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1월 통권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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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이야기]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고 싶다

김장성 | 2007년 01월

설날 아침, 어느 반가의 사랑채.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예닐곱 살 사내아이가 창문을 열어젖힌다. 딴에는 새해 첫 해님을 제일 먼저 보리라 마음먹은 기세다. 하지만 해님은 없고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아이는 금세 마음을 바꿔 눈 오기를 기대한다. 눈이야 아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는 축제의 서곡이니까. 그러다가 문득 엄동의 한기를 느낀다. “엇, 추워! 얼른 옷 입자.” 아이는 하나하나 옷을 입기 시작한다. 달포쯤 전부터 어머니가 차근차근 정성스레 마련해 둔 꼬까옷, 설빔이다. 버선부터 바지, 저고리, 배자, 까치두루마기, 전복에다가 비단 두른 꼬까신 태사혜, 머리에 쓰는 호건, 잠자리매듭 달린 귀주머니까지, 갖춰 입는 옷가지며 장신구가 참 많기도 하거니와 하나같이 예쁘고 화려하다. 사이사이 실수를 섞어 가며 그 많은 옷을 혼자 힘으로 다 입은 아이는 저가 저를 생각해도 여간 대견한 게 아니다. 뿌듯함 가득 품고 이제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러 갈 차례, ‘자, 이제 복 받으러 가 볼까?’ 하고 밖을 내다보니, ‘어! 눈이다.’ 눈이 내린다. 새해 첫날을 하얗게 덮어 줄, 서설이다.

우리문화그림책 시리즈의 여덟째 권 『설빔, 남자아이 멋진 옷』에 담긴 이야기다. 독자가 아이라면 저도 한번 입어 보고 싶고, 부모라면 제 아이에게 꼭 한번 입혀 보고 싶도록 우리네 아이 옷을 참 예쁘게 그려 놨다. 바로 그거다. 마음이 동하는 책, 느낌이 있는 책을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우리문화그림책 시리즈가 채우고 싶은 욕심이다.

우리문화그림책 시리즈는 말 그대로 우리 문화를 다루는 그림책 시리즈다. ‘우리 문화’라는 주제는 어린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숙제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가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라져가는 오래된 삶의 자산들을 책으로나마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한다는, 어떤 책무감을 주는 숙제 말이다. 여러 출판사들이 그 숙제를 풀어 독자들에게 제출하고 있다. 그 모양새는 각양각색이고 다 나름의 성취와 가치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제재 자체를 풀어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책의 형식이건 지식책의 형식이건 그렇다.

그런 방식도 훌륭하지만, 우리문화그림책 시리즈는 ‘우리 문화 그림책’을 좀 다른 방식으로 풀고자 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문화책’이기 전에 ‘그림책’이고자 했다. 문화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림책이 아니라, 그림책 자체를 즐기고 나니 문화가 거기 있음을 느끼게 되는 그런 책 말이다. ‘거기 있는’ 문화에 대한 정보는 따로 지면을 두어 이야기해 준다. 그림책을 즐기고 마음이 동했을 때, 즉 관심이 생겼을 때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이제까지 여덟 권의 그림책을 만들었다. 웅장한 스케일의 창작신화로 우리 음악 사물놀이의 기원과 정신을 풀어 낸 『사물놀이 이야기』, 세상 떠난 엄마가 그리워 길을 나선 아이가 다 쓰러져가는 절집에 그림을 그린 뒤, 그림 속에서 살아나온 용을 타고 엄마가 있는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가슴 짠한 이야기 속에 단청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한 『그림 옷을 입은 집』, 참된 자아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는 의미 깊은 이야기로 우리 토종개 삽사리의 기원을 풀어낸 『사자개 삽사리』, 백제금동대향로 속 캐릭터들을 되살려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나눌 친구를 찾아 나선 꼬마 악사의 이야기로 자아낸 『누구 없어요?』 등이 이야기를 즐기고 나니 문화가 다가오는 그림책이라면, 김용택 시인이 할머니의 상례를 치르며 떠오른 시상을 옮긴 시 ‘맑은 날’에 아름다운 그림을 붙인 『맑은 날』은 흥건한 시적 서정과 이미지 속에서 우리네 생활문화의 질박한 ‘마음’을 느끼자는 그림책이며, 어린이의 눈으로 풀어낸 ‘심우도’ 이야기 『소 찾는 아이』는 문화 자산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서사성을 즐기는 가운데 우리네 정신문화의 일단을 엿보는 그림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설빔』(이 그림책은 곧 『설빔, 여자아이 고운 옷』이라는 제목으로 개정된다.)과 『설빔, 남자아이 멋진 옷』. 2006년 1월에 출간한 『설빔』은 연구하는 신인 배현주 작가의 작품이다. 우리 옷, 한복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던 작가는 그 아름다움을 어린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했다. 자연스레 그림책의 독자들인 어린이가 입는 꼬까옷에 주목하였고, 그중에서도 짓는 이의 정성이 각별히 담기며 그런 만큼 더욱 화려하고 고운 명절의 성장(盛裝), 설빔을 제재로 삼게 되었다. 주인공은 일고여덟 살 야무진 여자아이,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간밤 내 어서 입어보고 싶어 가슴 설레던, 엄마의 사랑이 담뿍 담긴 설빔을 꺼내어 차례차례 입는 과정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사락거리는 다홍색 비단치마, 오이씨 같은 솜버선, 꽃수 놓은 색동저고리에, 배시댕기 얹어 땋은 머리를 치장하는 금박댕기, 금박 물린 털배자를 하나하나 갖춰 입어 가면서 아이의 설렘은 한껏 고조되어 간다. 사이사이 옷 입은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자랑과 기쁨이 한 가득이다.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주신 박쥐무늬 수 노리개와 두루주머니를 옷고름에 걸고, 까만 공단 조바위로 볼을 가리고, 날아갈 듯 맵시 있는 꽃신을 차려 신으니, 그 설렘, 그 자랑, 그 기쁨은 차서 넘치고 그런 마음 하늘도 아는 듯 하얀 서설을 흩뿌려 준다. 우리 옷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얻어 더욱 빛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기 위해 작가는 몸살을 앓았다. 우리 옷의 섬세한 색감의 일관성을 유지하느라 그리기를 멈추지 못해 하루 내 굶기가 일쑤였고, 어른거리는 옷감의 섬세한 무늬를 그리다 멀미가 나 토하는 일도 있었다. 오래도록 입어 온 우리 옷이건만 이제 일상과는 멀어져 있는 데다, 종류도 많고 입는 방법도 다소 복잡한지라 고증의 과정 또한 멀고 험했다. 옷고름 달린 위치가 어긋나서, 노리개의 크기감이 달라서, 배경에 놓인 소품 장식의 세부가 잘못되어서, 다 그린 그림을 다시 그렸으며, 인쇄 직전에 진행을 멈추고 필름을 다시 뽑았다.

