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통권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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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읽는 풍경]
우리 그림책에서 보고 싶은 어린이의 모습

서정숙 | 2005년 12월

그림책 중에는 청소년층, 장년층, 노년층의 독자가 보면 좋을 것 같은 그림책도 있지만 많은 그림책의 독자는 어린이이다. 그러므로 주요 독자가 어린이인 그림책은 그것의 내용과 형식이 어린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에 기초하여 만들어지고, 어린이가 감상하고 이해하고 즐기기에 적절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198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작가에 의한 그림책은 2000년경부터는 양적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우리나라 그림책이 어린이의 경험과 삶을 제대로 담아 내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돌이켜보고, 또 앞으로 창작되는 우리나라 그림책이 보여 주면 좋을 것 같은 어린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양한 어린이의 모습이 우리나라 그림책에 나타나 있긴 하지만, 아직 독자의 가슴 깊이 새겨지는 개성 있는 어린이의 모습이 별로 많지 않다는 아쉬움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맥스나 에즈라 잭 키츠의 그림책들에 등장하는 피터, 『부루퉁한 스핑키』의 스핑키, 『지각대장 존』의 존, 『제랄다와 거인』의 제랄다같이 그들이 존재하는 상황이나 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각자 뿜어 내는 그들만의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그림책에도 개성 있는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의 할머니나 『수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꽤 개성 있는 그림책 속 인물로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본 글에서는 그림책 속의 개성 있는 어린이를 찾고자 하므로 일단 그런 인물들은 제외시키기로 한다.

우리나라 창작 그림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책 속의 어린이로는 『내 짝꿍 최영대』의 최영대와 『넉 점 반』에 등장하는 아이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내 짝꿍 최영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말을 잃고 아빠와 둘이 사는 아이, 옷도 매일 같은 것을 입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실내화나 준비물을 챙겨 오지 못하고 행동도 굼뜬 아이, 최영대가 어느 날 전학을 온다. 반 친구들은 영대를 따돌리고 못살게 군다. 그럴 때마다 영대는 노려보기만 할 뿐 울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첫 날 밤, 내용이 반전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누군가 방귀를 뀌자 반장은 영대를 지목하면서 “엄마 없는 바보, 굼벵이 영대”라고 놀린 것이다. 이에 영대는 그만 큰 소리로 울음보를 터뜨린다. 그런데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섧던지 반 친구들은 물론 담임선생님, 옆 반 아이들까지 영대의 마음이 되어 모두 울고 만다. 그리고 다음 날, 반장을 비롯하여 반 아이들은 그 동안 영대에 대한 사과의 마음을 담아 경주 기념 배지를 영대의 셔츠에 잔뜩 꽂아 준다. 서울로 돌아온 후, 아이들은 더 이상 영대를 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대에게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지내게 된다.

『내 짝꿍 최영대』 본문 중에서
이 그림책은 채인선의 글만으로도 최영대라는 아이에 대한 형상화가 부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순희의 최영대에 대한 그림 표현은 그 아이의 처지나 성품, 감정을 더욱 또렷하게 느끼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양말도 안 신고 실내화도 없이 교실 바닥에 가방을 질질 끌며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걷는 모습이라든지, 아이들의 놀림에 그저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모습, 반 친구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는 모습,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서 혼자 침울하게 앉아 있는 모습, 수학여행 가서 반장의 놀림에 울음보가 터져 엉엉 울고 있는 모습, 셔츠 앞 쪽 가득히 반 친구들이 꽂아 준 기념 배지를 달고 있는 모습의 최영대 그림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최영대에 대한 연민과 유대 의식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 같다.

