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7월 통권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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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가족과 어린이-동화는 무엇을, 왜, 어떻게 말하는가]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노경실 | 2004년 07월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또, 한강 반포 대교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신문은 ‘불량만두’ 제조 업체로 발표됐던 식품 업체 사장이 심적 고통을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 듯 유서에는 억울함, 경영 압박에 대한 호소가 남겨져 있다고 한다. 반포 대교에서의 자살은 오늘 하룻만의 괴변이 아니다. 서울 한강 일대의 24개 다리는 용산·마포·강동·동부 등 4개 경찰서 산하 초소가 담당하고 있는데, 최근 자살한 유명 인사들(?)이 택한 곳이 모두 이촌 초소 관할 다리들. 용산 경찰서 산하 이촌 초소가 급증하는 한강 다리 투신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올해 들어 5월 말까지 한강 자살 기도가 74건이나 된다. 한강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말이다.

서울시 소방 방재 본부에 따르면 올들어 5월 말까지 119 구조대가 출동한 수난 사고 158건을 분류한 결과, ‘자살 기도’가 74건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촌 초소 안에 걸린 ‘인명 구조 활동 실적’ 표에는 올 들어 6월 8일까지 총 58명이 한강에 뛰어들었다. 사회 지도층 인사 및 일반 서민들의 투신 자살 건수가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30%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 소방 방재 본부, 용산 경찰서 등의 한강 관련 관할 관청과 사회 지도층의 각종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은 ‘한강 노이로제’를 호소할 정도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소방 방재 본부 관계자는 ‘특히 한강 주변 수난 사고 총 출동 건수 중 투신 자살이 50%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예년에는 한강 대교를 비롯해 반포, 원효, 영동 대교 등 특정 대교에서 투신 자살이 많았으나 이젠 서울의 모든 대교에서 투신 자살이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용산서 경찰 인력이 한강 인근의 변사 사건에 매달리다 일반 민생 업무 처리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용산 경찰서는 각 지구대를 중심으로 순찰 횟수를 늘려 두 시간마다 관내 대교 주변을 돌며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 있다는데……. 이런 ‘감시’는 사실 우리 스스로는 물론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해야 할 판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오늘도 가족이 죽고 죽이며, 또 사라질 것이다.

경제의 어려움 탓일까. 미국이나 유럽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특히 1929년, 미국의 경제 공황 때에는 주식 대폭락으로 수백 종류의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되자 3일 동안 210명이 자살했다. 파산한 사업가 수십 명이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뉴욕의 공원에서는 매일 아침 자살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빌딩 지하에서 죽은 사람, 이스트 강에서 익사한 사람, 아파트에서 가스 중독으로 죽은 사람. 1929년 그 마의 목요일 밤에 한 호텔에 온 손님이 위층에 있는 방을 달라고 하자 종업원은 “투숙할 방을 원하십니까, 투신할 방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새움출판사 간 『자살』 참조)

『할아버지 요강』 표지
고 임길택 선생의 『할아버지 요강』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었기에, 앞서 길고 지루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 간 것이다. 사실, 이 시집에 나오는 가족과 이웃 사람들, 학교 동무들은 지금 같은 시대 상황이라면 모두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다. 진저리를 치게 하는 가난은 물론 가정 폭력, 불화, 희망 없음, 외로움 등 ‘살 수 없음’ 혹은 ‘살고 싶지 않음’, ‘살기가 죽기보다 더 어려움’의 이유들이 활처럼 휜 등허리에, 발목처럼 가느다란 허벅지에, 악만 남은 듯한 팔뚝에 찰거머리마냥 질기도록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자식들과 엉켜 살아야 하기에 엄마는 볼 것을 보지 않고, 들을 말도 듣지 않아 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는 땀에 전 머릿수건을 내던지고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세상 소리에 귀를 닫은 채 밭을 간다.

우리 엄마

밭둑에 앉아 / “엄마 이 꽃 좀 봐요.” 해도 / 꽃 볼 새 어딨냐며 / 뒤도 안 돌아본다. // 엄마 눈에는 / 마늘과 그 옆의 풀들만 / 보이나 보다. // 노랑나비를 보아도 / 표정이 없고 / 무당벌레를 보면 / 징그럽다고만 한다. // 엄마는 /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 모두 떠나 산다.

