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3월 통권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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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내가 만든 어린이 책]
전통 문화, 박물관에서 끌어내 신나게 즐기기

원선화 | 2005년 03월



어린이 책을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기획 팀 청동말굽과의 만남은 잊지 못할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편집부에서는 어린이 책 출판의 후발 주자였던 출판사의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어떻게 각인시킬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어린이 책 관계자나 독자의 기대에 부응할 기획안을 모색하며 문학동네어린이를 대표할 만한 시리즈 개발로 촉각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만난 것이 아동학 관련 석·박사 학위 소지자들로 구성된 어린이 책 기획 팀 청동말굽이었다.

그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매월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어린이 책의 바른 체질과 체형에 관해 다각도로 고민하고 있었다. 또 그런 과정을 통해 어린이 책의 내용 및 디자인, 제본 등 어린이 책 전반에 걸쳐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둔 상태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한 것은 기존의 정보 그림책을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스타일의 정보 그림책이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우리는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성균관대 아동학과 연구 교수였던 김민화 팀장을 비롯해 영화, 어린이 문학, 미디어,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팀원들이 털어놓는 정보 그림책의 현황과 방향 설정은 이 영역의 변화와 새로운 모델의 등장을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정보 그림책의 소비 채널을 국내에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컨텐츠까지 모색하며 향후 판권 수출 판로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의욕이 넘쳤고 생각은 야무졌다.




외래 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과 동경이 점점 심각해지자 2000년부터 단계별로 실시되었던 제7차 교육 과정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고 애호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을 중요한 교육 목표로 삼았다. 또한 문화관광부는 ‘전통예술모범학교’ 지원 예산을 책정하는 등 전통 문화 가치의 보존과 계승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한 키 워드는 단연 전통 문화였다.

잠재적으로 고려되었던 수십 가지 항목 가운데 교과서와 참고서에서 깊이 다루지 않았으되 수요자가 기대할 만한 항목들을 일차로 뽑아 시리즈를 구성하였다. 이후 학계의 연구 실적 부재와 시각 자료를 구할 수 없는 항목들을 제외하는 단계를 거쳤다. 어린이 책이기에 더더욱 탄탄한 연구 실적과 눈으로 확인 가능한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최종 선택된 항목도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하며 원고를 전면 수정하기도 하고, 아이템 자체를 바꿔 첫 단추부터 다시 끼우는 과정을 거쳤다.

무엇보다 문제가 된 것은 몇백 년 전의 문화를 어떻게 쉽고도 낯설지 않게 오늘의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즉 책의 꼴과 구성이라는 부소재 선택이었다. 이에 대한 해답은 기획 팀과 편집 팀, 디자인 팀이 수십 차례의 논의 과정을 통해 차근차근 방향을 잡아 나가야 했다. 청동말굽은 여러 해 동안 그림책 분과 활동을 통해 어린이의 발달 단계와 특성에 따른 그림책의 수용과 이해에 대해 탄탄한 데이터 베이스를 갖추고 있었고, 정보책이 가진 문학성과 예술성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또 팀원 중에는 어린이 그림책 실무를 아는 어린이 책 출판 경험자가 있어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전통 문화 즐기기’ 시리즈가 기존 정보 그림책의 장단점에 대한 검토 위에서 기획된 만큼, 책으로서의 재미가 부족하고 정보만 빼곡하거나 반대로 숙제 도우미용 지식 사전 같은 포맷은 애당초 지양해야 했다. 그에 따라 정보량을 조절하고, 정보와 이야기 어느 쪽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일러스트레이션의 방향을 결정하고, 디자인으로 확실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 관건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백과 사전처럼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정보 분량이 방대하지 않고, 그림책처럼 재미있는 책, 말 그대로 정보를 즐기는 ‘즐기기’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정보량 조절은 원고 집필 단계부터 편집 과정 내내 꾸준히 논의된 문제였다. 이렇게 총 열 권으로 기획된 ‘전통 문화 즐기기’ 시리즈는 2002년부터 차례대로 선을 보였고, 독자들의 격려와 따끔한 지적 속에 현재 모두 여섯 권의 책이 출간되었으며, 네 권을 남겨놓은 상태다.


토속 신앙을 미신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 밑바탕에 자리한 고유한 민족성과 연결시킨 『지킴이』, 임진왜란 격전, 한산도 대첩을 배경으로 당대의 무기와 전술을 조명한 『바다 전쟁 이야기』, 경복궁 곳곳을 둘러보며 궁궐 건축의 미와 각 건물의 쓰임새, 그와 더불어 왕의 하루 일과를 흥미롭게 소개한 『경복궁에서의 왕의 하루』,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온 마을 사람들이 단결하여 행했던 『대동놀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치르는 전통 통과 의례를 시간 순으로 담은 『나이살이』, 옛 지도의 아름다움과 지도 제작 방법, 제작 기관을 소개한 『세상을 보는 눈, 지도』가 그것이다.



