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1월 통권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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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어린이-동화는 무엇을, 왜, 어떻게 말하는가]
공동묘지에도 출구는 있다

노경실 | 2004년 01월

* 연재를 시작하며, 나의 생각과 글쓰기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듯한 글귀를 만났다. 그래서 이것을 인용함으로 연재 인사를 대신한다.

『미래생활사전』표지
가족의 본질과 형태의 변화는 (현재 가족들이 감내하고 있는 스트레스와 함께)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의 진화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 자유방임적인 부모와 엄격한 부모라는 양육 방식의 전쟁은 고대부터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갈등으로, ‘긍정적인 부모역할(Affirmative Parenting)’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한편 기술, 경쟁, 풍요 속에서 성장한 세대와 새로운 긴장은 ‘재정적인 부모 역할(Financial Parenting)’과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신조어들은 세대간 논쟁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용어가 논쟁을 가속시키기도 한다. 이와 유사하게 오랜 기간 핵가족제도가 가족제도의 주류로 계승되어 왔지만, ‘조부모 가정(Skipped Generation Households)’도 새로이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구통계학상의 변화가 지속되면서 사회는 보다 다원적이고 다민족적으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부모 역할의 민족간 비교(Comparative Parenting)’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 비교 연구는 민족간의 자녀 양육 방식의 차이를 연구하는 동시에, 미국 내에서의 생활이라는 거대한 수평적 환경의 힘에 의해 각 민족의 전통적 문화 행위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지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늘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양쪽 모두는 서로 상대방을 비난한다. “그렇지만 넌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구나(부모님은 제 말을 안 듣고 계시잖아요)!”

우리는 언어 자체도 정확히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즉 세대간에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언어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삶의 복잡함과 불일치를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페이스 팝콘·애덤 한프트 지음, 을유문화사, 『미래생활사전』에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표지
‘가족’ 혹은, ‘일가’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면 저절로 나의 가슴을 뒤흔드는 사람이 둘 있다. 첫번째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는 조국과 고향과 가족을 떠나 낯선 프랑스에서 악귀처럼 따라 다니는 외로움과 배고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여인에 대한 사랑은 단 한 번도 그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채 오히려 그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고통만 퍼부었다. 그러다가 만난 여자가 창녀, 시엔이다. 시엔은 이미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흐는 그녀를 사랑했고, 초라한 자기의 보금자리로 데리고 왔으며, 나중에는 아기가 태어났다. 이렇게 세 사람은 한 가족이 되었다. 고흐의 지인들은 그들을 ‘성(聖)가족’이라며 조소 섞인 측은의 인사를 보냈다. 고흐는 그녀를 모델로 ‘슬픔’이라는 연필 스케치를 그렸고, 동생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긴 편지 중 몇 구절만 옮겨 본다.)

‘……나는 진심으로 시엔을 좋아하고, 그녀 역시 그렇다…… 이것은 나에게 찾아온 유일한 사랑이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 주는 힘이 아니겠니……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이거든.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해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하지만 시엔은 어느 날 훌쩍 떠나고, 고흐는 죽을 때까지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새로운 사랑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는 늘 가슴 한편에 예술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가족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두번째 사람은 평생 인민복을 입고 지낸 키 작지만 아름다운 거인 김용기 장로님이시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강원도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에 간 적이 있다. 그 때는 설립자인 김용기 장로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 분의 아들 중 한 분이 학교장이 되어 땅을 일구고, 사람을 길러 내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도 아스라하지만 눈이 부신 햇살과 등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 내리는 땀 줄기, 그리고 빨래판 두 개 크기 만한 나무 현판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나무 현판은 나처럼 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땀과 눈물과 때로는 피를 흘리는 수고와 고통이 없이는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이 이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 나무 현판에는 까만 붓글씨의 두 한자어가 ― 마치 칠팔십 인생을 산 노인의 이마주름처럼 ― 깊게 패여 있었다. 그것은 ‘일가(一家)’였다.