『내 짝꿍 최영대』 외에도 제목에 아이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그림책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제목에 주인공 아이의 이름이 들어가 있으면 그 그림책이 좀 더 개별적인 경험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하게 되고 그 경험의 주체자인 어린이는 좀 더 개성 있는 캐릭터일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솔이의 추석 이야기』나 『만희네 집』의 경우,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좀 미흡한 것 같다. 이 두 그림책은 추석 풍속도(추석 귀향길의 모습, 차례 음식을 하고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달맞이나 농악놀이 하는 모습을 담음)나 한옥 구조도로서의 의미는 있겠지만 솔이나 만희라는 아이가 겪는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경험의 세계가 느껴지는 그림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제목에 어린이의 이름이 붙어 있지는 않지만 아이의 개성이 돋보이는 그림책도 있다. 그것은 『넉 점 반』이다. 이 그림책은 윤석중의 시에 이영경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서, 『내 짝꿍 최영대』가 주로 학령기 어린이들이 보는 그림책이라면 『넉 점 반』은 학령 전기 유아들이 볼 수 있는 그림책이다. 시계 있는 집이 드물던 시절, 아이는 현재 시각을 알아 오라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간다. 아이는 옆집 가게 할아버지로부터 넉 점 반(네 시 반)이라는 답을 받았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보게 된 닭, 개미, 잠자리, 분꽃에 차례로 정신이 팔려 밖이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라고 말한다.

이 그림책에서에서는 『내 짝꿍 최영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림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 준다. 『내 짝꿍 최영대』의 그림이 이야기의 진행보다는 영대의 딱한 처지와 영대가 느꼈을 감정 표현에 주력함으로써 독자가 영대의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넉 점 반』의 그림은 그 때 그 때 눈앞에 보이는 주변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이끌림 때문에 자신의 행동으로 초래될 결과에 대해서는 무심한 아이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특히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라는 글과 함께 그려진 그림은 이 아이의 무심한 동심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 준다. 이 그림을 보면, 아이가 시간을 알아 보러 갔던 가게는 아이의 작은 걸음으로도 집에서 겨우 스무 걸음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의 심부름이었는데 닭, 개미, 잠자리, 분꽃으로 마음을 옮겨 다니느라 두 시간 이상 걸려서 집으로 돌아왔으니(네 시 반경에 나가서 해가 져서 돌아왔으므로) 이 아이의 호기심이나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몰입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넉 점 반』 본문 중에서

또한 마지막 장면에 글 없이 양 쪽 펼침면으로 그려진 그림은 이야기의 흐름을 글 없이 좀 더 진전시킬 뿐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파악을 도와 줌으로써 이야기에 유머를 더해 준다. 글은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로 앞 장에서 끝이 나지만 그림만 그려져 있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엄마가 마루에 걸터앉아 막내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눈을 흘기고 계시고 심부름 다녀온 아이는 마루로 오르면서 눈 흘기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리고 젖혀진 방문 안으로 보이는 방 안에서는 아이의 오빠들과 언니로 보이는 삼 남매가 이미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엄마가 아이에게 몇 시인지 알아 오라는 심부름을 보낸 이유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는지 알아 보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면서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이것저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배회를 한 아이의 행동이 어처구니없기도 하면서 실제 아이의 모습을 대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미소를 짓게 된다.

