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5월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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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걸작 찾기]
느낌표? 물음표!

김서정 | 2004년 05월

책 읽기를 독려하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출판계뿐 아니라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한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 제목이 바로 ‘느낌표’였다. ‘느낌표’ 표 책은 작가와 출판사에게는 대박의 꿈을, 독자에게는 교양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부풀리면서 문화계의 선도 역할을 떠들썩하게 해 내는 듯했다. 어쨌거나 책이 팔리고 사람들은 책을 읽으니 좋은 일 아니냐는 낙천적 환영사에서부터, 안 그래도 빈약한 출판 시장을 그 몇 권의 괴물들이 다 먹어치운다는 우울한 한탄까지,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 프로그램의 순기능이나 역기능보다는 제목 자체가 더 흥미로웠다. 느낌표. 그 단어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가져야 할(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여기는) 기본 자세를 가장 함축적으로,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느껴라! 무릇 책을 읽고 나서는 느껴야 하는 법이다, 라는 것이다.

심각한, 의미 깊은, 감동적인, 아름다운, 고귀한, 애처로운, 너그러운, 뉘우치는…… 기타 등등의 그 어떤 것이 마음 속에 쿵 떨어지거나 퐁 솟아올라 가슴을 그득하고 뿌듯하게 채우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체험. 우리가 책에서 바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임을, 그래서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 뭔가를 느끼게 해 주는 책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느끼게 되는 책. 그러니까 그 말을 뒤집으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뭔가를 묻게 되는 책은, 우리 독서 환경에서는 그다지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소리가 된다. 바로 이 책, 『조각난 하얀 십자가』처럼.

『조각난 하얀 십자가』 표지
『조각난 하얀 십자가』는 느낌표보다는 물음표를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확신이나 위로나 기쁨이나 아름다움따위를 주지 않는다. 아이들 책에 으레 따라 나오는 꿈과 희망을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린 독자들에게 던져지는 것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도발적인 질문들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목요연, 일사불란하게 주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독자는 그저 계속 물어야 한다. 해답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른이고 소위 평론가라는 나도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는 뭐라고 답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이 책이 아주 중요한 물음을 묻고 있다는 것, 그 물음에 대한 답이란, ‘독자들이 각각 자기 몫의 질문을 부단히 껴안고 살아가는 일’ 외에는 별다른 게 없을 거라는 ‘느낌’뿐이다.

그 ‘느낌’은 책 첫머리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물음’ 그리고 ‘해답 없음’ 때문에 생긴다. “때가 되었는데도 나는 왜 아직 그것들을 버리지 못할까?” “나는 왜 이 조각들을 책상 위에 쏟아 놓고 보다가 양 손가락 끝으로 돌돌 굴려 보기도 하면서 내다 버리지 못할까?” “그 이유를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왜 교회를 좋아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이유는 모른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책을 펼치고 겨우 네 페이지 읽었는데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일”을 겪은 지 일 년이 지난 화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그 외에도 책 전편을 통해 “그 사람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왜? 왜?” “그 이유를 모르겠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왜 그런지는 나도 정말 몰랐다.” “그 분께서 왜 나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같은 대답 없는 질문과 회의가 도처에 출몰한다. 그 일은 지금 8학년, 그러니까 우리 나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짜리 남자 아이가 중학교 1학년, 열네 살의 여름에 앓았던 영혼의 홍역같은 사건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피터는 왠지 모르게 교회에 관심이 많다. 예수님을 좋아한다.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아서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한다. 주일 학교 여름 수련회에 꼬박꼬박 나간다. 그러다가 7학년 여름, ‘그 사람’을 만난다. 떠돌이 부흥 목사. 그로 인해 피터의 안에서 꽝! 작은 폭발이 일어난다. 부흥회에 나가면서 피터는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그 종교적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 단짝 친구인 루퍼스를 떠나 목사와 함께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목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피터는 숨어서 자기를 지켜보던 루퍼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부흥 목사가 열일곱 여자 아이를 꼬여서 도망갔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진다. 지옥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피터. 그러나 상처는 차츰 아물어 가고, 피터는 부모님을 이해하고, 루퍼스를 되찾는다. 그리고 일 년 후, 그 때 깨져서 부스러기가 된 도자기 십자가를 피터는 털어 내 버린다. 조각은 이제 필요 없다. 그는 “조각이 아닌 전체를 볼 준비가 된 것이다.”

