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통권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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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와 동화 (2) : 옛이야기 긍정론과 부정론의 시사점

이지호 | 2005년 11월


브루노 베텔하임은 ‘어린이 문학 전체를 통틀어 옛이야기만큼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충족감을 주는 것은 없다’라고 단정한다.(『옛이야기의 매력Ⅰ』,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옥순·주 옥 옮김, 시공주니어, 1998, 15쪽.) 베텔하임은 그 까닭을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그러나 요점은 다음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옛이야기는 ‘어린이의 심리와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아동 문학사가들이 첫 번째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아동 문학의 역사를 전래 동화에서 시작한 일이다.”라고 말한다.(『용의 아이들』, 마리아 니콜라예바 지음, 김서정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31쪽.) 옛이야기가 결코 어린이 문학이 될 수 없음을 이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까닭을 설명하는 말이 너무 소략하다. 구전 전래동화는 폭력과 아동 학대를 다루는 이야기가 많고 또 구전 문화에 속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린이 문학에 편입시킬 수 없다는 것이 니콜라예바가 한 말의 전부이다. 한편, 니콜라예바는 어린이를 위한 판본에도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어린이를 위한 판본에 실리는 텍스트는 도덕적·교육적 관점에서 채택되기 때문에 변형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그 텍스트가 펼쳐 보이는 세계상은 원래의 그것과 무관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니콜라예바가 어린이를 위한 판본으로 지칭한 것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옛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자리의 논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베텔하임의 말처럼, 옛이야기는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우연의 일치로 설명한 바 있다. 옛이야기는 말의 이야기 문학이라서 기억하기 쉬운 형식을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른이 기억하기 쉬운 형식은 어린이가 이해하기에도 쉬운 형식인 것이다. 옛이야기가 적어도 형식의 측면에서는 어린이가 전혀 부담을 갖지 않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옛이야기가 어린이의 심리와 감정을 깊이 이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베텔하임의 주장은 그의 정신분석학적인 입장을 감안하더라도 우리로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옛이야기는 옛어른이 즐겼던 이야기이라서 옛어른의 심리와 감정에 부합하는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예바는 어린이 문학에서 옛이야기를 배제하여야 한다면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하나가 옛이야기의 구술성이었고 다른 하나가 그것의 폭력성과 아동 학대성이다. 앞엣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어린이 문학 또한 말의 문학과 글의 문학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엣것은 모두 공감하는 바이다. 니콜라예바는 빠뜨렸지만, 옛이야기는 그것의 음란성과 위계성 그리고 성차별성 때문에도 많은 사람의 공격을 받는다. 물론 옛이야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어른, 그것도 옛어른의 욕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옛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격적인 비판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다름 아닌 옛이야기 바로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니콜라예바는 간과했다.

그림 형제가 독일의 옛이야기를 수집하여 책으로 펴내면서 그 제목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이야기’라 하였다. 그러나 그림 형제는 그 책에 실린 옛이야기를 거듭 거듭 손질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제목과는 달리 그 옛이야기는 결코 어린이에게 적합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비판에 끊임없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 동화』(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역, 서울문화사, 2000, 개정판)라는 책이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 책은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이야기』 초판본의 잔혹하고 거친 표현 방법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심층 심리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학자들의 해석을 참고하여 철저하게 파헤친 것이라 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어린이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백설공주」만 하더라도 경악할 만하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백설공주는 친아버지인 왕과 사랑을 나눈다. 이를 알게 된 왕비는 질투심 때문에 사냥꾼더러 백설공주를 죽이게 하였다. 그러나 백설공주는 사냥꾼의 동정심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일곱 난쟁이의 집으로 찾아든다. 백설공주는 거기서 집안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곱 난쟁이와 돌아가면서 잠자리도 같이 했다.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이 그것조차 자연스럽게 여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사냥꾼이 가져온 산돼지의 간을 백설공주의 간으로 알고 먹었던 왕비는 백설공주가 죽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거울이 백설공주가 살아 있음을 알려 주자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나선다. 딸의 복수가 겁이 났던지라 자신이 완벽하게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비는 세 번의 시도 끝에 백설공주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일곱 난쟁이는 백성공주의 시체를 유리관에 넣어 보관했다.

