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3월 통권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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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주인공이 내게 말하길]
꽃 향기 속에 살다 - 여느 황소와 다른 황소 페르디난드

이상희 | 2005년 03월

혼자 지내길 좋아하는 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고교생 아들이 어느 날 한쪽 귀에 피어싱을 세 군데나 하고 들어와서는 동급생이며 선배들이 자꾸 싸움을 걸고 집적대서 그랬으니 어머니는 모른 척 해 달라더란 이웃의 얘기를 전해 듣고, 무척이나 어이없고 심란해 했던 적이 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그 기묘한 처방이 효과 만점이어서 이후로는 그 댁 순둥이 아들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는 얘기…….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 표지
나와 내 아이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과연 닥치는 대로 싸워서 이기거나 자해에 가까운 ‘접근 금지’ 경고 표지를 내걸고서야 일상의 평안이 부지되는 정글일까? 새삼 마음이 어두워지고 불편해질 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위로해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그림책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이다. 이 책은 ‘남다르다’는 것, 남다른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 나아가 남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수많은 생각거리를 안겨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수송아지 페르디난드는 꽃 향기 맡는 걸 좋아한다. 제 또래들이 ‘투우의 나라’ 소답게 거칠게 뛰고 서로 사납게 치받으며 놀 때에도 페르디난드는 언덕 저편으로 꽃 향기를 찾아 나선다. 꽃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서는 조용히 앉아 눈이 게슴츠레해지도록 꽃 향기를 즐기는 것이다. 엄마 소는 남다른 페르디난드를 걱정하지만 지혜롭게도 아들의 독특한 취향을 존중하고 취향대로 살도록 해 준다.



페르디난드가 특별히 좋아하는 꽃나무는 스페인에 흔하디 흔한 코르크 나무다. (이 그림책 곳곳에 등장하는, 가지마다 와인 병 마개 모양의 코르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나무……. 코르크라는 것이 코르크 나무 껍질을 삶아서 얻는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 그림책을 펼칠 때마다 능청스런 그림 때문에 ‘그래, 코르크 나무가 이렇구나…… 아니, 정말 그런가?’ 절반 넘게 믿고 절반 못 미쳐 의심하며 넘어갔던 필자는 이 글을 쓰느라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그것이 그림 작가의 유머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독자들이 코르크 나무를 얼른 알아보게끔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글 곳곳에서 유머를 발하는 작가 먼로 리프의 장난기가 개입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두 작가가 코르코 나무 장면을 구성해 놓고 꽤나 낄낄거렸을 거라는 생각에, 웃음을 터뜨린다. 참고로 말하자면, 참나무 과인 코르크 나무는 꽃이 봄에 피고 코르크 마개와는 아무 상관없는 열매는 9월부터 다음해 1월에 떨어진다. 100년은 보통이고 500년까지나 오래 오래 살면서 20년마다 한 번씩 코르크 용 겉껍질을 만들어 내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코르크 나무는 특히 질 좋은 코르크를 생산하는 것으로 이름 나 있다.)



투우장으로 뽑혀 나갈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코르크 나무 아래 앉아 있곤 하던 페르디난드는 어느 날, 엉뚱한 일을 겪게 된다. 제각기 별난 모자를 쓴 다섯 사내(반데릴레로들과 피카도르들과 마타도르 등 이른바 투우 관계자들)가 스페인 최대의 마드리드 투우장에 나가 싸울 거칠고 재빠른 황소를 찾으러 온 날, 누가 왔거나 말거나 여느 때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코르크 나무 아래 풀밭에 가서 막 앉으려다 뒝벌에 쏘인 것이다.

아야! 굉장히 아팠어요! 페르디난드는
콧김을 내뿜으며 펄쩍 뛰었어요.
페르디난드는 마치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 대고, 박치기를 하고,
땅을 긁어 대며 뛰어다녔어요.

사내들은 페르디난드가 엄청나게 사납고 거친 황소라고 오해하고 쾌재를 부른다. 날짜에 맞춰 페르디난드를 마드리드로 데려간다. 온 도시 사람들이 흥분해 모여든 투우장엔 이제 반데릴레로들과 피카도르들과 마타도르가 차례로 행진해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그날의 주인공 페르디난드가 들어온다.

그러나 이 엄청나게 사납고 거칠다고 소문난 황소는 정작 투우장 한복판까지 와서는 조용히 주저앉고 만다. 관중석 여기저기에 앉아있는 아가씨들이 머리에 꽃을 꽂은 걸 보고는 코르크 나무 아래에서 그랬듯 향기를 맡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러자 피가 튀고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로 요란해야 할 투우장은 썰렁해지고 만다.

페르디난드는 투우사들이 무슨 짓을 하든,
싸우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어요.
그저 앉아서 꽃 향기를 맡았을 뿐이지요.
그러자 반데릴레로들은 화가 났고,
피카도르들은 더 화가 났고, 마타도르는
너무나 화가 나서 울고 말았어요.
그의 망토와 칼로 자신을 뽐낼 수 없었거든요.

사람들은 페르디난드를 되돌려 보낼 수밖에 없다. ‘거 참, 이 녀석이 그 날 그렇게 날뛰던 그 녀석 맞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고향에 돌아온 페르디난드는 취향대로 사는 삶을 되찾는다. 코르크 나무 아래에 앉아 꽃 향기를 맡고 또 맡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 느긋하고 향기로운 생에 기대어 앉아 자못 부러운 눈길을 던지는 내게 페르디난드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처럼 나무 그늘 아래서 꽃 향기 맡으며 가만히 앉아 살도록 내버려둬 준 어머니와 가족들, 친구들에게 감사드릴 수밖에요. 특히 어머니께 고맙지요. 친구들이야 대충 따돌린 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는 내 남다른 취향까지 사랑하느라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 거예요. 이제 어딘가에 나 같은 황소가 있다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제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적잖이 위로가 되겠지요……. 황소든 사람이든 모두가 다 똑같고 똑같을 거라고 믿어 버리지 않는 것, 존재 하나하나의 취향에 고개 끄덕여 주는 것, 남에게 폐 끼치지 않도록 제 취향을 건사하는 것, 그래서 제각각 따로인 존재들이 한 세상 살면서 각자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서로를 비추고 밝히고 격려하는 것…… 그런 것을, 꽃 내음과 나 페르디난드를 떠올릴 때 함께 생각하고 바란다면 좋겠어요.”
이상희 / 부산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시와 그림책 글을 쓰면서 외국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책 글을 쓰고 번역하고 읽는 일도 좋아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림책 읽어 주는 일도 무척 좋아합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살면서 원주 평생교육정보관의 ‘어머니 그림책 교실’과 ‘그림책 버스’ 모임을 이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