여섯 권이 출간되기까지 햇수로 4년, ‘전통 문화 즐기기’ 시리즈의 출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편집부에서 할 일은 무엇보다 이 시리즈가 제대로 발아해서 개화할 수 있도록 토양을 마련하고 양분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어린이 책의 편집과 양질의 일러스트레이터를 동원하는 데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기성 작가보다 신진 작가를 활용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림책의 생리에 어두운 이들과 하는 작업인 만큼 고생을 자초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그들을 컨트롤하여 양질의 그림을 뽑아 내겠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더욱이 편집부원 중에 그림에 밝은 미술 전공자가 있었고, 그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몇몇 화가와 회화과 출신의 광고 일러스트레이터를 개별 접촉했다. 그리고 시안을 받아본 결과, 장면 연출력이며 표현력이 신뢰할 만했다.

각 정보 그림책을 맡을 일러스트레이터가 정해지자 기획 팀, 편집 팀, 일러스트레이터들과 함께 여러 차례 편집 회의를 했다. 여기서 개괄적인 시리즈의 성격과 방향, 일러스트 작업 시 고려할 점, 그리고 편집부와의 진행 일정 같은 정보를 공유했다.

‘전통 문화’에 관한 것인 만큼 동양화가 적합하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다양한 회화 기법을 도입하여 재료가 주는 시각적인 감동도 고려했다. 시리즈 가운데 『경복궁에서의 왕의 하루』 『바다 전쟁 이야기』가 서양화 스타일이고, 『지킴이』 『나이살이』 등이 동양화 스타일이다. 그리고 한 권의 책 안에서도 그림 스타일을 다르게 했다. 즉 ‘이야기 그림’이 자유분방한 화면 구성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꾀했다면, ‘정보 그림’은 각 정보를 세밀화로 꼼꼼하게 묘사하여 정보로서의 가치를 높인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리드미컬하게 혼합되면서, 보는 즐거움과 읽는 재미를 동시에 주는 색다른 정보 그림책으로 속속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작업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차 편집 회의에서 힘차게 출발했던 몇몇 일러스트레이터가 불가피하게 교체된 것이다. 정보를 강조한 세밀화냐?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삽화냐? 하는 가중치의 문제에 대한 이견, 정성껏 그린 그림의 수정 요구에 대한 불만 등이 겹쳐 새로운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투입되면서 작업은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책이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원고 집필과 수정, 화가에게 전달, 그림책의 형식과 구성 이해시키기, 이야기 그림과 정보 그림에 대한 자료 수집, 각 장면 스케치, 스케치한 그림의 검토와 수정, 채색 작업, 두세 차례에 걸친 검토와 수정 작업,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토대로 감수자의 감수 과정, 다시 그림 수정 과정을 일일이 거쳐서 한 권의 완성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흠집과 아쉬움의 여운은 길었다. 첫 책 『지킴이』는 여러 차례 회의와 감수를 거쳤음에도 미처 생각지 못한 삽화의 정교성에 대한 문제점으로 1판을 회수하고 2판을 찍는 난항을 겪기도 했다. 또 3년 전에 기획된 『세상을 보는 눈, 지도』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책이 나온 뒤에 출간되는 바람에 공들인 만큼 주목받지 못한 점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이런 경험들이 다음 책을 만들 때 더욱 신중을 기하게 했다는 점에서 약이 되었고, 외적으로는 ‘전통 문화 즐기기’ 시리즈가 지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해외 출판사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한편, 꾸준히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으며 문학동네어린이의 고유 브랜드 구축에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책을 만드는 동안 발목을 잡았던 문제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관련서마다 전통 문화 정보가 조금씩 달라 어느 것을 표준으로 삼을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잘못된 정보로 헛되이 발품과 말품을 팔고 난 뒤의 허무함, 자료 협조를 위해 공문을 띄운 박물관마다 ‘No’라는 대답이 들려왔을 때의 초조함이라니……. 그래서 때론 없는 자료를 찾기 위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가 혼쭐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자료의 빈곤 속에서 전통 문화를 우리 어린이들에게 하나하나 소개하는 한편, 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자료를 제시해 줄 수 있는 책을 펴내는 뿌듯함으로 작은 위안을 삼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혼란한 정보 속에서 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서울대 국사학과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한영우 서울대 명예 교수가 적극 동참하여 감수하였기에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험난해 보이기만 하던 고개를 겨우 넘어선 기분이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앞으로 나올 책들을 가늠해 본다. 옛 사람들의 삶터이자 오락 장소, 교역 장소였던 장터를 하루 동안 돌아보며 시장에 모여든 온갖 사람들과 물품들을 소개한 ‘장날 이야기’, 삼국 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 악기를 명주실, 대나무, 박, 흙, 가죽, 쇠붙이, 돌, 나무 등 자연에서 얻은 여덟 가지 재료를 통해 분류하고 특징을 살펴본 ‘전통 악기’, 우리네 음식의 종류와 재료 및 만드는 방법과 기구들을 할아버지 회갑 잔치를 통해 알아본 ‘전통 음식’, 그리고 왕실과 반가, 평민들의 교육을 짚어 본 ‘교육 제도’ 등 아직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전통 문화 즐기기’ 시리즈의 완간으로 우리 어린이들은 박물관 속의 죽은 유산이 아닌 펄펄 살아 숨쉬는 우리 전통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날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도서관으로, 박물관으로 공문을 띄운다.
원선화 / 어린이 책을 만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편집부 식구들과 더불어 파주 어느 산자락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참이지만 가르쳐 주는 것보다 배우는 게 많습니다. 어제 만든 책은 스테디 셀러, 오늘 만든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을 위한 양서를 내는 출판사로 문학동네어린이가 자리매김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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