어느 날 이웃 나라의 왕자가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고 일곱 난쟁이의 집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는 거기서 유리관에 누워 있는 백설공주를 보게 되었다. 왕자는 백설공주를 손에 넣고 싶었다. 왕자는 병적인 시체 애호가였다. 성적 불능자라서 살아 있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례 문제로 고심하던 일곱 난쟁이는 백설공주를 왕자에게 넘겨 주었다. 하루는 왕자의 시종이 왕자가 없는 틈을 타서 유리관을 열고 백설공주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등 뒤로 들리는 발소리에 놀라서 시체를 떨어뜨렸는데, 이때 공주의 목에 걸려 있던 독 묻은 사과 조각이 툭 튀어나왔다. 백설공주는 살아났다. 왕자와 결혼한 백설공주는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도회를 열어서 어머니인 왕비를 초대했다. 왕비는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이웃 나라의 새 왕비가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거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왕비는 이웃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되었다. 백설공주는 왕비를 고문하라고 명령했다. 불에 새빨갛게 달궈진 쇠구두를 신은 왕비는 정신없이 뛰다가 마침내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초판본 「백설공주」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의문 ― 자신의 친딸을 쫓아내고 죽이려고까지 한 왕비와, 아름답긴 하지만 그래봤자 시체에 지나지 않는 백설공주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는 이웃 나라 왕자에 대한 평범한 독자의 궁금증 ― 에 대한 해답을 상상력으로 마련해 본 이 이야기는 옛이야기가 어린이 문학으로서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데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는 여전히 어린이의 사랑을 받는다. 물론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이야기』 최종판은 초판본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최종판에 실려 있는 200여 편의 옛이야기 중에서 오늘날의 어린이 책에 포함되는 옛이야기는 12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마녀는 죽었다』, 셀던 캐시단 지음, 조무석 외 옮김, 숙명여대출판국, 2002, 12쪽 참고).

누군가는 이를 내세워 옛이야기가 어린이 문학일 수 없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로 주장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옛이야기는 전파와 전승 과정에서 수많은 변이형을 생산하게 되는데, 어린이 문학으로 채택되는 옛이야기는 그 변이형 가운데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림 형제의 개작을 정당화한다. 그림 형제의 개작은 순수한 창작일 수도 있고 단지 또 다른 변이형으로의 교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 왜냐 하면, 그림 형제가 활동했던 19세기 초반은 옛이야기의 전파와 전승이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라서 순수한 창작과 또 다른 변이형으로의 교체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둘째, 어린이 문학의 어떤 하위 장르에서도 모든 작품이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가 200여 편 가운데 12편이나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명작 동화의 이름을 붙인 어린이 책으로 출판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현상이다.


옛이야기는 옛어른을 위한 이야기였고 오랜 세월의 짓누름도 견뎌 낸 적층 문학이었다. 이 둘은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옛어른은 특정 시대의 특정의 옛어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세대를 달리하는 수많은 옛어른을 통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옛이야기의 문학성을 인정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

옛이야기의 문학성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확보되었다. 그 시행착오의 유물이 바로 옛이야기의 유형과 각편(또는 변이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의 옛이야기는 어느 한 유형에 속하는 어느 한 각편일 뿐이다. 그리고 그 각편은 그 유형의 옛이야기 가운데 가장 세련된 옛이야기로 평가받은 것일 가능성이 꽤 높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유형의 옛이야기에서는 각편마다 그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옛이야기는 이야기의 실험장이라 할 만하다. 옛이야기의 수많은 유형과 수많은 각편은 인류가 구성할 수 있는 이야기의 총체라 할 만하다는 것이다.