그렇게 해서 빛을 본 『설빔』은 어린 독자들과 그 부모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다음엔 어떤 예쁜 옷을 입을까 궁금해지는 구성과 그 궁금함을 만족감으로 채워 주는 고운 그림과 거기에 담긴 아이다운 마음을 보는 즐거움, 바로 ‘그림책’을 보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화, 우리 옷에 대한 관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웹 서점과 이 책 블로그에 달린 독자서평들은, 이 책을 본 아이들이 한복을 입혀달라고 졸라대더라는 독후 경험을 전한다. 우리 옷이 이처럼 아름다운 줄을 새삼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많이들 한다. 내년 설에는 꼭 온 가족이 설빔을 갖춰 입겠다는 독자들도 있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림책’의 목적을 달성한 이 그림책이 ‘문화책’의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 『설빔』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관심도 이끌어 냈다. 프랑스와 일본, 미국의 출판사들이 이 책을 자국어로 번역 출판키로 했다.

또 한 가지, 『설빔』은 『설빔, 남자아이 멋진 옷』이라는 또 한 편의 그림책을 이끌어냈다. 앞의 글머리에서 소개한 그림책이다. 『설빔』이 출간된 뒤 독자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왜 여자아이 설빔만 책으로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남자아이에게 『설빔』을 주었더니 ‘내 것이 아니잖아!’라며 골을 내더라는 전언도 있었다. 그랬다. 처음부터 짝이 있어야 할 것은 마땅히 짝을 지어 주어야 했다.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설빔, 남자아이 멋진 옷』은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배경은 그 반가의 사랑채, 주인공은 개구쟁이 남자동생. 역시 그림책으로서의 매력이 우선이었다. 여자아이의 『설빔』을 아이다운 설렘을 담아 엮었다면, 남자아이의 『설빔』은 아이다운 우쭐함을 담아 엮었다. 『설빔』 출간 뒤 딱 1년 만인 이제 막 세상의 빛을 본 이 그림책이 독자들에게 얼마만한 사랑을 받을 것인가는, 이 그림책을 얼마나 그림책답게 만들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책을 만들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에 뉴욕이나 파리, 도쿄에서 이 책의 힘이 일조하여 ‘어린이를 위한 한복 패션쇼’가 열린다면 어떨까, 그리하여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이 우리 꼬까옷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혹시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발로는 아닐까, 자국 문화에 대한 대책 없는 애착증세는 아닐까? 하는 자문(自問)도 해 보았다. 스스로 내린 답은? ‘아니다!’ 그저 예쁜 것을 만인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문화책이기 전에 그림책!’과 함께 우리문화그림책 시리즈의 지향을 말해 주는 슬로건은 ‘문화적 다양성의 존중!’이다.
김장성│사계절출판사에서 그림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예쁜 것, 맛난 것, 편한 것을 아주 좋아하며, 성의 없는 것, 저만 아는 것, 차별하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가시내』 『박타령』 『세상이 생겨난 이야기』 등 직접 글을 써 펴낸 어린이 책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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