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3월 통권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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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어린이 책 읽기]
『수일이와 수일이』의 환상성과 현실성(1)

이지호 | 2005년 03월





『수일이와 수일이』(김우경, 우리교육, 2001)를 이야기하려면 이에 앞서 ‘쥐좆도 모른다’ 유형의 옛이야기를 먼저 이야기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수일이와 수일이』는 바로 그 ‘쥐좆도 모른다’ 유형의 옛이야기에서 환상성의 실마리를 마련한 동화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유형에 속하는 옛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을 읽어 보면, 『옹고집전』이 머리 속에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옹고집전』은 바로 이 ‘쥐좆도 모른다’ 이야기를 소설로 꾸며 놓은 것이다.

옛날에 한 영감이 있었는데, 이 영감은 손톱 발톱을 깎아서는 아무 데나 버렸다. 그러면 그 집에 사는 쥐가 나와서 그 손톱 발톱을 먹었다. 여러 해 동안 영감의 손톱 발톱을 먹은 쥐는 영감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으로 변했다.

하루는 영감이 사랑방에 의관을 벗어 놓고 뒷간에 갔는데, 그 사이에 쥐가 변한 영감이 사랑방에 들어가 그 의관을 입고 집주인 행세를 하였다. 뒷간에서 돌아온 영감과 쥐가 변한 영감은 서로 자신이 주인이라면 싸움을 벌였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사랑방의 소란에 놀란 식구들이 모두 나와 보았지만 누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식구들은 집안의 살림살이를 물어 보아서 진위를 가리기로 했다. 그런데 진짜 영감은 자세하게 아는 것이 없었고, 가짜 영감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진짜 영감은 쫓겨났다.

빌어먹고 다니던 진짜 영감은 시집간 딸을 찾아가서 앞뒤 사정을 이야기했다. 딸은 삼족구(三足狗)를 가지고 친정에 갔다. 먼저 사당에 가서 절을 하고는 안방으로 가서 영감을 불러들였다. 영감이 방에 들어오자 삼족구를 내놨다. 삼족구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영감을 멱살을 물었다. 영감이 죽자 큰 쥐로 변했다. 이것을 본 식구들은 모두 놀랐다.

어머니는 배가 불러 있었다. 그 배를 따 보니 쥐의 새끼가 여러 마리 나왔다. 딸은 이것을 보고, “그래, 어머니는 쥐좆도 모르고 지냈소?”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했다. 이때부터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쥐좆도 모른다”고 하였다.

(「괴서(怪鼠)」, 임석재, 『한국구전설화』 전북편Ⅰ, 평민사, 1990, 209~210쪽 요약)


각 편에 따라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쥐가 도습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다양하다. 그러나 장가들러 온 새신랑이나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들어 절로 공부하러 간 외아들처럼 아내가 있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쥐를 물어 죽이는 동물로는 대부분의 각 편에서 늙은 고양이를 내세운다. 그리고 쥐의 도습에 의한 변고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내는 인물은 스님이나 도사인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인용한 각 편에서는 시집간 딸이 그 역할을 떠맡고 있는데, 이것은 조금은 어색한 인물 설정이다.

한편, 쥐의 아내 노릇을 한 어머니 또는 아내의 임신 여부는 각 편에 따라서 밝히기도 하고 밝히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쥐좆도 모른다’라는 말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에피소드인데, 이 에피소드를 생략한다 하더라도 그 말의 속뜻이 왜곡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어머니 또는 아내의 임신을 처리할 때 배를 가르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각 편은 드물다. 어머니 또는 아내가 홑치마만 걸친 채 펄펄 끓는 기름의 김을 아랫도리에 쐬어서 쥐의 새끼가 저절로 빠져 나오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옛이야기는 전승 과정에서 그 내용이 순화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일이와 수일이』 표지
『수일이와 수일이』는 ‘쥐좆도 모른다’ 이야기가 껴안고 있는 환상의 모티프 가운데 어떤 것은 수용하고 어떤 것은 변형시키고 또 어떤 것은 전복시켰다. 사람의 손톱 발톱을 먹은 쥐는 그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뀐다는 모티프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수일이와 수일이』는 이 모티프를 단순히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전복시켜서 새로운 모티프를 창안하기도 했다. 즉, 쥐의 손톱 발톱을 먹은 사람이나 동물을 그 쥐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된 쥐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역할은 야생성을 회복한 고양이에게 맡겼다.

