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4월 통권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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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비밀의 문을 열고, 놀자!

최수연 | 2006년 04월

어릴 적, 늦은 오후나 저녁 시간에 부모님이 함께 외출할 때면 엄마는 늘 커다랗고 노릇한 돈까스와 아삭아삭 양배추 샐러드를 세 접시에 나눠 담은 뒤 랩을 팽팽하게 씌워 놓고 나가시곤 했습니다. 대문 자물쇠가 찰칵 하고 잠기기도 전에 셋이 우당탕탕 달려들어 맛나게 먹어 치우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 해 두셨지요. 빈 접시들을 개수대에 놓고 나면 할 일이라곤 노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단순하고 행복한 시간.

우선 크레파스, 스케치북, 가위, 책상 의자 두 개와 빨간 보자기를 꺼냅니다. 각자 스케치북에 수박, 참외, 사과, 오이, 호박, 양파, 고구마 따위를 그리고 색칠해서 오려 냅니다. 그리고 동전과 지폐도 그려서 한 뭉치를 오려 내고요. 싱크대 서랍들을 뒤져서 끄집어낸 검정 비닐 봉지도 몇 장 갖다 놓고 시장 놀이를 합니다. 책상 의자 두 개를 마주 보게 붙여 놓고 그 위에 빨간 보자기를 덮어 씌우고 종이 과일, 종이 채소들을 진열하지요. 얼마냐, 깎아 달라, 남는 거 없다, 거스름돈이 틀렸다, 그리지도 않은 생선을 찾기도 하고요. 시장 놀이를 하면서도 세 자매가 팔지도 사지도 않은 생선이 있는데, 바로 이면수와 양미리였어요. 별나게 편식하는 버릇은 없었지만 그것들은 사람 이름 같다면서 안 먹더라는 엄마의 증언을 오랜 뒷날 들을 수 있었답니다.

『니켈이 선생님이 되었어요!』를 읽으며 비밀의 방에서 선생님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니켈을 보니 고운 색 실타래가 사르르 풀리듯 어릴 적 동생들과 손에 크레파스를 잔뜩 묻히고 시장 놀이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박의 줄무늬며 숫자만 써 넣은 알록달록 종이돈이 생생하게 그려지네요. 지금도 그 빨간 보자기의 양쪽 끝을 목 앞으로 질끈 묶고 앉아 있노라면 길고 단단해서 회초리로도 요긴하게 쓰이던 나무로 된 구두 주걱에 보따리를 달아 매고, 전래동화에 나오는 가난한 나그네처럼 바람 따라 물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걸 동경하던 여섯 살배기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동생들과 수선을 떨며 노는 것 못지 않게 혼자 놀기에도 일가견이 있었기에 미닫이문이 달린 장롱에 숨어들거나 다섯 식구 옷이 주렁주렁 걸려 있던 옷걸이의 시커먼 뒷편으로 기어들어가 멍하니 앉아 있거나 '이상한 나라의 폴'과 '빨간 머리 앤'이 살고 있는 낯선 세상을 떠올렸지요. 아무 노래나 흥얼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기도 했고요. 예나 지금이나 상상 놀이에 폭 빠지면 앞 뒤 모르고 해죽대는 건 마찬가지랍니다. 이 책의 주인공 니켈도 어른이 되면 '내일 모레 서른'이라고 괜스레 몸을 사리면서도 3초 뒤에는 히히거리며 놀 궁리로 빠져들까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엉뚱한 상상이 즐겁군요.

니켈은 낡은 곰인형 조텔과 늘 소곤소곤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요. 오늘 니켈은 말합니다. "내가 일 년 동안 학교를 다녀 봤지만 오늘처럼 지루한 날을 처음이었어." 니켈은 학교에서 수학 문제를 못 풀어서 선생님께 혼이 난 데다가 뒷자리에 앉은 심술쟁이 친구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발을 확 밟아 줬는데, 선생님은 니켈이 친구의 발을 밟는 것만 보시고 또 야단을 치셨다고 해요. "오늘 하루가 마법처럼 아주 멋진 날로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니켈은 가족들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문을 열고 지몬 아저씨를 만납니다. 지몬 아저씨는 노란 벽지 줄무늬 두 개에 가려진 비밀의 문 뒤에 삽니다. 자상한 지몬 아저씨는 니켈이 하는 모든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좋은 분이예요. 게다가 지몬 아저씨의 비밀 방에서는 안 되는 일이 없대요!

선생님들은 도무지 학생들의 마음을 모른다며, 니켈은 선생님들도 한 번 학생이 되어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몬 아저씨는 그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렇다면 네가 선생님이 되어 볼래?" 하고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니켈은 비밀 복도를 걸어 지몬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어떤 방으로 들어갑니다. 앗, 니켈의 눈앞에 펼쳐지는 건 선생님들이 학생 자리에 앉아 있는 교실 풍경입니다. 니켈은 또박또박 말하며 수업을 시작합니다. 수업을 방해하는 선생님, 아니 학생에게는 따끔한 주의를 주기도 합니다. 이 어른 학생들은 큰소리로 웃거나 서로 험담을 하고,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니켈 선생님이 "우리 중에 소리를 지르면서 책상과 의자 위를 뛰어다닐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라고 묻자 아무도 나서지 못하다가 왜 이런 걸 배워야 하냐고 투덜거립니다. 니켈은 학생을 엄하게 꾸짖으며 "다시 한 번 그런 식을 말하면 부모님을 모셔 오게 할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책상과 의자 위를 뛰어 다니고 힘껏 소리치도록 가르칩니다.

니켈의 엉뚱한 수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요. 변명하기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들이 발표하는 변명에 점수도 줍니다. 그러고는 숙제를 잔뜩 내 주고 흡족하게 수업을 마칩니다. 교실 밖으로 나온 니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학교 생활이 이렇게 힘든 줄 정말 몰랐어." 이 한 마디에서 니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답니다. 하지만 니켈은 곰인형 조텔을 한쪽 팔 가득 안고 히죽 웃고 있어요. 속상했던 마음이 풀린 니켈은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알고 자기를 야단 친 것 같다고, 내일 한 번 여쭤 봐야겠다고 지몬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옵니다. 이야기는 니켈과 아빠의 유쾌하고 다정한 대화에 이어 가족들의 저녁 식사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니켈은 맛있게 저녁을 먹고, 푹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겠지요. 발랄한 이야기 전개와 상큼한 결말이 읽는 이의 마음까지 밝게 물들여 주는 책입니다.

아이들에게 그것이 방 한구석이든 상상 속의 장소이든 자기만의 비밀 공간은 스스로 마음을 다독거리고 문제를 풀고 상황을 긍정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니켈은 상상의 힘을 불어 넣어 만들어 낸 상상 속 '비밀의 방'과 상상 속의 지지자 '지몬 아저씨'를 통해 속상한 일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다소 엉뚱한 과정을 거치지만 자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선생님의 자리에 서 보면서 결국 상대방의 입장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니켈의 밝은 상상력과 긍정성을 닮는다면 어떤 고민과 문제들도 툭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불만과 희망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니켈의 산뜻하고 건강한 놀이에 슬쩍 끼어들고 싶지 않나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친절한 지몬 아저씨가 가르쳐 주신대요. 자, 비밀을 문을 열어 주며 아저씨가 말합니다. "재미있게 놀아!"

최수연│월간 『열린어린이』를 만듭니다. 책 속에서 세상과 마음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