했던 책 『빨간 머리 앤』. 그 책이 서점 진열대 위에 다시 놓였을 때의 감동이라니! 그 책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애틋이 그리워했던 오랜 친구의 얼굴을 쓰다듬듯 가만가만 그 책을 어루만졌다. 어렸을 때처럼 지금도 너를 사랑해, 속삭이며.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거야, 맹세하며. 열두 살 때 빨간 머리 앤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앤처럼 조잘대고 뛰어놀고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빨간 머리 앤에게 곱슬머리 순이가’편지도 쓰고, 그림자 친구에게처럼 말을 걸며, 내게도 길버트처럼 멋진 남자 친구가 생기길 꿈꾸며, 그렇게 같이 놀았다. 앤은 이야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바로 나와 함께 살아 있는 나의 친구였으므로. 『빨간 머리 앤』은 내게 글 읽기의 기쁨을 알게 해 준, 말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 준, 이야기 속 주인공을 사랑하게 해 준 첫 번째 책이었다. ‘찬란하다’는 말뜻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앤은 내게 가슴 벅찬 기쁨이었고 희망이었고 위로였다. 그리고 마흔한 살이 되도록 열두 살의 어린 나를 잊지 않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아, 부디 나도 진정 『빨간 머리 앤』처럼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온통 기쁨과 환희로 흔들어 놓는 책을 만들고 싶다.

『빨간 머리 앤』표지와 본문

어린이 책은 가끔 나를 질투의 화신으로 만든다. 『봄날, 호랑 나비를 보았니?』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정말 질투심에 눈이 멀어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이야 많은 그림책이 나오지만, 그때도 이미 많은 책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난 번역 그림책 말고 창작 그림책을 그렇게 예쁘게 잘 만든 건 처음 보았다. 편집자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너무 부러웠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심으로 배도 고프지 않았다. 도대체 조은수가 누구야? 여자야, 남자야? 게다가 재미마주는 무슨 뜻이야? 질투심에 눈이 먼 나는, 지금은 그리운 그 이름들을 싸잡아 이유 없이 욕을 하며 책을 샀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그 책을 가슴에 품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나도 이런 책 만들고 싶어, 중얼거리며. 그럴 때면 우리 엄마한테서는 ‘오지랖 넓게 조선 팔도 떡 다 해 먹일 년’이라는 욕이 날아온다. 추운 겨울밤, 맨발의 아이가 거리를 헤매는 것을 볼 때, 옆집 아이의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을 때, 어디선가 전쟁이 터질 때, 저 아이들을 어떻게 하냐고, 저 아이들에게 책이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훌쩍이는 내게 퍼부어 대는 이 욕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그 욕을 들을 때면 불끈불끈 힘이 솟는다. 어렸을 때 나처럼 그 누군가도, 책으로 위로받고 사랑받고 꿈을 키울 것이기 때문에, 조선 팔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어린이들에게 다 영혼의 떡을 해 먹이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내 오지랖을 조선 팔도보다 더 넓고 깊게 하고 싶다.

『봄날, 호랑 나비를 보았니?』표지와 본문

나는 책을 한 권 만들 때마다 어린이를 사이에 두고 작가들과 연애를 하는 것 같다. 『물푸레 물푸레 물푸레』 『아빠하고 나하고』 『꼬꼬댁꼬꼬는 무서워!』를 비롯한 내 사랑스러운 책들을 만들 때마다 나는 얼마나 깊이 사랑에 빠졌던가! 나는 사랑이 가득 담긴 책을 만들고 싶다. 쓰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모두의 사랑이 가득 담긴 책을. 그리고 어쩌면 당장은 해묵은 먼지 구덩이 안에 빛도 못 보고 파묻힐지라도, 언젠가는 어린이들 스스로가 반드시 찾아내고야 마는 보물 같은 책들을 만들고 싶다.

『물푸레 물푸레 물푸레』 『아빠하고 나하고』 『꼬꼬댁꼬꼬는 무서워!』표지

가슴 뻐근해지도록 화사한 봄날, 쪽박에 밤 담아 놓듯 올망졸망 예쁜 내 소중한 책들을 세상에 마구마구 자랑하고프다. 내게는 너무나 예쁜 이 책들이 부디 세상에 나가 어린이들에게 사랑받으며 잘 살아가길, 부디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잊지 못할 감동으로 오래오래 살아 남기를!
김순이/마흔한 살인데, 아직도 이 다음에 뭐가 될지 정말 궁금하답니다.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죽을 때까지 발견하지 못할까 봐 걱정도 된답니다. 그런데 어쩌면, 어쩌면이 아니라 진짜로, 오랫동안 어린이 책을 만들어 왔으니까, 그것도 아주 행복해하면서 살았으니까, 이 다음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어린이 책을 만들 것 같답니다. 『만만치 않은 놈, 이대장』 『호랑이가 그랬어』 『나 예쁘지?』라는 책의 글을 썼습니다. 중학교 2학년짜리 아들에게 날마다 제발 철 좀 들라고 야단을 맞는답니다. 오늘도 애처럼 팔뚝에 스티커 문신을 두 개나 했다고 야단 맞으면서도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