옛이야기의 문학성은 옛이야기 긍정론의 토대가 된다. 어린이는 문학성이 있는 어른 문학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는 있어도 문학성이 없는 어린이 문학에 마음을 주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성에서 승부를 걸 것이라면 제재나 주제를 가릴 까닭이 없다. 더욱이 옛이야기는 옛어른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옛어른 또한 요즘 어른과 마찬가지로 성·돈·힘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를 이야기로 엮어 가려면 음란성·폭력성·억압성·위계성의 혐의를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것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사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야기에 재미를 더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옛이야기 긍정론과 부정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무꾼과 선녀’ 유형에 속하는 옛이야기 몇몇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떤 연구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나무꾼과 선녀’ 유형 옛이야기에는 140여 편의 각편이 있다.(『나무꾼과 선녀 설화 연구』, 배원룡, 집문당, 1993. 참고. 이 글에서 활용하는 ‘나무꾼과 선녀’ 유형 옛이야기에 관한 자료는 모두 이 책에서 끌어온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그 연구자는 ‘나무꾼과 선녀’ 유형 옛이야기를 다시 여섯 가지의 하위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그 가운데 기본형이라 할 만한 것이 ‘선녀 승천형’이다. 나무꾼과 결혼한 선녀가 나무꾼을 버려둔 채 아이들만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위 유형은 ‘선녀 승천형’에서 새로운 삽화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점점 확장해 나간 것이다. ‘나무꾼 승천형’은 사슴의 도움으로 나무꾼이 하늘로 올라가 선녀와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고, ‘나무꾼 천상 시련 극복형’은 나무꾼이 하늘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극복하고 처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고, ‘나무꾼 지상 회귀형’은 나무꾼이 지상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 내려왔다가 금기를 어겨서 죽거나 수탉으로 환생하였다는 이야기이고, ‘나무꾼 시신 승천형’은 지상에서 죽은 나무꾼의 시신을 선녀가 아들을 시켜서 천상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이고, ‘나무꾼과 선녀 동반 하강형’은 하늘에서 살던 나무꾼 가족이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나무꾼과 선녀’ 유형 옛이야기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대개 그 서두 부분을 문제로 삼는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가)먹이 사슬의 관계에 놓여 있는 포수와 사슴 사이에서, 나무꾼이 사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포수를 굶주리게 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나)사슴이 자신의 보은을 위해서 제삼자인 선녀의 운명을 유린하는 방법을 일러 주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다)나무꾼이 선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날개옷을 빌미로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여성 억압적이다. (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다)는 다르다. 그것만 떼놓고 보면 어린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비교육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선녀 승천형’은 어린이 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권장할 만한 이야기 유형으로 보인다. 사슴은 나무꾼에게 선녀와 결혼할 수 있는 위계를 일러주었고, 나무꾼은 그 위계를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선녀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하여야 했고 또 그만큼 불행해졌다. 이에 대한 어린이 문학적 대응은 선녀 또한 위계를 써서 가능한 한 최대의 원상 회복을 꾀하는 것이다. 결혼 사실과 아이 출산까지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지만 결혼 상태를 깨뜨릴 수는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의 선녀는 나무꾼에게 거짓말을 하여 날개옷을 얻은 후에 아이들만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선녀 승천형’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선녀가 나무꾼에게 대응하는 것도 있다. ‘나무꾼 추락형’이라 할 만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배원룡은 이를 ‘나무꾼 승천형’에 포함시켰다.)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자, 나무꾼은 다시 사슴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한다. 사슴은 하늘에서 물을 길으려고 내려보내는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라고 일러준다. 그런데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던 나무꾼은 두레박과 함께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늘에서 지켜보던 선녀가 두레박의 줄을 끊어 버렸던 것이다.

‘나무꾼 추락형’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선녀 승천형’의 그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겉으로 보면, 나무꾼은 선녀의 보복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와는 다른 뜻을 찾아 낼 수 있다. 즉, 나무꾼은 나무꾼 자신의 분별없는 욕망의 덫에 치였다는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 버린 선녀와 재결합하기 위해서는 일단 하늘을 침범해야 하고 선녀를 또 다시 제압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하여야 한다. 이것은 땅의 주민인 나무꾼이 마음에 품을 만한 욕망이 결코 아닌 것이다. 옛이야기는 우리의 모든 욕망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 욕망에 대한 책임은 철저하게 묻는다. 나무꾼의 죽음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었다.

‘선녀 승천형’과 ‘나무꾼 추락형’에서는 결말과 (나)와 (다)의 내용이 아주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나)와 (다)의 내용은 이야기의 필수 요소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옛이야기 부정론의 실마리가 될 법한 것이 옛이야기 긍정론의 실마리로 자리매김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유형에서는 (나)와 (다)의 내용은 그 비교육적 성격이 끝까지 유지되기 때문에 옛이야기 부정론의 빌미로 책잡히기까지 한다.