우리의 엄마가 부러 꽃을 보지 않고, 나비의 날개짓을 따라가지 않고, 묵묵히 땅을 일구며 아이들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손톱 자랄 새 없이 세상과 싸워가며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의 용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화려한 실크 넥타이를 맨 신사가 아니다. 아버지는 늘씬한 승용차를 운전하며 아스팔트를 달리는 사업가가 아니다. 아버지는 위기가 닥칠 때에는 학력이나 학맥 또는 사회적 명망성을 내세워 멋지게 돌파해 나갈 ‘증’이 있는 실력자도 아니다. 아버지는 그저, 우리들의 아버지이며, 우리 엄마의 남편이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얻은 ‘증’이라고는 ‘아버지’이며 ‘남편’이다. 그래서 겸손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하여 말이 없으신 건가.


아버지

팔꿈치를 누덕누덕 기운 옷인들 / 김칫국물 배인 찬밥덩이인들 / 무엇이 어떠랴. // 유리창이 바람 막아 주는 교실에서 / 선생님 풍금 소리 따라 / 우리가 노래 부를 때도 / 그 부는 바람 온몸에 맞으며 / 쉼 없이 거름 져 내고 / 백 원짜리 담배조차 / 껐다가 다시 태우는 우리 아버지. // 묵은 빚 벗고 / 십 년 만에 장만한 사래 긴 마늘밭을 / 아침에도 저녁에도 돌아보며 / 운동장 같지 않느냐고 / 학교 운동장 같지 않느냐고 / 그 날 어머니께 묻던 말 / 우리에게도 되묻곤 하는 / 손톱 자랄 새 없는 우리 아버지.

엄마와 아버지의 소리 없는 허덕임과 절절한 하루의 고달픔에 어느새 가족은 저마다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 아이는 아침마다 손에 오줌을 묻혀 가며 할아버지 요강을 비우거나, 엄마와 함께 밭일을 하고, 장작을 패기도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낙엽처럼 말라 버린 두 손도 쉴 날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글씨를 못 읽는 할아버지는 밭풀 죽이는 농약 그라목손을 논에다 치고 온다. 할아버지는 죄인이 되어 저녁 밥상머리에서 숟가락도 못 든다. 그 바람에 온 집안에 침묵이 돌고, ‘가족수첩’ 또는 ‘행복일기’라는 곳에 오늘의 한숨과 예견되는 내일의 고단함을 식구마다 한 줄씩 채운다. 그것은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외상장부’ 책에 한 줄 채우는 것과 같다.

외상 수첩

과자 사 먹으러 / 외상 수첩 들고 간다. // 두부도 사고 / 라면도 사고 / 아버지 소주도 그거면 된다. // 어머니를 졸라 / 돈 대신 받은 외상 수첩 // 그 안에 / 깨알 같은 글씨들이 / 우리 식구 손때만큼이나 / 가득 차 있다. // 오늘 나는 거기에 / 또 한 줄을 채우러 간다.

한 가족의 외상 수첩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빚’을 진다는 것. 성경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지만 가족이라는 존재는 온통 서로에게 빚덩어리이다. 그래서 가족은 아침마다, 밤마다 서로의 눈동자를 보면서도 웃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의 등을 마주한 채 말없이 한숨을 내쉰다. 부모는 자식의 누런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괜한 야단을 치기도 하고, 자식은 부모의 퀭한 눈언저리를 피하면서 할아버지처럼 헛기침을 하기도 한다. 사랑의 빚, 그것으로 가족은 위로와 포옹의 이름 대신 분노나 화풀이, 잔소리, 혹은 침묵과 무관심 등 엉뚱한 앙갚음을 서로에게 해 대는 것이다. 빚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절망감으로 목숨을 ‘빚갚음’의 담보로 대신하기도 한다. 사랑의 빚 또한 죽음이나 삶의 좌표이기도 하다.

한 아이 눈 앞에 새앙쥐가 나타났다. 도둑고양이처럼 당당하지도 않은 새앙쥐는 어둠이 내릴 때만 눈을 껌뻑이며 슬슬 이곳 저곳을 다닌다. 그 놈을 바라보는 아이는 그 새앙쥐가 제 처지와 비슷하여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아이 역시 제 자신이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사랑이라는 빚의 채권자이거나 채무자일 거다. 그래서 아이는 비루한 몰골로 머물 자리를 찾아 바삐 움직이는 새앙쥐 한 마리를 무조건 내쫓을 수 없는 것이다.

