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5월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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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세상]
언제나 힘이 되는 이름 ―가족

신수진 | 2004년 05월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아마 두 해 정도 되었을까. 어버이날이었는데,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카네이션을 든 사람들을 보자 서울 생활 내내 잊고 있었던 부모님이 생각났다. 모처럼 전화를 걸자 아버지는 “왜 전화했니? 돈 떨어졌니?”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뜨끔해지고 ‘내가 평소에 이런 딸이었구나.’ 싶어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버이날이라서요.” 하자 아버지는 이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맙다.”라고. 얼마나 전화를 안 했으면……. 대체 뭐가 고마우시다는 건지. 전화를 끊고서 울컥하더니 눈에서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그 기억 때문에 그 뒤로 틈만 나면 고향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휴가 때도, 달력에 빨간 날이 연이어 붙은 날에도 다른 계획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이나 사회 생활을 할 때도 변변한 여행 한 번 다녀온 적이 없다.

그래도 나는 그 시간이 제일 좋다. 내 고향은 부산이다. 그 곳에서 19년을 살았고, 또 서울에서 비슷한 시간만큼 살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고향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고 아직도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그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부산에 내려가면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하루 종일 엄마 얼굴 보고 있는 게 제일 행복하다. 지금도 가족은 언제나 내게 용기와 희망 그 자체다.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

『일곱 개의 숟가락』 표지와 본문

특히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듬어 안고서 살아 온 가족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김수정의 『일곱 개의 숟가락』이 그런 만화이다. TV 드라마로도 방송된 적이 있었지만 원래 원작만한 드라마나 영화를 만나기 힘들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그랬다. 드라마에는 의도된 감동이 있었으나 만화에는 작가 김수정이 그려 내는 특유의 경쾌함이 있어 마냥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하지 않다. 1990년에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 연재를 통해 맨 처음 선보였고 10여 년이 지난 오늘 날 컬러 만화로 복간된 『일곱 개의 숟가락』은 색깔이 요란하지 않고 따뜻한 느낌으로 은은하게 채색되어 흑백 원작 만화의 그 느낌을 훼손하지 않고 잘 살려 냈다.

이 만화가 연재될 무렵, 다른 만화 잡지 『보물섬』에는 김수정의 대표 만화 『아기 공룡 둘리』가 연재되고 있었다. 『아기 공룡 둘리』같은 유쾌한 만화를 그려 낸 작가가 다른 한편에서는 어떻게 이런 감동적인 가족 이야기를 그려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특히 이 만화가 연재되었던 잡지는 『드래곤 볼』같은 일본 만화와 그와 유사한 만화들이 주를 이루던 터였으니 『일곱 개의 숟가락』은 그 속에서 유난히 돋보인 우리 만화였다.

작고 허름한 서민 아파트에서 교통 사고로 하루 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을 맡은 할아버지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산다. 철없는 할아버지, 반항적인 일룡이, 엄마 역할을 맡아하는 명주, 고집쟁이 소룡이, 자폐증이 있는 삼용이 그리고 이런 삼용이를 언제나 보호하는 마음 착한 옹이, 모두가 이 만화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가족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아옹다옹 싸우기도 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한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할아버지는 단역 배우로, 두 아들의 유산을 보험금과 영화판에 쓸어붓고 평생을 ‘폼생폼사’로 사는 인물이다. 언제나 멋을 부리며 아이들 앞에서 허세도 부리지만, 혼자서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며 늘 아이들을 걱정하는 속정 깊은 할아버지다. 반항적인 사춘기 고등학생인 큰형 일룡이는 할아버지와 사사건건 맞서며 동생들에게도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굴지만 권투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가족의 생계에 보탠다. 가족의 살림을 맡아하는 명주는 반장이 되면 반장 턱을 내야 하니까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 반장도 포기한다. 자폐 증상이 있는 삼용이를 보호하고 감싸 주는 옹이는 오빠 생각에 생일 초대도 가지 않는다. 이렇게 여섯 식구는 서로 다른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가족을 생각한다.

『일곱 개의 숟가락』은 희한하게도 웃다 보면 눈물이 나고, 울다 보면 웃음이 난다. ‘1+1=숟가락과 젓가락’ ‘2+2=엄마 신발, 아빠 신발’이라고 말하는 자폐아 삼용이의 엉뚱한 대답을 보면 웃음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삼용이의 모습에 가슴이 짠해지는 것이다. 만화 속의 숟가락은 엄마, 아빠 혹은 가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할아버지와 일룡이가 티격태격하며 무술 대결을 벌이는 모습에서는 웃음이 나지만 한겨울 날, 옹이와 삼룡이가 돼지 저금통을 털어 엄마 아빠 산소에 갔다 차를 놓치는 바람에 눈 내리는 산소 옆에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잠드는 장면은 어떤 드라마보다 슬프다.

『해님이네 집』 표지와 본문

‘가족’이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잘 보여 주는 만화가 바로 이희재의 『해님이네 집』이다. 해님이는 작가의 어린 딸로, 작가는 딸이 어린 시절 그린 그림 일기에서 소재를 얻어 만화를 그렸다. 두 딸 해님이와 달님이의 성장 일기이기도 하고 가족 앨범이기도 한 책이다.

