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5월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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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나누어요]
산에 오르며 아이들과 나누는 책 이야기

김광재 | 2004년 05월



합정역에 앉아 전철을 기다리며 신문에 실린 「우리 아이 독서 습관 어때요? ― 잘못된 책 읽기 유형별로 바로 잡는 법」을 읽고 있습니다. 전철을 타고 구파발까지 가는 동안, 함께 공부하는 우리 아이들의 독서 습관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구파발에서 다시 송추행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매표소에 내려 산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오른쪽 봉우리에는 의상대사, 왼쪽 봉우리에는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산 속을 향해 걷기 시작하길 20여 분. 저만치 앞에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서툰 발걸음을 옮기시는 남자분을 만났습니다. 한 쪽 다리가 꽤 불편해 보이지만 열심히 걷고 계십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함께 버스에서 내려 매표소를 지나 걷기 시작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제 발걸음의 크기만큼, 제 속도로, 가고 싶은 그만큼만 가도 되어서 나는 산행이 참 좋습니다. 남장대를 오르며 개별꽃, 쇠뜨기, 제비꽃 그리고 왜현호색까지 만났습니다. 일 년만인데도 어제인 듯 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4학년 아이들과 함께 한 『루이 브라이』 수업을 생각합니다.

수업 시작 전에 아이들에게 ‘시각 장애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심청이, 헬렌 켈러, 검정 안경, 『안내견 탄실이』, 지팡이 그리고 생각나는 것이 없다는 대답도 있었습니다. 『안내견 탄실이』라고 대답한 친구는 강아지를 무서워하고 드물게도 독후감 쓰기를 좋아하는 은혜였습니다.

『루이 브라이』 표지


루이 브라이는 1800년대 초, 세 살 때 사고로 인해 실명을 하고 파뤼 신부님의 도움으로 파리의 맹인 학교에 다니면서 10대에 점자를 만들고 선생님이 되어 맹인 학생들을 위한 교육에 힘쓰다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브라이는 일생에 파뤼 신부님을 비롯한 베슈레 선생님, 뒤포 박사, 부모님, 그를 믿고 따르는 친구와 제자들의 깊은 애정과 신뢰를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문자를 만든 바르비에 대위와 점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피녜 박사로 인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지으며, 드라마 「대장금」의 한상궁과 최상궁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럴 때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잠깐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독서 지도가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까지도 가지게 된답니다. 4학년이 보는 세상의 눈은 이분법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저들도 어른이 되어 가면서 알게 될 사실들을 지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고민을 놓고서 말입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미리 만들어 둔 루이 브라이 연표를 나누어 주고, 자기 이름을 점자로 써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은 금세 놀이라도 되는 양 즐겁게 제 이름을 써 보고, 친구들 이름을 보고 신기해 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모두 ‘관계’라는 것을 맺고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각자의 역할’과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일들을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 게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에 만날 때 각자 한 사람씩 정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글 쓰기를 했습니다. 읽은 느낌이나 편지 쓰기 등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오늘은 수유역에서 아카데미 하우스로 가는 마을 버스를 타고 있습니다. 백련사 입구에서 내려 걷다 보면 진달래 능선이라는 이름에 맞게 진달래가 천지입니다. 파란하늘에 분홍색 꽃이 가득인데도 진달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저려옵니다. 그 마음 끝에 익숙한 이름 하나가 딸려 나옵니다.

『헬렌 켈러』 표지
헬렌 켈러는 두 살 때 뇌척수막염을 앓고 시각과 청각을 잃은 후에 아홉 살 때 셜리반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해서 장애의 어려움을 이겨 내고 하버드 대학에까지 입학하는 놀라운 인물입니다. 여기서 헬렌이 공부한 점자는 물론 루이 브라이의 점자였음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헬렌의 이야기는 모두 조금씩은 알고 있는 이야기이고 책을 읽고 얻게 되는 감동의 크기만 다를 뿐 그 형태는 비슷하기 때문에 수업하기에는 좋은 책입니다. 지난 시간의숙제였던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지석이는 항상 자신의 공부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엄마의 입장을, 용준이는 욕심이 많고 활기가 넘쳐서 자신을 귀찮게 하는 동생의 입장을, 은혜는 언제나 헬렌을 도와 주기만 하는 셜리반 선생님의 입장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정수는 깜빡 잊고 준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수는 이 즈음에 수업에 관심이 없는지 참여도가 줄었습니다. 만화 책을 비롯한 흥미로운 책을 보려만 할 뿐 조금이라도 머리를 써야 할 부분에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벌써 세번째. 이 책에서 셜리반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했다는 은혜의 깊은 생각에 대한 고마움보다도 정수의 무관심이 더욱 걱정입니다.