앞으로 우리 그림책에서는 더 많은 개성 있는 캐릭터로서의 어린이가 등장하길 기대한다. 그림책 속에서 어린이를 개성이 살아 있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것을 보는 그림책 밖 어린이의 개성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어린이들이 겪는 여러 가지의 경험을 담는다. 상상 속에서 겪는 경험, 실제 속에서 겪는 경험, 집에서 겪는 경험, 교육기관에서 겪는 경험, 가족과의 관계에서 겪는 경험, 가족 외의 사람들과의 관계나 동물이나 자연과의 만남으로 겪는 경험 등, 어린이들이 삶 속에서 겪는 경험들은 어른들이 겪는 경험만큼이나 다양하면서도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어린이가 겪는 경험은 어른들이 겪는 경험처럼 때로는 즐거운 경험이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화가 나는 경험이기도 하다. 또 때로는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어린이들이 하는 이런 모든 경험들은 어른의 경험에 비해 어쩌면 더욱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하는 경험 하나하나는 성장을 위한 양분이 될 테니 말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들은 되도록 다양하고 어린이의 실제적인 경험을 담아 내야 한다. 어린이들이 겪는 실제적인 경험을 담는 일은 사실상 개성 있는 캐릭터의 표현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성 있는 어린이의 표현은 어린이가 겪는 경험의 리얼리티를 살리지 못하고는 불가능한 일이고, 어린이의 실제적인 경험이 구체화되지 못하고서는 개성 있는 캐릭터로서의 어린이의 표현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캐릭터의 개성만큼이나 그 개성적인 캐릭터의 어린이가 겪는 경험은 그림책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이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 그림책 속의 어린이들이 한 경험들을 대충 살펴보면, 엄마와 만든 연을 밖에 가지고 나가 갖고 놀다가 바람에 연이 날아가 버리는 경험을 한다든지(『바람 부는 날』), 할머니 댁에 맡겨져 있는 동안 다락방 안에서 혼자 탈놀이를 한다든지(『아무도 모를거야 내가 누군지』), 동강 주변에서 여동생과 장에 가신 엄마를 함께 기다린다든지(『동강의 아이들』), 삼촌이 태워 주는 자전거를 타고 이 곳 저 곳을 돌아본다든지(『삼촌과 함께 자전거 여행』), 외국인과 결혼하는 이모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경험(『이모의 결혼식』) 등이다. 이 그림책들이 보여 주는 경험들이 어린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들 중에는 그림책 속 어린이가 갖는 경험의 진정성이 약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경험의 진정성은 느껴지나 내용 전개의 치밀함이 부족하여 이야기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도 있다.

어린이의 경험이 그림책이라는 작품으로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그림책 속 어린이의 경험이 좀 더 극적으로 활성화된 사건이나 갈등과 연계되어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야 그림책 속 어린이의 경험은 더 실제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엄마가 사라졌어요』나 『엄마 옷이 더 예뻐』 『동물원』 『별나라에서 온 공주』 『내 동생』 『명애와 다래』 『구름빵』과 같은 그림책은 어린이들이 현실 세계나 상상 세계에서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을 담음으로써 비교적 그 경험의 리얼리티를 효과적으로 살린 그림책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각각 엄마와 함께 외출했다가 엄마를 잃어버리는 경험, 엄마의 옷이 자신의 옷보다 예쁘다고 느껴서 엄마가 외출한 사이에 엄마의 옷을 입어 보는 경험, 부모와 동물원에 가서 겪는 경험, 형제들 중 자신만 주워 온 것같이 느끼는 경험, 구구단을 못 외우는 어린 동생 때문에 느끼는 원망과 애틋한 감정의 경험, 병환으로 누워만 계시는 할머니에 대해 느끼는 원망과 동정심의 경험, 아이들이 구름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상상을 담고 있다. 실제로 이 그림책들은 대체로 앞 단락에서 언급한 그림책들보다 어린이들로부터 더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교사들로부터의 보고도 있는데, 이것은 어린이 독자로부터의 공감은 그림책 속 어린이가 하는 경험이 상상 속의 경험이냐 현실 속의 경험이냐에 상관없이 그것이 얼마나 실제 어린이의 모습을 닮았느냐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그림책들이 보여 주는 경험들은 어린이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경험인 동시에 어른들은 할 수 없는 어린이들만의 독특한 경험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물론 어린이와 어른 모두, 그들이 하는 경험의 종류나 깊이에 따라 계속 성장해 가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서로 하는 경험의 성격과 이에 대한 자각이나 해석 능력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림책 속 어린이의 경험은 어른의 경험과는 다르게 형상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그림책에서 우리 어린이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어린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담아 내면 좋겠다. 예를 들면, 직장 다니는 엄마들이 많은 우리 사회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와 관련되는 그림책은 없으므로(『엄마는 출장 중』이라는 번역 그림책이 최근에 나왔을 뿐) 직장 다니는 엄마를 둔 어린이의 경험이 진솔하게 담긴 그림책 말이다.