새앙쥐

식구들 잠든 사이 / 새앙쥐 한 마리가 / 부엌으로 나왔다. // 이 추운 겨울 밤 / 무슨 사정 생겼을까. / 내쫓지 말아 달라는 듯 /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 나를 빤히 바라본다. // 그러나 새앙쥐야, / 우리 부엌엔 / 네가 가져갈 게 아무 것도 없어. / 누룽지마저 일기 쓸 때 / 내가 다 먹은걸. // 아니야, 있다. / 그래 맞아, / 어머니가 불 지핀 부뚜막이 / 아직은 따뜻할 거야. // 새앙쥐야, / 한겨울 밤 새앙쥐야, / 남은 그 불기라도 가져가렴. / 온 식구들 불러다 / 한껏 안아 나르렴.

아이는 새앙쥐를 마치 가련한 제 친구 보듯 하는 것이다.

재중이네를 보니

돈이 없으면 / 안 쓰고 // 옷이 없으면 / 기워 입고 // 쌀이 없으면 / 굶기도 하며 // 할머니와 둘이서 / 살아가요. // 가난해도 / 어떻게든 살아가요.

아이의 시선은 어수룩한 제 가족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제 주변으로 옮겨진다. 매형이 신던 양말을 기워 신는 누나, 대머리 택시 할아버지, 마을 지붕들처럼 흙먼지 뒤집어쓰고 다니는 완행 버스에 타고 오르는 이들, 달이 뜨면 서로 서로의 목소리로 꿈이 되자 하는 개구리들, 새벽 찬 이슬 내린 배추 포기 사이에서 잠든 흰나비와 밀잠자리, 손이 가늘고 목이 가는 유순이, 어른들 사정을 아직도 모른 채 오래도록 죽지 않고(?) 고무줄 놀이를 하는 순덕이, 봄 내도록 빛바랜 초록색 운동복 한 벌만 입고 다니는 종희, 집을 나간 민이네 엄마,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달려오든 꼬옥 안아 주는 선생님, 그리고……. 학교 앞의 분식집, 비디오집, 장난감 가게, 만화방, 라면집, 자전거포, 길 건너에 새로 생긴 편의점, 일찍 문을 여는 철물점 옆 오락실에서 들려오는 총 쏘는 소리, 부서지는 소리, 알 수 없는 아우성 소리들.

아이들은 아무도 관심 두지 않고 시시하다 여기지만 어느 새 수북한 고마니풀처럼 자라난다. 아이들은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날개가 흔들리는 가을 깃동잠자리처럼, 그나마 때로는 조각난 날개일지언정 바람을 피하고, 절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이들은 쉼 없이 움직인다. 아이들은 연약하지만 개구리처럼 목청껏 울고 소리 지르고 노래하며, 아침 새들처럼 젖은 날개를 퍼득이며 단번에 힘차게 날아오른다.

슬픈 것은 어른이다. 그 아이들이 노래할 때 등 돌려 앉은 채 들어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부모이다. 아이들이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할 때에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서글픈 눈동자이다. 아이들의 부러진 날개에 빨간약을 발라 주는 것 말고는 다른 치료 처방을 할 수 없는 가난한 두 손이다. 아이들의 키가 자라고, 머리가 커지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말 외에는 들려줄 인용구가 없는 부끄러운 입술이다. 아이들의 가슴이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시퍼런 멍이 들어도 나도 그렇게 살았단다 하며 고개를 떨구어야 하는 허수아비 같은 뒤통수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

사람이 베어 넘기기에 / 너무 나이가 들어 버린 나무는 / 밤이면 울곤 한단다. // 달빛을 안고도 울고 / 별빛을 안고도 울고

임길택 선생은,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아직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우는 것들의 동무가 되어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왜 이 글을 연재하는 당신의 글은 언제나 징징대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빤히 그네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속으로만 중중거린다.

아이들의 저 울음 소리가 안 들립니까? 도대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까?
노경실 /『중앙일보』(동화)와 『한국일보』(소설)로 등단하였습니다. 출판 일을 하면서 열심히 글을 쓰고, 시시때때로 그림책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권의 장편 소설과 많은 동화책을 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반 고흐와 체 게바라와 로알드 달 그리고 희진이와 현호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