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1월 통권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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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세상]
앙굴렘에서 만난 프랑스 만화

신수진 | 2004년 01월

다시 1월이다. 해마다 1월이면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앙굴렘엔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프랑스의 안시, 일본의 히로시마, 캐나다의 오타와와 더불어 4대 만화 페스티벌로 꼽히는 만화 축제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다른 세 곳이 필름과 애니메이션 상영 중심인 반면 앙굴렘은 책과 전시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은 세계에서 가장 큰 출판 만화의 전시장이 되었다. 2003년 1월, 나는 앙굴렘에 다녀왔다. 앙굴렘은 만화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부터 내게 꿈이 된 곳이었다. 벼르고 별렀던 여행지였기에 매일 밤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흥분됐고, 직접 가서 본 앙굴렘은 기대 이상이었다.

앙굴렘 만화학교 / 프랑스 국립만화영상센터 / 제30회 앙굴렘 만화 축제 포스터

앙굴렘은 도시 자체가 만화였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의 전시나 구경이 아닌, 어디를 가든 만화를 즐길 수 있는 도시였다. 만화가 도시와 사람들의 일상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기에 ‘만화를 본다’가 아니라 ‘만화를 즐긴다’는 표현이 맞았다. 거리 곳곳에 만화 장면을 담은 피켓이나 현수막을 내걸고 가게 담벼락에 만화 주인공들을 그린 것은 기본이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도, 하루 종일 기호에 맞는 전시를 찾아다니다 잠시 쉬어가게 된 가게에서도 만화를 접할 수 있다. 호텔에서는 무료로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시청 같은 관공서 건물에서도 만화를 빌려볼 수 있다. 성당과 교회들에서는 예배가 있는 시간에도 한쪽을 개방해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게 했는데, 놀랍게도 만화의 내용이 사제나 교회를 풍자한 것들이었다. 도시가 만화를 위해 모두 열려 있고, 사람들은 만화를 통해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2003년으로 앙굴렘 만화 축제는 30주년을 맞았다. 유럽 만화는 미국 만화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미국의 만화가 슈퍼맨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영웅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미키마우스처럼 현란한 움직임과 대사로 무장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책과 영화, 그리고 팬시 상품을 만들어 전세계를 점령하는 동안 유럽 만화는 실험적이고 독특한 여러 장르의 만화를 개척했고, 그런 묵묵함이 예술 만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유럽 만화의 중심에 프랑스가 있다.

국제 만화 축제가 열리는 앙굴렘 거리

만화에 대한 프랑스 인의 사랑은 만화 축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프랑스 인의 자랑거리이며 앙굴렘 축제의 중심 축이 되는 것은 국립만화영상센터(Centre National de la Bande Dessinee et de l’image(CNBDI))로, 이 곳에는 프랑스 만화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담긴 세계 최대의 만화 박물관이 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의 만화 축제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1년 내내 만화를 볼 수 있다. 1982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크 랑이 자신이 수집한 초기 만화와 원화 그리고 드로잉 등 개인 소장품을 앙굴렘 예술관에 기증함으로 만화 박물관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만화도 역사 자료나 유물처럼 박물관에 보관될 수 있다니 부러운 일이었고 내가 더 감탄한 것은 한 나라의 장관이 만화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럽 만화가 폐쇄적이라는 비판도 있었고, 만화는 대중 문화로서 현재와 공유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 만화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빠른 전개와 파격적인 내용을 선호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기호에 따라, ‘망가’라 불리는 일본 만화가 이미 그곳에도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만화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느낀다. 만화가 발전하는 것은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발전된 만화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그 자부심이 만화를 발전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짱뚱아 까치밥은 남겨 둬』표지
유럽의 아동 만화에는 우리 만화와 다른 점 몇 가지가 있다. 『꺼벙이』든 『짱뚱이』든 『맹꽁이 서당』이든 시대적 배경은 달라도 우리 만화는 현실을 다루지만 유럽 인들의 만화 속엔 자신들의 이야기가 별로 없다. 마법사, 악마, 천사, 괴물 같은 현실성이 없는 등장 인물과 이들이 벌이는 황당한 일들이 만화의 주된 소재가 된다. 학습 만화는 취약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까지일까 싶을 정도로 창작 만화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명작이나 옛이야기도 작가에 따라 재구성되어 훌륭한 창작물로 다시 태어난다.

프랑스 아동 만화는 그림책과 만화책의 중간쯤에 있다고 해야 할까? 칸을 분할하고 말풍선이나 생각구름으로 대사를 처리한 형식을 보아서나 엉뚱한 구성과 웃음을 주는 대사는 만화의 느낌을 주는 한편, 정교한 그림과 공들인 채색은 그림책의 느낌을 준다. 이런 예술 만화를 발전시켜 온 프랑스에서는, ‘카툰 체’나 ‘만화 체’라고 부르는 간결한 만화가 아니라 그림책처럼 공들여 그려 낸 어른들을 위한 만화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앙굴렘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앙굴렘과 인연있는 만화 두 편을 소개할까 한다. 『이상한 수호천사』(Un Drole D’ange Gardien) 와 『거인의 황금 머리카락』(Le Diable aux Trois Cheveux d’or)은 앙굴렘 만화 축제에서 어린이 만화 상을 받은 책이다. 악마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악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나쁜 짓을 하라고 사람들을 꾀는 사악한 존재겠지만 『이상한 수호천사』의 악마는 그렇지 않다.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 주고 외로운 아이들을 돌봐 준다. 물론 얼떨결에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어설픈 초보 악마 디아블로는 목욕탕에 가다 길을 잃어 인간 세상으로 나오게 되고 우연히 악당에게 잡힐 뻔한 남매를 구해 준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남매의 수호 천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상한 수호천사』표지와 본문

