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3월 통권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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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읽는 풍경]
어린이의 삶 속에서 숨쉬는 전통 문화 그림책

서정숙 | 2005년 03월



한국의 그림책은 1990년경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번역 그림책이 소개되다가 이제 창작 그림책의 수도 많이 늘었다. 물론 아직은 번역 그림책이 훨씬 많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림책 작가군(群)’이 형성되고 있고 그림책 관련 이론서들도 여럿 나올 만큼 한국의 그림책 세계는 발전하고 있다.

특히 2004년은 볼로냐 라가치 상 픽션 부문(『팥죽 할멈과 호랑이』)과 논픽션 부문(『지하철은 달려온다』)의 상, 그리고 에스파스-앙팡 도서상(『동강의 아이들』)을 받는 등 우리 그림책의 우수성이 세계에서 크게 인정받은 한 해였다. 2005년 들어서는 볼로냐 도서전 논픽션 부문에서 한성옥과 최숙희 작가가, 픽션 부문에서 박철민과 이수지 작가 등이 초대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물론 그 동안 일본 노마 콩쿠르나 슬로바키아의 BIB(블라티슬라바 그림책 비엔날레) 등에서 수상한 강우현 등 우리 그림책 작가들, 그리고 2002년과 2003년에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우수 그림책’에 선정된 『노란 우산』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등이 우리 그림책의 세계화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본 글에서는 지금의 시점을 한국 그림책의 새로운 도약기로 보고, 앞으로 한국 창작 그림책이 나갈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특히 본 글에서는 그림책을 문화가 담긴 매체로 보고, 그 동안 창작 그림책에 문화가 담긴 양상은 어떠하며, 앞으로의 그림책에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어떻게 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책에는 문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된다. 그림책에 문화가 반영되는 양상에 따라 그림책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고유형, 절충형, 보편형이라 이름 지을 수 있다.

첫번째로 고유형의 그림책이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가 다른 문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또는 다른 문화에서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은 그림책을 말한다. 해당 문화권의 명절, 풍습, 이야기, 위인, 조상, 생활 양식 등을 표현하는 그림책이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림책들은 주제 자체가 특정 문화 고유의 성격을 드러내므로 등장 인물이나 배경에 문화적 요소, 즉 의상이나 가옥, 외모 등이 자연스럽게 반영된다. 그러므로 고유형의 그림책에는 다른 유형의 그림책들보다 고유의 문화적 색채가 강하게 반영되며, 대체로 전통 문화를 담은 그림책이 이 유형에 속한다.

『숨쉬는 항아리』 본문 중에서
예를 들면 『솔이의 추석 이야기』나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처럼 명절을 표현한 그림책이나, 『똥떡』이나 『야광귀신』처럼 풍습을 표현한 그림책, 『마고 할미』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자장 자장 엄마 품에』처럼 신화나 민담, 전래 동요를 담은 그림책,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 『으악, 도깨비다!』 『아무도 모를거야 내가 누군지』처럼 한국 고유의 명물인 삽사리, 장승, 탈을 소재로 한 그림책, 『그림 그리는 아이 김홍도』처럼 조상을 표현한 그림책, 『아씨방 일곱 동무』나 『숨쉬는 항아리』처럼 의식주의 생활 양식과 관련된 그림책이 고유형의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로 절충형의 그림책이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는 보편적이지만 그 주제를 드러내는 데 사용한 등장 인물이나 배경에 그 문화가 갖고 있는 고유의 성격이 반영된 그림책을 말한다. 또는 반대로 그림책의 주제는 고유한 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면서 이에 대한 표현은 보편적인 방식을 취한 그림책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던 강아지 똥이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으로 거듭나는 『강아지 똥』, 벌레들의 이합집산에 의한 놀이가 펼쳐지는 『씹지않고꿀꺽벌레는 정말 안 씹어』, 엄마를 기다리는 남매의 모습을 담은 『동강의 아이들』, 역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엄마 마중』, 이전에 살던 동네에 대한 추억을 담은 『나의 사직동』, 식구들이 없는 사이에 일어난 토끼의 놀이 장면을 담은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엄마의 심부름을 갔다가 다른 것에 정신을 팔다 돌아온 『넉 점 반』 등은 그림책의 주제는 보편적이지만 그림책 속에 나타난 등장 인물이나 배경, 소품은 한국의 문화적 특성을 담고 있는 절충형의 그림책이다.

