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5월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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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주인공이 내게 말하길]
우연히, 필연코, 피어나는 꽃 ― 꽃길의 곰돌이

이상희 | 2004년 05월

숲길을 걷다가 숨은 듯 보란 듯 피어 있는 꽃을 보게 되면 일일이 다가가 들여다보며 묻곤 한다. 어째서 다름 아닌 이 시각 이 곳에서 이처럼 어여쁘게 피어 있는 것이냐고. 그들 과묵한 무리는 그냥 벙긋벙긋 웃을 뿐이지만, 필시 심상찮을 그 연유를 낱낱이 듣고 싶어 나는 쉬이 허리 펴지 못한 채 일행에 뒤처져 머뭇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겐 바로 그 ‘꽃이 피는 필연이자 우연인 수만 가지 연유’ 가운데 하나가 비장된 것으로 등록된 그림책이 있다.

『꽃길』 표지
『꽃길』은 숲 속에 사는 두 친구의 우정 위에 봄날의 자연이 귀엽고 사랑스런 풍경을 펼쳐 보이는 그림책이다. 숲 속에 사는 곰돌이가 어느 가을 날 숲 저편 친구네 집 가는 길에 주머니 하나를 주워서 가져갔다가 어느새 내용물이 다 새어 나간 걸 보고 서운해하지만, 다음 해 봄에 깨어나 친구네 집 가는 길이 꽃길이 된 걸 보고 기뻐한다는 이 일본 그림책은 첫눈엔 싱거울 정도로 단순하다.

곰돌이, 다람쥐, 이 두 친구만이 사는 숲 속 동네의 가을 겨울 봄 풍경, 그리고 꽃씨 주머니 하나가 그림 요소의 전부이다. 곰곰 들여다보고 즐길 재밋거리도 없고 그림도 밋밋하다. 게다가 글은, 그나마 이 단순한 그림하고 떼어 놓고 읽으면 자칫 내용을 해독하기 힘든 일본 전통 시 하이쿠처럼 비약이 심한 문장 일곱 개를 띄엄띄엄 늘어 놓는다.

곰돌이가 주머니를 주웠어요. / “이게 뭘까? 가득히 들어 있네.” / 곰돌이는 친구인 다람쥐에게 물어보러 갔어요. / 곰돌이가 주머니를 열자, “어, 아무 것도 없네.” / “이런, 구멍이 나 있었구나.” / 따뜻한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 기다란 예쁜 꽃길이 이어졌습니다.


이 그림책을 더욱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주인공 곰돌이의 면면이다. 표지를 보자. 기저귀를 못 뗀 서너 살배기 아이마냥 엉덩이가 뚱뚱한 곰돌이가 웬 주머니를 하나 든 채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는 모습이 등신대로 꽉 차게 그려져 있다. 이 커다란 곰돌이가, 연두 바탕의 숲 이미지 면지 너머 도토리 밤 잣 고욤 같은 가을 열매를 보여 주는 펼침 장면을 또 한 장 넘긴 속표지 그림에서, 이번에는 주머니를 들지 않은 채 깊은 산 속 숲을 배경으로 걷고 있는 모습이 조그맣게 보인다.

곰돌이는 가을 빛에 물든 숲 속 통나무 집을 나와 부지런히 걷고 있다. 아이들이 친구 옷자락만 봐도 만사 제쳐 놓고 그쪽으로 몸과 마음이 쏠려 걸음이 꼬이는 것처럼, 곰돌이도 제가 가려는 숲 저편 나무 집(이 집이 단 하나뿐인 친구네 집인 줄은 몇 장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쪽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지금 건너갈 다리 위에 무엇이 하나 동그마니 놓여 있는 것도 못 본다. 다음 장면 다리 위에서야 주머니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진다. 그리고 높이 쳐들어 눈에 바짝 갖다대곤 이리저리 살펴 본다. 도대체 이 불룩한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곰돌이도, 독자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 친구한테 가는 길이니까, 틀림없이 멋진 것이 들어 있을 테니까, 함께 열어도 보고 나눠 가질 생각으로 가져가기로 한다.