『수일이와 수일이』의 수일이는 자기 의지에 따라서 겉모습이 자신과 똑같은 가짜 수일이를 만들어 냈다. 노는 것은 자신이 하고 공부하는 것은 가짜 수일이에게 시키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수일이가 스스로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짜 수일이가 사람의 속내를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수일이 대신에 공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고, 사람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자신에게 공부하는 것을 떠넘긴 수일이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일이의 곤경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쥐좆도 모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정이 다르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한 쥐에게 시달림을 받긴 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손톱 발톱을 아무 데나 버린 아주 작은 잘못 때문이었다. 따라서 잘못에 해당하는 정도의 작은 노력만으로도 그 시달림을 떨쳐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노력이란 쥐의 신통력을 제압할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닌 도인을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그렇게 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주인공이 맞닥뜨린 불행은 주인공으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수일이와 수일이』에 구현된 환상의 논리는 간단하다. 사람의 손톱 발톱을 먹은 쥐는 바로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펼쳐진다. 환상의 전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독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독자의 관심은 오히려 전제로부터 이끌어 낸 사건과 현상의 논리적 정합성에 집중된다. 그것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환상적 사건과 현상은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수일이와 수일이』가 구성한 환상의 논리적 정합성을 검증해 보기로 하자.

수일이는 자신의 손톱과 발톱을 쥐가 먹게 하여 가짜 수일이를 만들어 냈다. 그 가짜 수일이는 그 전에는 분명 쥐였다. 그런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은 쥐인가 사람인가. 가짜 수일이는 수일이네 집에서 비누를 갉아먹는다. 사람이라면 비누를 갉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짜 수일이는 개도 겁내지 않고 고양이도 겁내지 않았다. 사람의 손을 타서 야생성을 잃어 버린 개이고 고양이라서 겁내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가짜 수일이는 자신이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짜 수일이의 손톱과 발톱을 먹고 수일이가 쥐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가짜 수일이가 여전히 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가짜 수일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준비해 두고 있다. “가짜 수일이가 쥐냐 사람이냐를 판별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쥐면 어떻고 사람이면 어떠랴. 물론 생물학적으로 따지면 그는 여전히 쥐다. 그러나 쥐라 할지라도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정신학적으로는 이미 사람인 것이다. 가짜 수일이는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쥐의 몸집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쥐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짜 수일이는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수일이와 덕실이의 정체성까지 철학적으로 사유할 정도로 인간화된다. 다음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가짜 수일이와 그런 수일이를 설득하여 원래대로 쥐로 돌아가게 하려는 덕실이와의 대화이다.

“이 봐, 너는 진짜 수일이가 아니야. 내가 알아. 너는 처음에 쥐였어!” 덕실이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럼 너는 처음에 뭐였니?” 가짜 수일이가 덕실이를 보며 말했다. “나?” “그래! 너는 처음에 뭐였어?” “나는 처음부터 개였지.” “아니야. 잘 생각해 봐. 너도 처음에는 개가 아니었는지 몰라. 나처럼 쥐였거나, 박쥐, 도마뱀……. 어쩌면 바퀴벌레였는지도 모르지.” “뭐, 뭣?” 덕실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너부터 바퀴벌레로 돌아가 봐. 그러면 나도 쥐로 돌아갈 테니까!” 가짜 수일이가 말했다.(98~99쪽)

가짜 수일이는 자신이 쥐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가짜 수일이는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자신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다. 자신은 예전에 쥐였는데 지금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덕실이나 수일이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덕실이와 수일이가 지금은 개이고 사람이지만 예전에는 바퀴벌레와 같은 동물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바퀴벌레와 같은 동물이었을 덕실이와 수일이가 개로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예전에 쥐였던 자신이 사람으로서 살아가지 못할 게 뭐냐는 것이다. 그래서, 수일이가 자신은 처음부터 수일이였다고 말할 때 가짜 수일이가 자기도 처음부터 수일이였다고 억지 소리를 해 댄 것이다.

가짜 수일이는 마침내 수일이와 덕실이를 집에서 내쫓는다. 이때 마지막 호의인 양 자신이 먹다 남은 빵을 내준다. 그런데 그 빵 속에는 가짜 수일이의 손톱 발톱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읽어 내게 되는 것은 가짜 수일이의 흉측함이 아니라 처절함이다.

