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통권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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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창작 동화 들여다보기]
일기장 갈피에서 발견한 삶의 비밀

김지현 | 2003년 12월

할머니가 또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시끌시끌한 골목으로 뛰어나가려던 손녀는 털썩 주저앉습니다. “전쟁이 터지던 날, 우리는 네 아빠 돌잔치 준비로 분주했었어. …… 빽빽 울어대는 아이를 등에 업고, 열 살도 안된 계집애들을 양손에 끌고, 네 고모들 말이야.” 손녀는 할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낼 뿐입니다. “ …… 2년만에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온 네 할아버지를 부산 시장통에서 만났더랬지. 다리가 하나뿐인 네 할아버지를…….” 손녀는 조금씩 할머니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새 몇십 년 전의 왁자지껄한 시장 안에 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손녀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봅니다. 이 노인이 그 여자가 맞나, 화투짝을 들고 투덜거리는 게 일상인 이 늙은이가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가? 늙고 주름진 할머니의 겉모습 뒤에 혹독한 삶에 맞선 한 ‘여인’이 숨어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미키는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할머니의 삶과 마주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무난히 흘러가던 미키의 생활을 망쳐버린 고집 세고 괴팍한 늙은이 페이스 그린. 하지만 미키 역시 고집불통 할머니에게서 살아있는 소녀 페이스 그린을 발견합니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서 말이지요.

금주법이 행해졌던 1920년대. 소녀 페이스 그린은 밀주 제조를 하는 아버지와 동업자 앙리 르구외를 지켜보며 조마조마한 날들을 보냅니다. 밀주 수익을 둘러싼 살인 사건과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항상 신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실은 회사의 공금을 훔친 범죄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페이스 그린. 하지만 그녀는 파란 많은 십대를 보내며 좀더 성숙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비록 범죄자였지만 그녀에게는 진실했던 부모님과 앙리 아저씨, 그녀의 상처를 위로하고 모든 문제의 해답을 제시했던 몬태너의 대자연을 통해 그녀는 내면을 이해하는 눈과 세상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일기장은 페이스 그린의 성장 기록이자, 미키에게는 성장의 통로입니다. 일기장은 미키가 할머니를 알고, 이해하고, 좋아하게 만든 멋진 중개자였지요. 미키는 굴곡 많은 할머니의 삶을 간접 체험하며 소녀 페이스 그린의 성장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자신도 성장해갑니다. 할머니 역시 선뜻 내보이기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와 감정을 공유하게 된 손자가 있어 무거운 기억들이 한결 가벼워졌겠지요. 무엇보다 둘은 낯설고 부담스러운 증조 할머니와 증손자의 관계를 넘어 뭉클한 사랑이 오가는 가족이자 친구가 됩니다.

부모님의 밀주 사업을 몰래 지켜보는 소녀 페이스 그린과 그 기록인 일기장을 훔쳐보는 미키의 모습이 대칭을 이루며 재미와 긴장감을 만들어 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기장의 주무대가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과거는 미키와 우리로 하여금 할머니를 이해하게 하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미래 못지않게 우리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고, 그 상상을 즐기게 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과거든 미래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법이죠. 정부의 눈을 피해 술을 만들고, 몬태너의 나무숲에서 늑대를 만나고, 코가 잘려 나간 사나이와 함께 살고, 칠흑 같은 동굴 안에서 부모님의 시신을 발견하고……. TV를 보거나 친구들과 롤러 블레이드 타는 것을 낙으로 삼고, 때로는 동네 깡패에게 얻어맞기도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는 미키에게 할머니의 인생은 그 자체로 소설이 되고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 시간은 이상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 할머니 부모님의 행동은 할머니에게는 부끄러운 일일 거예요. 하지만 저한테는 이미 옛날얘기 속의 한 토막인걸요!” 미키의 말처럼 우리도 시간이 지닌 놀라운 힘 덕분에 페이스 그린의 삶을 매력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겠죠. 그 안에 흐르는 따뜻한 시선과 유머, 진실의 힘도 보태져 말입니다.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헛기침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 때를 놓치지 마세요. 또 다른 페이스 그린을 통해 인생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

김지현│대학에서 문예 창작학을 전공하고 첫 직장인 오픈키드에서 즐겁게 어린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자신이 느꼈던 글이 가진 좋은 힘, 그 힘을 믿으며 자라는 아이들이 이 땅에 많아지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