『이발소의 돼지』표지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어느새 나는 누구 앞에서 가족에 대해 뭐라 한 마디 거들어도 민망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만난 이가 에리히 케스트너이며, 그의 작품 「두 엄마와 한 아이」라는 글이다.(시공주니어에서 2000년에 출간된 『이발소의 돼지』에 수록되어 있다.) 아주 짧은 동화이지만 그 가슴 아릿한 감동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다. 나는 작년 가을, 어느 잡지에서도 이 책을 잠시나마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짧은 원고 매수 속에서 몇마디 어버버……하고 말았는데 이번에 『열린어린이』에 연재를 시작하며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다시 들춰 내 본다.

여덟 살짜리 마를레네.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형제도 다섯이나 된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웃과 너무도 사랑스러운 헝겊 인형, 플로피나와 오스발트가 있고, 인형 유모차도 있다. 그런데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다.’라는 것은 우리에게 ‘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과 다를 것이 뭐랴. 그런데 한 여자가 마를레네의 집으로 왔다. 그 여자로 인해 아버지도, 친척들도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파티까지 열었다. 그러나 마를레네는 혼자서 헝겊 인형 플로피나를 데리고 동네 공동 묘지에 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누군가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엄마가 된다는 것은, 내가 친구네 집에 가서 친구네 부모님의 딸이 되겠다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른들의 만나고 헤어짐에 대해 뭐라 따지고 들며, 찬성과 반대의 의사 표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린이는 그저 어른들의 계산과 숙덕임에 이리 놓여지고, 저리 밀리고 할 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를 귀찮아한다. 어른들은 저네들의 인생 게임을 하다가 말이 막히면 아이들을 앞세우고, 화가 나면 아이들을 밀어 내고, 기분이 좋아지면 숨이 막힐 정도로 아이들을 안아 버린다. 어른들의 즐거운 변화가 아이들에게는 정체 불명의 두려움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은 알 바 없는 듯하다.

고흐의 ‘슬픔’/「두 엄마와 한 아이」내지

지금 엄마 무덤 앞에 인형과 함께 앉아 있는 마를레네는 자기도 엄마처럼 죽은 것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때 새엄마가 다가온다. 아, 마를레네는 운이 좋은 아이일까. 왜냐하면 그녀는 마를레네에게 설명하고, 변명하기도 하며, 오히려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왜 그렇게 화가 났니? 엄마 없는 여섯 아이를 내가 조금 돌보고 싶어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니?”

“이건 믿어도 된단다. 내가 네 곁에 있는 게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거야……. 있잖니, 나도 한때는 너처럼 작은 여자 아이였어. 그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난 오늘의 너보다 더 불행했어.”

“넌 네가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를레네, 하지만 난 너보다 더 훨씬 혼자란다.”

에리히는 어른을 어린이에 대한 절대 시혜자나 구원자로 말하지 않는다. 지금 한 아이가 흘리고 있는 눈물은 바로 얼마 전, 또 다른 한 내가 흐느낀 울음과 같다고 말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의 외로운 어깨는 언젠가 기운 없이 걸어 가던 나의 쓸쓸했던 뒷모습임을 기억나게 한다. 아이의 손때 묻은 인형은 우리들이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낡았지만 애틋한 사랑의 흔적 한 조각임을 알려 준다.

어느 새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묘지 사이를 걸어 나온다. 집으로 가기 위해. 그제서야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바라보고, 묻고 대답한다. 아주 사소한 것을. 그렇다, 사랑은! 가족은! 남들이 관심조차 없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대답해 준다. 아이들도 그렇다. 아이들이 날마다 허황된 공상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낡은 헝겊 인형에 대해 눈길을 주며 이름을 물어 봐 주는 새엄마에게 이미 마를레네의 마음은 열려 있다. 공동 묘지에도 집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있고, 그 문은 언제나 열려 있듯이.
노경실 /『중앙일보』(동화)와 『한국일보』(소설)로 등단하였습니다. 출판 일을 하면서 열심히 글을 쓰고, 시시때때로 그림책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권의 장편 소설과 많은 동화책을 냈습니다. 도스토에프스키와 반 고흐와 체 게바라와 로알드 달 그리고 조카들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