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통권 제24호
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열린어린이 책 여행
열린 주제 열린 글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그림책 주인공이 내게 말하길]
빈 손으로 외치는 행복

이상희 | 2004년 11월

행복을 원하고 구하는 것. 그것을 나는 꽤나 오랜 동안 멸시하고 조롱해 왔다. 어쩐지 치열하게 사는 삶의 반대편에 걸려 있는 모토 같았으며, 지나치게 소박하거나 옹졸한 소망 또는 불우한 세계를 저버리는 비겁한 희망쯤으로 여겼다. ‘행복’이 결코 ‘안일’이나 ‘자기 만족’이 아니라는 것,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미래 긍정형 개념이라는 걸 언제 깨달았을까. 아마도 내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면서, 그 아이의 친구들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아이가 함께 행복하길 바라면서, 그러기 위해 나 또한 행복하길 바라면서였을 것이다. 『행복한 왕자』 『행복한 사자』 『행복한 청소부』 『행복한 하하호호 가족』 『행복한 눈사람』 『행복한 돼지』 『행복한 마시로』 『행복한 크리스마스』 『행복한 하마가 되는 비결』 『행복한 한스』 『행복한 미술관』……. 그림책에 ‘행복한’이라는 형용사가 포함된 제목이 많은 것 또한 아이들의 생이 긍정적으로 출발되길 바라는 기성 인류의 바람이리라.

『행복한 한스』 표지
『행복한 한스』는 그림 형제의 동화를 재화 그림책으로 즐겨 만들어 온 펠릭스 호프만의 작품이다. 판권을 살펴 보니 독일에서 원서가 출간된 것이 작가가 세상을 떠난 1975년이란다. 작가가 생의 마지막 성찰 또는 결론적 메시지를 담은 만년의 작품일까? 아니면, 일찌감치 만든 작품이지만 어떤 이유로 묵혀졌다 작고하던 해에 나온 것일까? 작가는 출간된 책을 보고 나서 세상을 떠났을까? 대단찮은 궁금증은 눌러둔 채 고수머리 벌렁코에 잇새가 벌어진 얼굴, 한눈에도 좀 모자라 뵈는 한스가 멋진 말을 타고 웃고 있는 표지를 열어 보자.

어머니 품을 떠나 7년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 온 한스가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주인이 후하게도 한스 머리 크기의 금덩이를 품삯으로 건넨다. 금덩이를 보자기에 싸들고 길을 떠난 한스는 얼마 안 가서 금덩이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어깨에 올려도 보고, 옆구리에 끼어도 보고, 두 손으로 모아 들어 보기도 하지만 금덩이가 짐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 때 마침 편안히 말을 타고 가는 신사와 마주치고선 신사의 처지를 부러워하는데, 뜻밖에도 신사가 순순히 말과 보따리를 바꾸자 제의하고는 말에서 내린 다음 한스를 손수 올려 태워 주더니 보따리를 들고 떠난다(보자기 속의 물건이 금덩이라는 걸, 신사는 알았을까. 알았을 만큼 세상 경험이 많은 얼굴이기도 하고, 모르는 채 넉넉히 베풀기 좋아하는 얼굴이기도 하다).



한스는 금덩이 짐에서도 해방됐을 뿐더러 말을 타고 단숨에 집에 가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가눌 길 없어 호기롭게 ‘이랴!’ 소리를 치며 말 옆구리를 차 본다. 그러나 고삐를 허술하게 잡은 한스 탓인지, 새 주인을 얕잡아 본 말 탓인지, 말이 크게 날뛰는 바람에 한스는 도랑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다행히 맞은 편에서 소를 몰고 오던 농부가 말을 잡아 줬지만 이제 한스는 또다시 말을 타고 싶은 마음을 접은 채, 마음대로 날뛰지도 않고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우유랑 버터도 얻을 수 있”는 농부의 소를 가졌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기 바람대로 말과 소를 바꿔 갖고는 휘파람을 불며 기쁘게 길을 떠난다.



그러나 막상 목이 마른 한스가 모자를 벗어 들이대고 젖을 짜려들자 너무 늙은 소는 젖을 내놓지도 않을 뿐더러 성가시게 구는 한스를 호되게 걷어차고 만다.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어쩔 줄 모르던 한스는 푸줏간 주인이 돼지를 끌고 지나가는 걸 보고 이번엔 돼지 갖기를 소망한다. 말에 비해 훨씬 만만해 보이면서 고기랑 소시지까지 내 줄 수 있는 돼지! 그러나 이 돼지도 결코 만만치 않게 속을 썩인다. 갑자기 네 다리를 딱 버팅기고 서서 꿈쩍 않더니 급기야 바닥에 드러눕고 마는 것이다. 돼지가 일어나기만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던 한스는 한 소년이 거위를 옆구리에 끼고 다가오자 이 골칫덩이 돼지를 깃털도 고기도 주는 거위랑 맞바꾸곤, 칼을 갈면서 신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을 맞닥뜨린 김에 칼 가는 숫돌 둘과 거위를 다시 맞바꾼다.