어수룩한 표정의 악마 디아블로와 주근깨 소녀의 모습을 한 천사가 사랑스럽고, 대사나 장면 곳곳에 웃음이 묻어나지만 『이상한 수호천사』는 이야기의 따뜻함에 더 빠져드는 책이다. 『이상한 수호천사』에는 천사는 선, 악마는 악이라는 흑백 구분이 없다. 디아블로의 본분은 분명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사랑의 힘은 지대하여 디아블로를 수호 천사로 변신시킨다. 악당을 혼내 주고 불 속에서 아이들을 구한 것도 사랑이 있었으니 가능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질 것이다. 『이상한 수호천사』는 누군가의 수호 천사가 되어 주고 싶고, 또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한다.

악마인 디아블로가 사랑의 힘 덕분에 수호 천사로 변했다면, 『거인의 황금 머리카락』의 주인공은 사랑을 지켜 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한다. 마을의 가장 가난한 집에서 행운의 양막을 쓰고 태어난 아기는 공주와 결혼할 운명을 가졌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가난뱅이에게 딸을 주기 싫어 아이를 빼앗아 강물에 던져 버리지만,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아나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왕의 허락을 받으려면 지옥에 사는 무시무시한 거인의 황금 머리카락 세 개를 가져와야 했고, 이로 인해 소년의 모험이 시작된다.

『거인의 황금 머리카락』표지와 본문

어딘지 귀에 익은 이야기일 것이다. 『거인의 황금 머리카락』은 그림 형제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것으로, 만화의 재미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만화는 캐릭터의 힘이 절반 이상이므로 개성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옥에 사는 거인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모습일까? 하지만 작가가 온갖 만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 낸 거인의 모습은 엉뚱하다. 거인의 황금 머리카락은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중요한 것인데, 괴물의 머리에는 풍성한 금발 대신 가시 모양의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솟아나 있다. 이를 잡아달라며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거인은 어린아이 같다. 게다가 지옥에 사는 거인이 도마뱀 무늬 셔츠를 입고 있다니! 그래서 괴물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를 때마다 무섭기는커녕 웃음이 터져나온다. 작가는 과장과 강조, 희화화의 방법으로 인물을 가장 ‘만화답게’ 만들었고, 이 만화다운 괴물이 아이들에게 공포 대신 웃음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렇게 과장된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을 따라 웃음을 찾아 내는 것은 그림 형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닌, 세실 쉬코의 만화 『거인의 황금 머리카락』만의 즐거움이다. 작가 세실 쉬코는 언제나 만화의 칸마다 장치를 하고 뭔가 숨겨 놓는 것을 좋아한다. 작가는 문이나 동굴 벽, 바위와 집, 심지어 괴물이 입은 잠옷 하나에도 표정을 담아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한 구석도 지나침이 없이 무언가를 그려 넣고 그 그림 속에 웃음을 숨겨 놓는데, 그것은 꼼꼼하게 책을 살펴 보는 독자만이 받을 수 있는 보너스다. 주인공이 지나는 길마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등장하는지, 『토끼와 거북』 『피노키오』 같은 다른 책 속의 주인공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 본다면 만화가 두 배는 더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 만화에 대해 먼저 얘기하고 싶었지만 앙굴렘 이야기와 프랑스 만화 두 편을 먼저 소개하게 되었다. 만화와 인연을 맺게 된 지 10년도 더 되고 그 동안 만화를 참 많이도 보았지만 아이들을 위한 만화를 소개하려니 쉽지 않다. 책이 많이 나와 있어야 할 이야기도 많을 텐데 아이들을 위한 만화는 그림책이나 동화처럼 많지 않다. ‘서점에 만화가 얼마나 많은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출판되는 단행본 만화의 대부분이 대본소 용이고 어린이 만화도 학습 만화가 많다. 그렇다고 학습 만화만 소개하기도 그렇고, 지금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 보았던 70∼80년대 만화만을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비교적 최근의 것, 그리고 구하기 쉬운 책들로 고르다보니 더 어렵다. 만화를 출간하는 출판사가 한정적이다보니 한 출판사의 책들을 소개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아쉽다. 그래서 다양하고 좋은 만화가 많이 나오길 바라는 소망이 더 커진다.
신수진 / 태국 어를 전공했지만 어린이 책 만드는 일을 더 좋아합니다. 어린이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일하면서 만화와 인연을 맺었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만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비디오 볼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수십 권의 만화 책을 쌓아 놓고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 몰래 숨어서 봅니다. 제대로 알면서 보자 싶어 지금은 대학원에서 만화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