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통권 제25호
겨울 방학 권장 도서
특별 원고
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열린어린이 책 여행
열린 주제 열린 글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 주제 열린 글

[선생님과 나누어요]
모두가 지고 있는 십자가

배성연 | 2004년 12월

초등학생들에게 글쓰기와 논술 지도를 하는 일을 시작하고 8개월쯤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다른 선생님들이 손사래를 치며 하나같이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내가 맡고 있는 지역의 학생이라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그 집으로 갔다. 학생의 성격이 괴퍅하거나 어머님의 요구가 복잡한 집이려니, 그래도 해 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그 아이의 집을 찾아갔다.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시는 어머니 뒤에 숨은 아이. 입을 열지 않던 아이는 어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은 상태였다. 더구나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생긴 일이어서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보청기를 하고 있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을 해 줘야 겨우 상대방의 말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상대방의 입 모양을 자세히 보고서야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다고 했다. 하루 종일 아이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치며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아이는 무척 영리하고 순진했다. 글로 표현하기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더 좋아하던 아이. 그 아이와 함께 수업을 할 때는 다행히도 대학 시절 조금 배워 놓은 수화가 유용하게 쓰였다. 그 아이와의 수업을 매주 진행할 때마다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오히려 많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말은 서툴렀지만 가족들에게 살뜰히 대하는 것이며, 그림을 잘 그려 이런 저런 상을 타오는 것이며, 남들보다 공부하기가 몇 배는 힘들 텐데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며 모든 것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 표지
그 아이를 만나면서 느낀 성취감을 비롯하여 내가 느낀 모든 감정들을 다른 아이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독서 토론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읽게 된 책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었다. 이 책은 뇌성마비인 형과 그런 형을 바라보는 동생을 비롯한 가족의 이야기다. 뇌성마비에 걸린 종식이는 집안 형편으로 어릴 적부터 할머니 댁에서 자라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부모님 곁으로 오게 된다. 동생 종민이는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형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형은 뇌성마비에 걸려 밥도 지저분하게 먹고 걷지도 못해서 종민이는 불만이 많았다. 엄마와 아빠의 관심이 온통 형에게 쏠려 있는 것도 종민이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형과 식구들이 싫어 가출도 해 보지만 결국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종식이는 종민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뇌성마비가 아니었다. 장애가 있음에도 컴퓨터를 잘 다루고 책도 많이 읽는 영리한 아이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게 된다. 장애인들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무상으로 회사에 팔기도 하고, 장애인 수기 쓰기로 대상을 타기도 한다. 그런 형을 보면서 종민이는 형이 자신보다 몸이 불편하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함께 읽은 아이들 대부분이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장애를 갖고 태어났거나 사고로 불편해진 친구들을 많이 도와야겠다는 말도 많이 했다. 생각의 깊이가 느껴지는 아이들의 다양한 감상을 듣고 싶었는데 막연하고도 똑같은 대답뿐이었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 본문
그런데 이 책을 읽고 토론하던 아이 중에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를 너무도 솔직하게 해서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의 형은 교통 사고로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이 책을 선정하여 읽고 토론하기까지 아이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형의 장애가 그 아이에게는 창피하고 불쾌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종식이나 그 가족들은 동화책의 주인공들이니까 전부 잘 되는 것이고 행복한 것 아닌가요? 우리 형은 다리도 병신이면서 공부도 못하고, 컴퓨터도 못하는데……. 우리 부모님은 형만 보면 한숨 쉬시는데…….” 아이의 이 말에 나는 독서 토론을 통해 마음을 보듬어 주기는커녕 상처만 주게 된 건 아닌가, 이 아이의 형과 가족들의 관계를 더 나쁘게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분명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가족이 종식이와 종민이 가족처럼 되지 못하는 현실에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이 책을 굳이 읽게 만든 나까지도 원망했을지 모른다. 나는 종식이 할머니가 종식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종식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단다. 저 들판의 작은 들풀과 꽃, 하늘에 맴도는 하루살이 벌레도 다 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있단다. 종식이의 장애는 종식이의 십자가야.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거란다. 이왕 지는 십자가라면 기쁜 마음으로 지겠니, 슬픈 마음으로 지겠니?”

아픔과 가슴저림도 모두 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는 것을 아이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또 이 아이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 너무도 다른 이야기를 읽는 내내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 후, 소리를 듣지 못해 집 밖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결코 바깥 세상과 벽을 쌓고 살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그 아이와 이 아이가 만났다. 함께했던 시간 동안 의사 소통이 쉽지는 않았지만 참 즐거웠다. 그렇게 즐거운 기억을 남기고 두 아이를 한동안 잊고 지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다른 지역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형의 장애로 마음 불편해하던 아이에게서 이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 본문
“선생님, 선생님과의 마지막 수업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이 저번에 주신 책이요. 『아주 특별한 우리 형』하고 그밖에 골라 주신 책이요. 그거 방학 동안 형이랑 읽었어요. 그리고 독후감 써서 우리 형이 학교에서 최고상도 받았구요. 우리 형이 교단에 올라가서 상도 받고 독후감도 읽었어요. 얼마 전에는 엄마랑 아빠한테도 그 책 읽어보라고 드렸어요. 십자가 얘기 나오는 부분에 빨간 줄까지 그어서 드렸어요. 아직 우리 형이 종식이 형처럼 훌륭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전보다 좋게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중이에요. 우리가 끝까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면 웃으면서 지고 가야겠죠? 종석이네 할머니가 하신 말씀처럼요. 형도 저도, 우리 엄마 아빠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고 믿으려고요. 선생님 다른 애들하고도 재미있게 수업하세요.”

이 편지를 확인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묻어났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만들고 희망을 찾게 하는 일만큼 어렵지만 뿌듯한 일이 또 있을까. 세상 아이들이 너무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세상이 왔으면 하고 바란다. 가슴 따뜻한 동화와 따뜻한 체험이 함께 한다면 아이들은 분명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배성연 / 한동안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글짓기와 논술을 가르쳤습니다. 현재는 동화와 소설을 습작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손자, 손녀들에게 멋진 동화를 읽어 주고 싶습니다. 손자, 손녀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 주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