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5월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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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옥의 그림 읽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충격이었다

한성옥 | 2004년 05월

이 책이 18년 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과, 당시 스기우라 한모 선생님의 나이가 55세였다는 것이 우선 놀랍다. 글도 그렇다. 물론 해 아래 새 것이란 없고 사람 사는 것이, 사람 마음이 다 거기가 거기라서 아이들 치닥거리하는 엄마 마음이나 아이들 마음도 다 비슷했을 거다. 그래서 귀찮은 일, 바라는 일, 원수갚는 일까지도 자기 대신 다 해결해 주는 호리병의 연기 거인을 한때는 모두 데리고 사는 터라, 그 존재가 여기선 ‘알’이구나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가겠는데(사실 깨지기 쉽고, 움직일 수도 없는 조그만 알이 해결사라니 ― 얼마나 사랑스런 동양적 발상인지, 조금 오버하자면 얼마나 차원 높은 경지인지), 마지막이 압권이다. 그 알이 알을 낳은 거다. 글쎄, 글 작가의 의도야 무엇이든 나에게는 그 결말이 얼마나 큰 희망을 주던지…… 그 알은 계속계속 알을 낳을 것이다.

자, 문자 언어를 따라 쭉 읽어 가보니, 아이들 눈 높이에서 시작한 사랑스런 발상에서부터 전개, 클라이맥스, 결말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상상력과 재치, 가득한 유머로 경쾌하게 풀어 간 솜씨가 명성에 걸맞게 걸출하다. 필자가 숨죽이며 읽게 된 것은 그림을 그린 스기우라 한모의 텍스트를 읽어 내는 힘, 또 그에 따른 탁월한 해석과 그의 독특한 조형 언어 세계 그리고 세련된 솜씨, 또한 그 나이에도 갖고 있는 순수함과 투명함이었다. 좀더 실감나는 도전을 받기 위해, 처음의 잔상을 힘겹게 털어 버리고, 텍스트만을 따로 분리하여 읽어 보았다. 텍스트를 여러 번 읽고 눈을 감으니 이런 저런 이미지 조합들이 어지러이 머리 속을 오가는데 ‘나라면 어찌 풀어 낼꼬?’ 하며 다시 펴든 이 책의 그림 한 장 한 장은, 내게는 ‘담벼락 아래서 발견한 알’이다.

작가의 자유로운 내면 세계 표현을 위해 스기무라 한모는 극히 독창적 좌표에서 출발한다. 그림 그리는 이들이 갖는 상식적 조형 의식의 중심 좌표를 `[0. 0]으로 표현한다면, 그의 세계는 [0. 0. 0] 아니, 어느 카테고리에도 없는 좌표이다. 작가의 그래픽 디자이너적 배경이 한 몫 한 듯싶다. 작가의 조형 의식 맥락을 집어 낼 만한 의도적 일관성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이 작가의 그림은 즐기기는 좋은데 읽어 내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무엇을 그릴까?’에서부터 작가는 예리한 감각의 날을 세운다. 예사롭게 지나치는 것이 없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텍스트에서 퍼지는 울림을 듣고자 면벽하는 듯한 진지한 몸부림을 난 그의 표현에서 본다. 그 정도로 집중의 화살을 꽂는 그의 순수함이 나를 긴장시킨다.

표지부터 보자. 우선, ‘무엇을 그렸는가.’ 마스크를 쓴 큰 알과, 청진기를 대고 있는 쬐끄만 아이가 있다. 글을 아무리 읽어 봐도 글 작가는 그런 크기가 나올 만한 암시를 준 적이 없다. 이는 스기무라 한모의 해석이다. 다음은 ‘어떻게 그렸는가.’ 배경과 이미지가 동일한 색조다.(이건 사실적 묘사에서 사용하는 모노 톤과는 전혀 다른 맥락인 것이다.) 다만 그 거리만 유색 선으로 처리했다. 배경도 알도, 심지어 마스크도 동일한 흰색이다.(이것이 얼마나 예사롭지 않은 선택인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동감하리라!) 알은 열이 있는지 붉은 색 라인이고, 마스크는 푸른 색조다. 아이가 청진기를 댄 부위는 유난히 붉다. 알은 피곤하면 무지개 빛을 내고, 감기 걸리면 푸른 빛을 내는데, 그려진 알을 보니 감기 걸린 게 분명하다.

펼침 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엄마의 팔뚝에서 우린 “병원 다녀와!” 소리치는 엄마의 고함 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소리와 함께, 그 피하고 싶은 마음까지를 한 팔뚝에 담았을까! 손등에 그려진 엄마 얼굴까지 안 가도, 이미 그 고함 소리에 간이 오그라붙고, 아이의 조그만 손도 겁에 질렸다. 병원 가는 길도 그렇다. 평면 구성에 점선이란 기호를 독창적으로 접목시킨 것도, 또 헝크러진 점선에 놀리는 듯한 감성을 담은 것도 다 보석이다. (단, 무서운 개 앞을 지날 때, 띄엄띄엄 간격 있는 점선이면 어땠을까. 또 그림 작가의 해석에 따른, 좋아하는 여자 친구 후미네 집 앞에서도 점선이 하트를 그렸으면 어땠을까.) 담벼락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담쟁이가 덮여 있는 듯한데 대담하게 펼침 면 전체가 다 희다. 거기에 잎파리 색 선으로 암시만 있을 뿐이며, 대각선으로 끝과 끝에 배치된 아이의 머리(그것도 과감하게 뒤통수를 싹뚝 잘라 버렸다)와 알, 이 때 처음으로 사물의 존재를 존재로 확인시키는 그림자 처리가 등장한다. 그것도 보라색 그림자. 나의 호기심은 여기서부터 거칠게 호흡한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모든 페이지마다 구석구석 놓여 있는 보물을 찾아 내느라 나도 기진맥진이다. 이렇듯, 이 책은 보물 덩어리다.

다시 한 번 짚고 싶은 것은, 이 책이 18년 전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그림책 시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조형 언어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턱 하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획일적 미술 입시 제도는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라면서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일본 아이들은 이런 그림책도 보며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국 FIT와 SVA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였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 작가로 활동합니다. 대표적인 국내 작품으로 『나의 사직동』 『우렁 각시』 『시인과 여우』 『수염 할아버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