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5월 통권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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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었어요]
지금 아빠는 고민중!

이택승 | 2004년 05월

요즘 아빠는 고민 중이다. 워낙 그림책 보는 것을 좋아해서 자기 몸만한 그림책을 질질 끌고 따라다니며 읽어 달라던 아이들이라 별 걱정을 안 했었는데, 벌써 아이들의 ‘책 읽기’와 아빠의 ‘책 권하기’ 사이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말 못하는 아기 때는 아빠가 골라 주는 책이면 물고 빨아 닳고 찢어지도록 좋아하던 놈들이 학교 다닐 때쯤 되니 이제는 싱겁다, 맵다 하며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너무 재미있고 좋은 책이다 싶어 내 놓으면 한번 들쳐보기만 하고는 열심히 텔레비전만 들여다본다. 게다가 한 놈은 “와! 너무 재밌다!” 하는 책을 다른 한 놈은 “이게 뭐야, 시시하잖아.”라고 할 때면 아빠는 그만 ‘책 권하기’에 대하여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아직도 책을 읽어 달라고만 하는 둘째 아이에게 계속 책을 읽어 주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닌가. 외국 동화가 좋을까, 우리 동화가 좋을까. 팬터지를 다룬 책이 좋을까, 아니면 현실 문제를 다룬 책이 좋을까.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만화 보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게 책을 보라고 하면 혹시 책을 의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한참 뛰어 놀 아이들에게 과연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게 좋은 걸까. 좋은 책은 무엇이고 나쁜 책은 무엇일까. 아, 나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지난 겨울 둘째 아이의 키가 120센티미터를 넘었다. 120센티미터! 그것은 이제 놀이 공원에서 대부분의 놀이 기구들을 당당히 혼자 이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수치이다. 둘째는 놀이 공원에서 그 키 제한에 걸려 신나서 뛰어가는 언니를 쳐다보며 울먹이던 ‘아기’에서 이제는 당당히 홀로 놀이 기구를 탈 수 있는 명실상부한 ‘어린이’가 된 것이다. 스스로도 뿌듯해하는 모습이다. 영악한 아빠는 이 사실을 이용해 책 읽기에서도 홀로서기를 유도해 본다.

둘째는 올해 초등 학교에 들어갔지만 아직 한글 읽기가 그리 익숙하지 않다. 책도 꼭 읽어 달라고 조른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영화를 보여 줄 때도 우리 말 녹음이 아니라 한글 자막을 골라 보여 주고, 책도 혼자 소리 내어 읽을 만한 것을 골라 준다. 그런데 아이는 여전히 혼자서 책 읽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런 변화가 싫은 모양이다. 몇 장 넘기지 않아서 애원하는 눈초리로 엄마 아빠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아이에게 이렇게 빨리 책 읽는 괴로움을 안겨 주어도 되는가 싶지만 꾹 참는다.

『종이 봉지 공주』 표지와 본문

둘째가 그나마 재미있게 끝까지 읽는 책이 『종이 봉지 공주』이다. 남자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많은 둘째는 남녀의 역할이 바뀐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나 보다. 내가 읽어 봐도 여자의 외모에 대한 고정 관념과 그것을 이기는 공주의 자유 분방함이 신선하다. 둘째는 『종이 봉지 공주』가 꼭 재미있는 만화책 같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떤 내용인지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둘째는 책을 펼쳐가며 떠듬떠듬 줄거리를 들려준다.

‘멋쟁이 로널드 왕자와 행복한 결혼을 앞둔 엘리자베스 공주.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용은 불을 뿜어 공주의 성을 부수고 옷마저 다 태워 버리고 왕자까지 잡아 갔어요. 공주는 남은 종이 봉지를 입고 꾀를 내어 용을 물리치고 왕자를 구했어요. 근데 왕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공주의 모습이 엉망이라고 말했어요. 결국 두사람은 결혼하지 않았어요.’

“너두 공주처럼 결혼하지 않을 거야?”

“음…… 잘 모르겠어.”