양손에 하나씩 숫돌을 들고 길을 가던 한스는 우물이 나오자 진작부터 시달리고 있던 갈증을 끄려고 걸음을 멈춘다. 우물가에 숫돌을 놓고 시원하게 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허리를 펴다가 숫돌을 잘못 건드려 우물에 빠트리고 만다. 그러자 챙기고 나를 짐이 없어진 게 기쁘고 기뻐서 깡충깡충 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소리치고는, 저 멀리 어머니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집을 향해 달려간다.

7년 세월의 고된 노동의 대가인 금덩이를 말로, 말에서 소로, 소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거위로, 거위에서 숫돌 두 개로, 숫돌 두 개에서 물 한 모금으로 바꾼 한스의 거래는 누가 봐도 분명 실수투성이의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니, 한스가 빈 손이 되고도 그처럼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외치는 것은 첫 인상과 마찬가지로 좀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책을 넘기는 방향으로 계속되는 한스의 여정을 따라 온 ‘모자라지 않은’ 독자에게도 ‘한스의 행복’은 적잖은 공감을 준다.


(공감을 주리라 믿고서 유치원생, 초등생 등 여러 연령대 아이들에게 읽어 준 다음 특별히 이 마지막 장면의 기쁨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치원생 중 몇몇은 큰 재산을 잃은 한스가 너무도 안쓰러워서 마지막 장면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채 걱정스런 얼굴이 되기도 했고, 초등학교 4학년들 중 몇몇은 화를 내기까지 했다. 심지어 한 아이가 “바보 같은 녀석! 이제 자기 엄마한테 엄청 혼날 거야. 금 덩어리를 잃어버렸으니 죽도록 매를 맞겠지!” 하고 중얼거리는 바람에 그야말로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내 마음도 복잡해져버렸다. 허겁지겁 “어쨌든…… 좋아, 우리 모두 다 함께 소리쳐 보자. 한스처럼!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 그렇게 어거지로 거듭 거듭 함께 소리를 지르고서야 사태가 수습되었다.)

한스처럼 금덩이의 가치를 모르는 ‘모자라는 인물’은 옛이야기 속에 수두룩하다 ― 우리 옛이야기에도 숯막 안이 온통 금인 것을 모르고 살던 가난한 숯쟁이 총각이 똑똑한 색시 덕에 부자가 된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금덩이의 가치를 모를 뿐만 아니라 한스는 말의 가치, 소와 돼지와 거위의 가치도 잘 모른다. 그저 그것들과 수월히 길을 가고 원할 때 먹을 것을 좀 얻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소망을 따를 뿐이다. 그것들을 자꾸 바꿔 대는 것도 다름 아니라 제 생각과 다르게 구는 탓에 어이없고 속상해서 얼른 다른 대체물 쪽으로 마음을 옮기는 것일 뿐이다. 온몸을 내던지듯 놀잇감 하나에 집착하다가도 금세 새로운 것에 마음을 앗기는 아이들의 본성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스는 환금 가치에 관심이 없다. 펠릭스 호프만이 주인에게 금덩이를 받는 한스를 그린 첫 장면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금덩이 쪽으로 갈 법한 눈길을 주인 쪽으로 향하게 그린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한스에게 말이라면 올라타고 이랴 소리칠 수 있는 것이고, 소라면 우유와 버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돼지라면 고기와 소시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거위라면 깃털과 고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숫돌이란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칼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없어서 더욱 좋은 것이요, 없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펠릭스 호프만의 ‘행복한 한스’는 내게 말한다.

“나의 행복은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안기는 것. 그러니 집까지 빠르게 달려가 줄 수 있는 말을 빼고는 애초에 무엇이든 들고 끌고 가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지요. 마침내 두 손과 두 팔이 자유로워지자 몸 가뿐히 달려가서 어머니를 껴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도 기뻤어요. 누가 뭐라든 내겐 그것이 행복이랍니다.”
이상희 / 부산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시와 그림책 글을 쓰면서 외국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책 『외딴 집의 꿩 손님』 『고양이가 기다리는 계단』 등과 어른을 위한 동화 『깡통』을 펴 냈고, 『심프』『바구니 달』『작은 기차』 등 영미권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 읽어 주는 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 살면서 토지문학공원에 꾸민 그림책 도서관 ‘그림책 버스 패랭이꽃’과 원주 평생교육정보관의 ‘어린이 그림책 교실’을 이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