그림책은 어린이들이 지금 겪고 있는 경험의 세계를 보여 줌으로써 어린이가 그림책 속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도 하지만 그림책 속 다른 이의 모습을 볼 수 있게도 한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다른 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그것을 보는 어린이의 감상 및 이해 능력에 적합할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유익할 것인가는 그렇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그림책이 지금보다는 더 넓은 범주의 사람들이 겪는 경험의 세계를 담아야 한다는 일선 교사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더 넓은 범주의 사람들이 겪는 경험이란 지금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경험,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경험, 대개의 어린이들이 겪는 경험을 중심으로 볼 때 그보다는 좀 덜 일반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어린이들의 경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작은 어려움에 처한 어린이들의 경험으로는 동생의 탄생으로 인해 형에게 나타나는 퇴행이나 부모와의 갈등, 이사나 전학에 의해 생기는 적응의 어려움 등을 들 수 있고, 이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어린이들의 경험으로는 부모의 이혼이나 죽음, 재혼 가정, 한 부모 가정, 입양 가정, 국제결혼 가정, 장애우, 경제적 어려움, 무주택, 병, 갖가지 학대로 인한 경험들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어려움들은 물론 우리나라 대부분의 어린이(또는 어른)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상당히 많은 어린이들이, 또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되는 경험을 작품화한 그림책들은 직접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이들에게는 물론이고, 그런 어려움을 지금 직접 겪고 있지 않은 어린이들에게는 같은 반, 같은 학교, 같은 지역, 또는 같은 나라, 같은 지구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각자의 나이나 경험의 폭과 깊이에 따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는 그림책들은 어려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되 되도록 긍정적이고 지혜롭게 그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최근에 출판된 『영이의 비닐우산』은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림책이 보여 줄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책은 윤동재의 시에 김재홍이 그림을 그린 그림책이다. 비 오는 월요일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앉아 잠들어 있는 거지 할아버지를 본 영이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아침 자습을 마치고 나서 다시 교문 밖으로 나와 자신의 비닐우산을 할아버지에게 씌워 드린다.

이 그림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거지 할아버지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일반적인 어린이들의 경험 너머의 경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영이가 거지 할아버지에 대해 자비심을 갖게 되는 과정이나 독자가 영이와 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이는 그림은 영이나 거지 할아버지에 대한 독자의 공감적 깊이를 더해 준다.

특히, 영이를 그림책 속의 어린이면서 때때로 독자와 함께 거지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관찰자로 느끼게 표현한 그림이라든지, 거지 할아버지의 모습을 차츰 크게 그리다 빗물만 가득 고인 깡통만 덩그마니 그려 둔 것이라든지, 연이어 그려진 비 그림으로 문방구 아주머니의 거지 할아버지에 대한 험담, “영감태기, 영감태기 뒈지지도 않고.”가 시간의 경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이의 가슴에 내내 메아리쳤음을 표현한 것이라든지, 이런 그림 표현들은 이 그림책을 보는 어린이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영이의 마음과 함께 거지 할아버지의 처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앞으로의 그림책은 어린이들이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고 더 나아가 그 경험들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 창작 그림책의 역사가 약 20여 년이 된 이 시점에서,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 질적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하면서 앞으로 우리의 그림책 속에서 보고 싶은 어린이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우리 그림책 속에서도 맥스나 피터, 스핑키, 존, 제랄다처럼 어린이 독자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간직할 수 있는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되길 바라고, 또 그림책 속의 어린이들이 인간 보편적인 경험이면서도 어린이들만이 겪을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을 좀 더 다양하고 실제적으로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아닐지라도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겪고 있는 경험을 그림책에 담아 그림책을 보는 어린이들이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경험을 함으로써 그들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서정숙 / 유아에 대한 공부를 통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림책에 대한 공부를 통해 삶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유아 교육을 전공하였고, 「Caldecott 메달 도서의 특성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고, 저서로 『부모의 그림책 읽어주기』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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