멀리서 보이던 그 문이랑 창문 나 있는 거대한 나무 둥치 앞에 다가간 곰돌이는 다음 장면에서야 친구랑 마주 앉아 주머니를 끄르고 있다.(그 친구란, 곰돌이 제 팔뚝만한 다람쥐다!) 그러나 주머니는 바닥이 찢어진 채 텅 비어 있고, 두 친구는 번갈아 중얼거린다. “어, 아무 것도 없네.” “이런, 구멍이 나 있었구나.” 그러고 있는 사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가을 숲은 어둑한 보랏빛으로 뭉개어지고, 다음 장면은 눈 내리는 하얀 겨울 숲이다. 두 친구 집과 큰 나무 몇 그루 말고는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자취가 없다. 개울도, 다리도, 곰돌이가 다니던 친구네 집 쪽 길도, 곰곰 살펴 보아야 희미한 흔적이 보일까 말까 하다. 그리고 봄…….

햇살이 쏟아져드는 통나무 집 침대에서 겨울 잠을 깬 곰돌이가 기지개를 켠다. 일어나자마자 친구 생각에 집을 나선다. 이번에는 친구 집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다리 건너서부터 친구 집까지 조르르르 꽃이 피어 있는 것이다! 곰돌이가 다람쥐를 꽃길로 데려와 즐거워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새들도 날아와 꽃길 위를 난다. 이제 벌도 나비도 날아오리라.


그런데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어째서 다른 데가 아니고 하필 곰돌이네 집 앞 다리에 꽃씨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던 거냐고, 어째서 그 꽃씨 주머니는 곰돌이가 친구네 집으로 가져가는 사이에 하필 구멍이 나서 흘렀던 거냐고, 또 그 꽃씨는 하필 길을 따라 마춤하게 흘러서 겨울까지 잘 나고 피어난 거냐고.

세상의 모든 우연에는 땅 속 저 아래 구비구비 실뿌리 끝 같은 필연의 근거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이 눈부신 우연의 ‘꽃길’에도 틀림없이 필연의 근거가 있고, 그 근거는 주인공 곰돌이다.

곰돌이는 무엇을 애써 찾고 구하고 일구거나, 절절이 실망하고 안타까워하는 존재가 아니다. 제 갈 길 막고 있는 것을 주워서는, 친구 집 가는 길에 가져갔다가, 뭔지 모를 그것이 없어진 것에 조금 서운해하고, 까맣게 잊어 버린다. 긴긴 잠을 즐기고 일어나선 뜻밖의 아름다운 풍경에 기뻐한다. 아이답게 미리 근심하지 않고 잠깐 슬퍼하고 한참 기뻐하는, 지금 이 순간의 진실만을 그득히 느끼고 즐기는 무연한 마음의 소유자, ‘천진 동자’인 셈이다.

이 천진 동자 곰돌이는 친구 다람쥐를 사랑한다. 겨울 잠 잘 때 말고는 아마 하루에도 몇 번이나 뻔질나게 친구네 집으로 달려가곤 할 것이다. 곰돌이네 집 앞 다리 너머서부터 다람쥐 집까지 가는 길이 그토록 훤히 나 있는 걸 보면 그렇다. 그렇게 언제나 친구랑 즐겁게 놀 마음으로, 친구를 기쁘게 해 줄 마음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곰돌이 마음이 그 자체로 ‘꽃’인 것이다.

그러니, 다리 위에 생뚱맞게 떨어져 있는 그 꽃씨 주머니는 곰돌이의 ‘꽃 마음’이 현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산 너머의 누군가 묵은 씨앗 주머니를 한꺼번에 져나르다 하나를 툭 떨어뜨리고 간 것이라 해도, 그 우연은 필연이다. 거기 감돌고 있는 곰돌이의 꽃 마음에 자석처럼 이끌린 것이다.

그렇다. 다름 아닌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다름 아닌 그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은 필연이다. 수만 가지 연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덕분이다. 그리고 그 가장 처음 실마리는 어떤 존재가 무심히 또는 간절히 간직한 ‘꽃 마음’일 것이다. 꽃길을 뛰어 놀면서 곰돌이가 내게 말한다.

“이 봄에 내겐 참 좋은 일이 생겼어요.
친구 집 가는 길이 예뻐졌거든요.
꽃길이 생겼답니다!
내 친구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더 기쁘답니다.”
이상희 / 부산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시와 그림책 글을 쓰면서 외국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책 『외딴 집의 꿩 손님』 『도솔산 선운사』 『고양이가 기다리는 계단』 『내가 정말 사자일까?』 등의 그림책과 어른을 위한 동화 『깡통』을 펴 냈습니다. 『난 그림책이 정말 좋아요』 『심프』 『바구니 달』 『작은 기차』 등 영미권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 그림책 글을 쓰고 번역하고 읽는 일도 좋아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림책 읽어 주는 일도 무척 좋아합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살면서 원주평생교육정보관의 ‘어머니 그림책 교실’과 ‘그림책 버스’ 모임을 이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