아이들이 서로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는 일이 끝나갈 즈음 조심스럽게 바르비에 대위와 피녜 박사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우선은 그들이 나쁜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에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궁금한 사람은 이 다음에 각자 생각해 보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판단을 유보한 채, 불씨 하나 남기고 수업을 끝내려는데 정수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루이 브라이는 위인이에요, 아니예요?” “위인이냐고?” 위인이란 사전의 풀이대로 라면 위대한 또는 뛰어난 사람라고 되어 있을 뿐 그 수위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선생님 생각에는 루이 브라이도 위인이라고 얘기하고 “정수 생각은?” 하고 묻는데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몰라요, 나는.” 질문 끝에 돌아오는 가장 흔한 답이 ‘몰라요’임에도, 가볍게 해 대는 저들의 그 세 마디에 진달래와는 다르게 마음을 아프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헬렌 켈러』에는 이야기 한 토막이 끝나면 사람들이 궁금해 할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 곳에서 헬렌과 셜리반 선생님의 사진, 한글과 알파벳의 점자 형태, 점자 타자기 그리고 헬렌의 사회 활동을 못마땅해했다는 여동생 밀드레드의 이야기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백운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매표소 근처의 사람들은 숨어 버리기로 약속이나 한 듯이 사라져 버리고 가파른 오르막 길에는 가끔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나 지나갈 뿐, 조용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조용함이 좋아서 일 주일에 한 번 씩 산에 숨어 들면서도 때론 적적함을 느낍니다. 이제 제법 덥습니다. 약수가 반가울 쯤에 반가운 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하얀 색으로 십자형태의 제법 큰 꽃을 나무 한가득 피워 낼 그 이름은 산딸나무입니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을 것 같은 고지식한 모습의 그 꽃을 보기 위해 6월에 다시 와야겠습니다.

『세계의 어린 영웅들』 표지와 본문

어제, 집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의 첫마디는 “선생님, 오늘은 읽을 책 없지요, 숙제도 없지요.”였습니다. 항상 바쁜 그 아이들의 홀가분한 마음이 제게도 전해 옵니다. 그래서 미리 복사해 두었던 『세계의 어린 영웅들』의 ‘윌마 루돌프’ 편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선 편안하게 읽었습니다. 루돌프라는 성 때문에 웃기도 했지만 짧은 분량이라서 그런지 잘 읽었습니다. 윌마의 사진이라도 보여 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으나 실패했음을 전달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토네이도는 무엇인가?’ ‘윌마의 많은 형제들은 사실인가?’ 그리고 ‘흑인은 버스 좌석에 앉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가 엇나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1960년대의 흑인 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 이야기를 조금 길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었던 루이 브라이, 헬렌 켈러, 윌마 루돌프는 모두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의 열띤 의견 교환으로 하지 못했던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좋은 글이 나오면 좋겠다는 기대감과 글쓰기는 귀찮아서 대충 하더라도 마음 속에 작은 씨앗 하나는 심었을 거라는 생각을 함께 해 봅니다.

노랑 제비꽃이 무리지어 있는 의상봉에 앉아서 영국의 거지 시인 데이비스의 「가던 길 멈춰 서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위의 책들을 통해서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그저 이해하면서 함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집에 가기 위해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어서 떠나고 싶은 모양입니다.
김광재 / 작은 아이 책 읽기를 도와 주려고 시작한 공부가 지금은 좋은 일거리가 되어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만화 보기, 산에 가기, 그림 보기, 영화 보기, 여행 가기, 게다가 낮잠 자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재미있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아직 십대인 두 아들 그리고 항상 바쁜 남편과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