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5월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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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고전 들여다보기]
고전을 통한 세상살이 읽기의 즐거움

최수연 | 2004년 05월

옛날에 비바람도 막지 못할 오두막에서 날이면 날마다 글만 읽는 허생이란 사람이 살았습니다. 아내가 삯바느질을 하며 남의 집에서 먹을 걸 얻어 와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지요. 아내는 허생에게 무슨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올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갖바치 일은 배우지 않아서 못 한다, 장사는 밑천이 없어서 못 한다며 ‘어떻게 하겠소’란 한심한 말만 내뱉습니다.“엄청나게 많은 돈을 바다에 던져 버린 사람”의 사연을 들려주겠다며 시작된 이야기는 도입부에서 이렇게 가난에 시달리는 부부의 답답한 다툼을 보여 줍니다. 이내 허생은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 서울에서 가장 부자라는 ‘변 부자’를 찾아가 대뜸 돈 만 냥을 꾸어 달라고 합니다. 집도 사고, 땅도 사고, 산도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을 꾸어 달라는 허생이나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꼬락서니로 찾아온 사람에게 선뜻 돈을 내어 주는 변 부자나 예사로운 인물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스스로 입에 풀칠할 음식도 벌지 않았던 허생이 돈 만 냥을 손에 넣자마자 마구 물건을 사 들이며 온 나라를 한바탕씩 흔들어 놓기 시작합니다. 한 가지 물건만 죄다 사 들였다가 열 배로 값이 오르면 되팔며 허생은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그 돈으로 섬을 사 들이고 도적떼를 그 곳에 정착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허생은 “글은 모든 불행의 뿌리”이며 “돈은 많으면 약이 아니라 독”이라고 말합니다. 섬으로 데려간 사람들 중에서 글을 아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오십만 냥이나 되는 돈을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

「허생전」의 원 저자인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우리 나라가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좀더 잘 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귀국한 뒤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선진 문화를 소개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했습니다. 「허생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선량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이 먹고 살 길을 마련하지 못하고 결국 도적떼가 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허생처럼 한 가지 물건을 모조리 사 들이면 온 나라가 뒤흔들릴 정도로 경제 또한 불안정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점들이지요. 입으로는 나라 걱정을 말하면서도 허생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대장군 이완을 통해 당시 정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허생전」과 함께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춘풍전」에도 조선 시대의 세상 풍경이 드러납니다. 밤낮 없이 먹고 노니며 재산을 다 털어먹은 이춘풍. 아내가 사시사철 일해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옛날 말이나 하며 살게 되니까 춘풍은 또 호강이 뻗쳐서 밖으로 돌아다닐 궁리를 합니다. “어질고 착한 아내 머리채를 비단 감듯, 연줄 감듯, 뱃사공이 닻줄 감듯 휘휘칭칭 감아 쥐고 이리 치고 저리 치며” 행패를 부리고 평양까지 가서 기생과 바람이 나 세월을 보냅니다. 그 뒤 춘풍의 아내가 신세 한탄을 하며 엎드려 울고만 있었다면 지은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이춘풍전」은 그저 바람난 이춘풍의 행태를 열거한 것에 그쳤을 것이며 이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지도 않았겠지요. 춘풍의 아내는 적극적으로 남편의 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발벗고 나섭니다. 춘풍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에 기가 막히지만 죽일 수도 없으니 제대로 살게 하려고 남장까지 하고 나선 것입니다.

「허생전」에는 폐쇄적이고 뒤떨어진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비판 정신과 모든 사람들이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향한 꿈이 담겨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꿈이지요. 「이춘풍전」은 타락한 양반 이춘풍과 남편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의욕적으로 나서는 김씨 부인의 말과 행동을 생생하고 재미있는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 쉽고 친근하게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으레 어렵고 지루하다고 여기게 하는 고전 읽기에 재미를 더합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림 작가의 밝고 익살스러운 그림이 상상력에 활기를 불어 넣습니다. 누군가의 잘못된 점을 눈 감고 지나칠 수 없을 때 당당한 김씨 부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절로 통쾌해지겠지요. 이렇듯 옛날 세상 이야기에서 현재를 읽을 수 있으니 고전 읽기야말로 진정한 세상살이 공부가 아닐지요.

대학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좋은 책을 읽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을 갖게 되는 데 작은 도움이나마 주고 싶은 마음으로 『열린어린이』 편집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