‘나무꾼 승천형’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이다. 나무꾼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간 선녀가 하늘로 올라온 나무꾼을 반겼단다. 이와 같은 이야기 전개는 인물의 일관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나무꾼 천상 시련 극복형’은 한술 더 뜬다. 이 유형에 속하는 어떤 각편에서는 나무꾼이 옥황상제와 목 베기 시합을 한다. 그런데 선녀는 나무꾼을 돕는다. 결과는 참담하다. 목이 떨어져서 죽는 것은 옥황상제였던 것이다. ‘나무꾼 시신 승천형’에서는 서사 논리가 일관성을 상실했다. 나무꾼은 이미 통과 제의를 거쳐서 하늘나라의 주민으로 거듭난 터이었다. 그런데도 금기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금기까지 위반하여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 어색한 장면은 계속된다. 살아 있을 때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던 나무꾼이 시신이 되어서는 아주 손쉽게 하늘로 올라간다. 서사 논리의 일관성이 결여된 것은 ‘나무꾼과 선녀 동반 하강형’도 마찬가지이다. 나무꾼이 싫어서 하늘로 올라갔던 선녀가 나무꾼과 함께 살기 위해서 땅으로 내려왔으니 말이다.

우리는 ‘나무꾼과 선녀’ 유형의 옛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옛이야기라고 해서 모두 문학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라는 것, 옛이야기는 각편에 따라서 문학성의 획득 정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문학성을 획득한 옛이야기에서는 옛이야기 부정론의 근거가 되는 내용 요소도 옛이야기 긍정론의 근거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옛이야기는 옛어른이 즐겼던 이야기라서 옛어른의 욕망인 성·돈·힘을 이야깃거리로 다룰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음란성·폭력성·위계성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내용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옛어른이 삶을 영위했던 시대에는 세계의 중심에 남자 어른이 있었다. 옛이야기도 그 시대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옛이야기는 성차별성과 어린이 억압성까지 이야기 속에 내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은 분명 옛이야기 부정론의 빌미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옛이야기 긍정론이 힘을 잃지 않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욕망의 촉발과 충족 그 자체를 삶의 위기이자 기회로 간주하는 욕망의 미학 때문이다. 옛이야기는 일단 옛어른의 모든 욕망을 긍정한다. 욕망을 촉발시키는 것도 긍정하고 촉발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긍정한다. 옛이야기 부정론의 빌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성된다. 그러나 옛이야기는 옛어른에게 욕망 주체로서의 책임을 철저하게 묻는다. 욕망 때문에 행복해질 수도 있지만 불행해질 수도 있음을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깨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 주체와 욕망 대상의 대결 과정에서 구체화된다. 옛이야기 긍정론은 이 지점에서 활기를 띤다.

옛어른이 옛이야기를 즐겼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위기이자 기회인 욕망의 문제적 상황을 실제로 체험한다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나 옛이야기 속의 작중 인물을 통해서 대리 체험한다면 그런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도 재미와 교훈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동화 창작에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재미있는 교훈 또는 교훈적인 재미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옛이야기 긍정론과 부정론에서 배울 수 있는 동화 창작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옛이야기가 옛어른의 욕망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듯이, 동화는 요즘 어린이의 욕망을 이야깃거리로 삼아야 한다. (물론 요즘 어른의 욕망 또한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다. 단, 그것은 요즘 어린이가 수용할 수 있고 수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이의 진정한 욕망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탐색하여야 한다. 이때,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을 미리 염려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동화에서도 옛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모든 욕망을 긍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화가 어린이의 욕망을 오히려 억압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어린이의 모든 욕망을 긍정하게 되면 어린이와 관련한 다양한 문제 제기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욕망 주체와 욕망 대상의 대결에 맡겨야 한다. 즉, 작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다. 충족되게 되어 있는 욕망은 충족되게 하여야 할 것이고 충족될 수 없게 되어 있는 욕망은 충족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어린이 독자는 이렇게 배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린 문제 제기와 닫힌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동화라야, 어린이 독자가 자신의 욕망과 관련한 문제적 상황을 작중 인물을 통해서 대리 체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미 옛이야기에서 말의 문학이 갖는 장점을 확인한 바 있다. 말은 어른의 문학조차도 적어도 이야기 형식의 측면에서는 어린이가 친숙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동화의 이야기 형식은 이미 옛이야기의 그것과 꽤 닮아 있다. 동화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기존의 이야기 형식을 탈피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말에는 또 다른 힘이 있다. 그것은 말 고유의 표현 기법에서 나오는 표현 효과이다. 동화 창작은 글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 글의 표현 기법을 채택한다. 그런데 말도 문자의 옷을 입히기만 하면 글처럼 부릴 수 있다. 말과 글의 표현 기법을 아울러 구사하는 것도 동화 창작의 새로운 방법이 될 것이다.
이지호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을 공부하고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진주교육대학교에서 어린이 문학 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고 있습니다. 저서로 『글쓰기와 글쓰기교육』(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동화의 힘, 비평의 힘』(주니어김영사, 2004)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