세번째로 보편형의 그림책이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도 보편적이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고유의 문화적 요소도 최소화되어 있는 그림책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그림책에는 특정 국가나 문화적 고유성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등굣길에 늘어선 우산의 행렬을 담은 『노란 우산』, 서로 소통 방식이 다른 개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담은 『왈왈이와 얄미』, 그리고 동물원의 환상의 세계에서 동물들과 즐겁게 놀이를 하고 돌아오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동물원』과 같은 그림책이 보편형의 그림책에 속한다.




그 동안의 한국 창작 그림책들을 살펴보면, 고유형의 그림책이 가장 많은 것 같다. 특히 초기 창작 그림책 중에는 고유형의 그림책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고유형의 그림책들은 대체로 한국의 우수한 전통 유물이나 선조들의 지혜, 또는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자 하는 그림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책에서 자국의 고유한 문화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그림책의 초기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도서관협회인 ALA(American Library Association)에서 1938년부터 영국의 그림책 작가인 칼데콧의 이름을 따서 매년 최고의 그림책 한 권을 선정하여 주는 칼데콧 메달을 예로 들어도 알 수 있다. 초기 칼데콧 메달 수상 작품들인 Animals of the Bible, A Picture Book (성경의 동물들-그림책, 1938년 수상), Mei Li (중국 아이의 이야기, 1939년 수상), Abraham Lincoln (에이브라함 링컨, 1940년 수상), They Were Strong and Good (그들은 강하고 선했다, 1941년 수상) 가운데 Mei Li 를 빼면 세 그림책 모두 미국을 이루고 있는 종교와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미국민의 정체성을 밝히고자 한 그림책들이다.

『넉 점 반』 본문 중에서
물론 한국 문화의 고유성 또는 한국 전통 문화의 특성이 두드러진 고유형의 그림책은 어린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은 정체성과 주체성의 확립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 더 한국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깊이 공부한 작가들에 의한 다양한 고유형 그림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절충형 그림책과 보편형의 그림책 또한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고유형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가 반영되는 방식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만큼 그림책을 매개로 하는 소통의 범위가 넓어져 현대의 어린이나 다른 나라의 어린이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유형 그림책의 창작에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유형의 그림책은 대부분 과거의 유물, 과거의 이야기, 과거의 사람 등 과거의 한 지점과 관련된 것을 다루므로 자칫 잘못하면 지금의 어린이들의 삶과는 유리된 그림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책 속 전통 유산이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것에 대한 화석화된 이미지에 그친다면, 그것은 어린이의 흥미나 호기심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어린이 삶 속의 실제적인 의미로 작용하지도 못할 것이다.

전통 문화를 담은 고유형의 그림책이 어린이들의 ‘삶’과 관련되기 위해서는 예를 들면, 그림책 속의 어린이가 전통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이해하게 하거나 전통 문화가 어린이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린이들 스스로 통찰할 수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 또한 그림책 속에 어린이가 반드시 포함되지 않더라도, 그림책의 전통 문화가 현재 어린이의 생활, 감각, 놀이, 생각, 고민, 의식주 등의 요소들과 관련된 채 다루어진다면, 어린이들은 전통 문화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주는 지혜와 아름다움, 우수성을 좀 더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부모나 조상의 물건이나 정신이 지금의 내 생활에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세대 간의 연속성을 보여 주는 그림책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 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림책은 하나의 문화이다. 문화란 당대 사람들이 향유하는 삶의 방식이고, 그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림책은 이 시대,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을 담아 놓은 문화인 동시에, 그것을 사이에 두고 세대 간에 또는 또래 간에 대화를 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해 주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 주는 문화의 장이자 우리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통로이다.

그리고 문화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정해진 실체가 아니다. 전통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문화는 현재의 전통이 되고, 현재의 문화는 다시 미래의 전통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통이던 것이 사라져 없어지기도 하고 묻혀 있던 것이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통 문화를 담은 고유형의 그림책은 ‘우리 고유의 문화는 이런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고유한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그러한 전통은 지금의 내 모습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보여 주도록 노력하고, 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내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도록 노력함으로써 그림책이 한국의 새로운 전통 문화를 생성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서정숙 / 유아에 대한 공부를 통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림책에 대한 공부를 통해 삶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유아 교육을 전공하였고, 「Caldecott 메달 도서의 특성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저서로 『부모의 그림책 읽어주기』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