어린이 책으로는 보기 드물게 종교적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영혼의 문제에 파고 들어가는 이 이야기는 읽어 내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기독교 인이 아닌 사람은 아닌 대로, 교인이지만 부흥회 때 사방에서 울고 불며 기절하면서 광기같은 열정이 이글거리는 분위기에 도저히 휩쓸리지 못하는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 불편하다. 열렬한 신자라면, 부흥 목사가 열네 살 먹은 남자 아이에게 사기치고 열일곱 살 먹은 여자 아이와 도망치는 모티프가 못마땅할 것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만사 형통하다는 소리도 아니고, 가출따위를 꿈꾸지 말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라는 가르침이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란 말이냐. 이런 애매한 이야기에서는 아무 느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게 아니냐. 그렇게 여기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그런 점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해 보인다. 어쩌라는 말도, 뭘 느끼고 얻으라는 지침도 없이 답답하고 혼란스럽고,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곤두박질치며 오르내리는 한 아이의 영적 방황을 아픈 질문으로 새겨 넣는 이 이야기는, 답이 없기 때문에 더욱 심장을 움켜잡는 듯하다. 한 예민하고 가녀리고 겁 많은 사춘기 아이, “나는 젤리처럼 물렁물렁 줏대가 없”다고 자평하는 피터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종교) 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는(오히려 적대적인) 부모님, 믿음직하기는 하지만 자신과 너무 다른 친구 사이에서 말할 수 없이 외롭다. 자기 영혼을 채워 줄 그 무언가에 너무나 굶주려 있다. 그 때 그 굶주린 영혼을 채워 주는 사람이 바로 떠돌이 목사이다. 그는 “내 얘기를 그 어느 누구보다 더 귀기울여 들”어 주는 사람, “이제 너는 다시 태어났다”고 선언해 주는 사람, “크면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고 격려해 주는 사람, “수천 명의 생명을 구원하러” 같이 떠나자고 이끄는 사람이다. 피터는 그에게 단번에 홀려 버린다. 그를 위해서 부모도 친구도 기꺼이 버린다. 이유도 모르는 채,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위구심 속에서도 그에게 끌려간다.

사춘기에, 혹은 사춘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 한두 번은 마주치게 되는 이런 맹목적이고 필사적인 열정을 이처럼 선명하고 절실하게 각인시키는 이야기를 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유도 모르고 앞길도 모르는 채 위험한 열병같은 소망에 자신을 몽땅 내던지는 이 아이, 모닥불로 날아드는 부나방같은 이 아이. 나는 그에게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종류의 종교적 열정과 방황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애쓸 수는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양상은 다르지만 구조는 같은 생의 가시덤불을 홀로 피투성이로 헤쳐 지나가야 하는 때를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느낌표보다는 물음표, 혹은 말없음표의 힘일 것이다. 알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다. 목사에게 배신당하고 “사람 살려.” 하면서 쓰러져 울던 피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산다는 게 그렇게 힘든 줄 미처 몰랐다”고 고백하고,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고 자문한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피터는 조금씩 회복하면서 마침내는 미워하던 그 목사까지 이해하게 된다. 그 이해의 실마리 역시 “모른다”이다. “그도 결코 나나 다른 누구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외로움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을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내가, 남이, 뭔가를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거기에서부터 앎이 나온다. 그리하여 마침내 피터가 알게 된 것은 “누구한테든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구한테든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중략)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내가 배운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피터는 자기가 웃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루퍼스와 화해하는 이 장면.

처음에 나는 루퍼스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루퍼스가 나를 놀리는 건지 아닌지 몰랐다.
하지만 내가 안 건 나 역시 킥킥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피터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루퍼스와 자신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부모님은 너무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사실, “이 세상은 그 목사 같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여 죄인으로 운명지어진 사람 수백만 명을 구할 수도 있지만 생각이 복잡한 어린 아이 하나의 영혼을 거의 죽일 수도 있는 곳”이라는 사실, 마지막으로 그는 “교회는 별로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물음표는 남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나에게 필요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을 잘 끼워 넣을 수 있을지”를 피터는 아직도 모른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던 그 아이의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모른다고 했지만, 피터는 아마 그 조각 그림 맞추기를 잘 해 낼 것이다. “이제 조각이 아닌 전체를 볼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서서, 웃음을 지으며, 자기 생의 조각 그림을 하나씩 맞춰 나가려는 이 아이에게서 우리는 물음표의 힘을 본다.
김서정 / 동화를 읽고, 쓰고, 옮기고, 가르치고, 평론하는 일로 몹시 바쁜 (척하는) 아줌마입니다. 지은 책으로 『용감한 꼬마 생쥐』 『나의 사직동』 『믿거나 말거나 동물 이야기』 평론집 『어린이문학 만세』 『멋진 판타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어린이문학의 즐거움』 『용의 아이들』 『일주일 내내 토요일』 『미오 나의 미오』 등이 있습니다. 숙명여대 겸임 교수이고, ‘김서정 동화아카데미’에서 동화를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