『또야 너구리가 기운바지를 입었어요』 표지와 본문

아이는 별로 재미없어 하는데 아빠가 막무가내로 읽으라고 강요해서 읽는 책도 있다.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집 『또야 너구리가 기운바지를 입었어요』. 너구리, 개미, 사슴, 돼지, 외로운 할머니 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여섯 편의 단편 동화가 실려 있다.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는 기운 바지가 입기 싫다고 떼쓰던 아기 너구리 또야가 ‘기운 바지를 입으면 산에 들에 꽃이 아름답게 피고, 시내 물고기도 다 살고, 별도 더 초롱초롱 빛난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기운 바지를 입는 이야기이다. 또야는 시냇물을 지나면서 기운 엉덩이를 시냇물 쪽으로 향하고는 이제 시냇물에 물고기가 잘 살 거라고 속삭이고, 은행 나무한테는 자신이 기운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예쁜 잎이 달릴 거라고 이야기한다.

이밖에도 장터의 약장수 구경을 하는 찔룩이 개미 형제 이야기, 맛나게 생긴 물렁감을 따려고 애쓰던 아기 돼지 통통이와 통통이를 도와 준 아기 사슴 콩이의 이야기, 강 건너 마을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을 하자 강 이쪽 마을에서 제각기 자신의 것을 아껴 강 건너 마을을 돕는다는 이야기, 젊은이들이 떠나 버리고 난 시골 마을에 쓸쓸히 혼자 살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살구나뭇집 할머니 이야기,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오두막 할머니의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아빠가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뻔하다. 우선 아빠가 작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고, 굳이 바란다면 우리 아이가 부모 품을 떠나 더 넓은 학교 생활을 시작하면서 작고 여린 친구들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예쁜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글쎄, 우리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둘째는 그냥 이렇게 글이 많은 책을 혼자 읽는 것을 답답해 할 뿐이다.



큰 아이는 이제 제법 책 읽는 모양새가 잡혔다. 혼자 책을 들고 침대에서 심각하게 책 읽기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안쓰러워서 쿡 찔러대며 장난을 걸어 보지만 아이는 한번 웃어 주고는 다시 책을 파고 든다. 그럴 땐 서운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이놈은 벌써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뚜렷해져서 말이 통하고 논쟁이 되는 듯해 요즘엔 과감하게 아빠의 관심사와 관련된 책을 권해 본다. 다 읽고 아빠하고 ‘토론’해 보자고 도전장을 던지면 아이는 눈을 반짝반짝 부라리며 책에 달려든다.

『평화랑 뽀뽀해요』 표지와 본문

요즘 읽어 보라고 권해 준 책은 『평화랑 뽀뽀해요』. 베트남 푸옌의 ‘한-베 평화공원’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2002년 가을 ‘한국-베트남 어린이 문예대회’가 열렸는데 그 때 참여한 한국과 베트남 어린이들의 시와 산문, 그림과 만화를 책으로 엮어 펴 낸 것이다. 평화를 소망하는 두 나라 어린이들의 마음이 풋풋한 뽀뽀처럼 와 닿는다. 뒤쪽에는 베트남의 지리적·기후적 특징과 역사, 베트남 전쟁의 아픔에 대한 글을 실어 놓아 어린이들이 베트남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내일을 빼앗지 말아요』 표지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큰 아이가 무난히 읽어 내는 것 같아 욕심을 좀 더 내 보았다. 『내일을 빼앗지 말아요』. 이 책은 전쟁과 가난과 무관심으로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열두 편의 이야기로 보여 주고 있다. 마농은 커다란 떡갈 나무의 마술로 세계 곳곳의 아이들과 만난다. 그 아이들은 모두 슬프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루 종일 구두를 닦고 쓰레기를 치우는 하이티의 아이들, 부모님의 무관심으로 삭막한 집에 앉아 혼자 마음 아파하는 아이, 전쟁이 가져온 비극 때문에 누구든지 의심하게 된 알제리의 아이.

지금도 아이는 혼자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며 보고 있을까. 낱말 뜻은 제대로 알기나 하는 걸까. 아빠를 귀찮게 하지 않는 모양이 또 영 서운하고 안쓰럽다. 첫째야, 아빠가 같이 읽어 주면 안될까? 제발…….
이택승 /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 되는 두 딸아이를 가진 평범한 아빠입니다. 아직도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 듯한 아빠로서, 자기도 잘 못하는 책 읽기를 아이들에게 무지막지하게 강요하는 게 부끄러워 지난 겨울 ‘열린어린이 독서지도사 강좌’를 수강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