가짜 수일이는 누구든지 현재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자기 자신을 내세웠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했다. 자기 자신의 경우는 특수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A라는 동물의 발톱을 먹은 B라는 동물은 A라는 동물로 변신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가짜 수일이로서는 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쥐이면서도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그러한 삶을 선택한 자신에 대한 회의부터 잠재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가짜 수일이로서는 수일이와 덕실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일이가 집에서 쫓겨나면서까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은 임신한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봐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수일이가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짜 수일이는 자신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이와 같은 내적 걸림돌과 외적 걸림돌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수일이와 덕실이에게 자신의 손톱 발톱을 먹여 보는 것이다. 그들이 쥐가 되기만 한다면…….



과연 수일이와 덕실이는 쥐가 되고 말았다. 결국 가짜 수일이가 승리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수일이와 수일이』의 환상 논리는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수일이와 덕실이가 집을 나간 것은 가짜 수일이에게 내쫓겨서가 아니었다. 가짜 수일이를 물리칠 들고양이를 찾아서였다. 작가는 수일이네 집의 2층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입을 빌어서, 들고양이라야 사람으로 둔갑한 쥐를 쫓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독자로서는 이를 납득하기가 어렵다. 사람의 손을 탄 집고양이긴 했지만, 가짜 수일이는 집고양이를 귀여워하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런 말까지 한다.

“나도 엄마한테 고양이 한 마리 사 달라고 할까? 그런데 고양이를 뭣 땜에 키우지? 닭은 알이라도 낳아 주지만. 나 같으면 차라리 호랑이나 사자를 키우겠어. 젖소를 한 마리 키워 볼까? 우유를 얻어먹을 수도 있잖아?”(112쪽)

이러한 가짜 수일이가 들고양이를 왜 무서워하겠는가. 작가는 “지 맘대로 돌아댕기면서 뭣이든지 막 잡아먹고 사는 들고양이” 라는 말로 집고양이와 들고양이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들고양이의 공격성에서 가짜 수일이를 내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덕실이의 경우를 보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가짜 수일이가 쥐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니까, 덕실이는 못 참겠다는 듯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가짜 수일이는 무서워하기는커녕 능청을 떤다. “히히. 나는 사람이야. 누가 너 같은 개를 겁낼 줄 아니?” 라고 하면서. 작가는 사람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는 가짜 수일이를 물리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가짜 수일이는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개나 고양이가 겁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가짜 수일이는 자신의 경험에서 수일이와 덕실이를 제거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어찌하여 수일이와 덕실이는 그들의 경험에서 가짜 수일이를 제거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가짜 수일이는 자신의 손톱 발톱을 수일이와 덕실이에게 먹여서 그들을 쥐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써 본 적이 없는 방법이라서 가짜 수일이도 그 효과에 대해서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일이와 덕실이는 그들이 직접 당했기 때문에 결과를 자신해도 좋았다. 이를테면, 덕실이의 손톱 발톱을 가짜 수일이에게 먹인다면 가짜 수일이는 개가 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일이와 덕실이는 이런 방법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수일이와 수일이』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쥐가 된 수일이와 덕실이가 사람과 개로 되돌아온 사건이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수일이와 덕실이는 약속이나 한 듯 바위굴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덕실이와 수일이는 그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캬아아악!” 어느 틈에 뒤로 왔는지 고양이가 눈에 불을 켜고 이빨을 드러내며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수일이는 정신을 잃어버렸다.(210~211쪽)


들고양이를 보고 기절하는 것만으로 수일이와 덕실이는 다시 사람으로 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들고양이가 가짜 수일이를 물리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삽입한 이야기 장치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의도가 지나쳤다. 들고양이가 가짜 수일이를 물리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짜 수일이가 사람으로 보이긴 하지만 기실은 쥐이기 때문일 것이다. 쥐가 된 수일이와 덕실이는 어떨까. 쥐로 보이긴 하지만 기실은 사람이고 개이지 않은가. 따라서 들고양이는 사람이 된 쥐만 물리칠 수 있든지 쥐가 된 사람과 개만 물리칠 수 있든지, 둘 중 어느 하나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둘 다 가능한 것으로 설정했다.

『수일이와 수일이』의 환상 논리는 꽤 탄탄한 것이었다. 그 동안 우리 나라 환상 동화에서 선보였던 환상 논리와는 아예 격을 달리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일이와 수일이』의 환상 논리에 내재된 결함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아쉬운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이지호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을 공부하고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진주교육대학교에서 어린이 문학 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고 있습니다. 저서로 『글쓰기와 글쓰기교육』(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동화의 힘, 비평의 힘』(주니어김영사, 2004)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