작가 이희재는 평소에도 우리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환경, 사회 문제에 유난히 관심이 많고 현실을 반영한 사실적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로 유명하다. 1988년 『악동이』로 상을 받게 되었을 때도 심의 기구에서 주는 상이라며 거부할 만큼 ‘바른 생활’ 만화가이다. 그래서인지 가족 만화 곳곳에 작가의 생각이 그대로 배어 있다. 늘 찬밥 신세로 부당한 대우를 많이 받는 만화가와 오늘날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만화 계의 현실, 과중하게 아이들을 짓누르는 사교육, 성적과 공부 외에는 어떤 적성 계발도 쉽지 않은 교육 환경에 대해서도 무겁지 않은 톤으로 지적하곤 한다.

사춘기가 되면서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기고 자기만의 세계가 굳건해진다. 특히 딸이라면 이 무렵부터 아버지와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마련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서로에게 다가가기 힘들지만 작가는 용케도 딸들의 마음을 잘 알아 내고 토닥인다. 작가는 어린 시절 딸의 그림 일기를 간직하고, 중학생이 된 딸이 곱고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르게 되자 미장원 쓰레기 통을 뒤져 딸의 머리카락을 찾아와 보관할 만큼 다정다감한 아빠이다. 또 아이들의 고민에 귀기울이며 함께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열린 아빠이기도 하다. 만화가가 꿈인 해님이, 그래서 그림 일기 쓰는 걸 제일 좋아하는 해님이가 시골 학교에서 도시로 전학 온 뒤 그 그림 일기 쓰기의 즐거움을 빼앗겼을 때에도 안타까워하며 위로해 준다. 외모에 신경 쓰고 남학생에게 관심을 보이는 딸을 보며 서운해하기보다는 부쩍 자란 딸을 대견해한다. 그렇기에 사춘기로 접어든 딸과 멀어지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유지한다.

반면 만화 속 엄마는 작가와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현실적이다. 성적 때문에 아이들을 혼내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려 억지로 학원엘 보내고……. 김치 담그려 절여 놓은 배추를 버리게 된다며 모처럼 큰 마음 먹고 나온 극장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 버린 엄마를 해님이는 이해 못 한다. 그래서 해님이는 더러 엄마에 대한 불만을 일기장에 적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또 그렇다. 대부분의 집들이 다 그런 모습 아닌가? 야단을 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건 엄마여서 아이들과 불편해지는 것도 엄마다. 하지만 감정적 대립으로 인해 때론 불편해지는 엄마까지 포함된 게 바로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점을 작가는 만화 속에 담아 두었다.

『자장면을 먹은 꼬불이』 표지와 본문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 줄지, 아이들과 어떻게 교감해야 될지 고민이라면 『자장면을 먹은 꼬불이』를 읽어 보자.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열두 살 소녀가 그린 만화책이라는 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들었다는 꼬마 뱀 캐릭터 꼬불이는 지은이 자신이고, 뱀 가족의 이야기는 모두 실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 책은 크게 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가족과 애완 동물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연재 만화, 뒷부분은 다양한 소재의 여섯 컷 만화다. 특히 일기 형식의 6컷 만화는 발랄하고 기발한 어린이들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

‘굿모닝’ 편에서는 매일 늦게 들어오고 아침엔 신문만 보는 아빠에게 서운하다고 말하고‘누워서 책보면 안 돼’를 통해서는 어른은 되고 어린이는 왜 안 되냐고 반문한다. ‘반장 사례’ 편에서는 반장 당선 사례로 학급을 예쁘게 꾸며 주겠다는 엄마와 반 전체 아이들에게 햄버거와 콜라를 돌릴 것을 원하는 아이 사이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어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 만화가 더러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기성 만화가의 작품보다 내용 구성이나 재미도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열두 살 어린이가 그렸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 주기 바란다. 이 책의 독자는 어린이다. 새림이가 직접 겪은 이야기로 꾸밈없이 그렸기에 아이들의 눈 높이에 딱 맞게 맞춰져 있고, 또래 아이가 쓰고 그렸다는 점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다.

어른들도 이 만화를 계속 보다 보면 이 책이 왜 가족 만화로서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여 주었던 ‘혼자 놀기’가 우스개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더 많다.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이들과 어떤 방식으로 놀지,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또 무엇으로 공감대를 만들 것인지 그 방법을 모른다.

꼬불이의 아빠는 욕을 듣고 와서 그 뜻을 물어 보는 아이에게 무조건 나쁘니까 하지 말라고 금지시키지 않는다. 정말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욕을 하고 좀 후련해지니 할 수도 있으며 그 대신 남들이 절대 듣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 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빠와 무슨 이야기든 다 할 수 있는 아빠가 참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책은 조곤조곤 아이와 대화하는 방법, 아이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만화를 그린 건 열두 살 새림이지만 아이의 재능을 칭찬으로 키워 주고 그것을 특화시켜 책으로 만든 건 아빠이다. 아빠는 “관심 있게 봐 주고 칭찬 해 주고 격려해 주고 조금씩 도와 주니 이만큼 되더라”라고 말한다. 책을 보면서 ‘아, 아이에게 이런 점을 해 주지 못했구나. 나도 내 아이에게 이런 걸 해 주면 되겠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아이들이 품은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아이들과 함께 교감하려는 노력을 더 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지지만 언제나 힘이 되는 ‘가족’. 오월은 감사의 달이니 더욱 그런 가족에게 감사할 일이다. 아이는 다치지 않고 잘 커 줘서 감사하고,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시니 감사하다.
신수진 /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태국 어를 전공했지만 어린이 책을 만드는 일을 더 좋아합니다. 어린이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일하면서 만화와 인연을 맺었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만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비디오 볼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수십 권의 만화책을 쌓아 놓고 초등 학생인 딸 몰래 숨어서 봅니다. 제대로 알고 보자 싶어 대확원에서 만화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