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4월 통권 제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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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가 있는 풍경]
옛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민 사연

김은영 | 2007년 04월

옛이야기에는 약자가 지혜를 발휘해서 악한 존재나 강자를 물리치는 내용이 많다. 사회 밑바닥에 사는 존재들이 지배 계층이나 악한 존재의 강압과 횡포에 순응하다가도 어느 시점에 이르고부터는 끈질기게 저항하고 마침내 물리치거나 극복해 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권선징악의 빤한 구도 같지만 익살이 넘치고, 단순하면서도 반복되는 서사구조 속에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담겨 있어 아이들은 옛이야기 속에 쏙 빠져든다. 특히 옛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감칠맛 나는 우리 말은 듣는 재미를 한층 더해 준다.

몇 해 전 3학년을 담임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정오의 『옛이야기 들려주기』(보리, 1995)와 『팥죽 할멈과 호랑이』(보리, 1997), 정하섭의 『삼신할머니와 아이들』(창비, 1999)을 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 주었다. 처음엔 그냥 읽어 주기만 하다가 점차 요령이 생겨서 목소리에 고저장단의 변화를 주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말들을 넣거나 고향 사투리를 써 가며 들려주게 되었다. ‘이야기 듣기 자세 준비!’ 하면 아이들은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리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아이도 더러 있어서 아는 이야기라며 끼어들기도 하였지만 잠시 뿐이었고, 많은 아이들이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맛에 홀딱 빠져들었다.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를 시작할 때 “옛날 옛날, 아주 아주 까마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했고 “어디 살았냐고?” “저기 저 산 너머 마을에 살았대.” “언제까지 살았냐고?” “어제 그저께까지 살았대.” 하고는 끝을 맺었다. 아이들은 자꾸 듣다보니 처음과 끝맺음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지 다 같이 따라서 했다.

아이들이 가장 재미있어 했던 이야기는 『팥죽 할멈과 호랑이』였다. 서너 번은 족히 들려줬으리라 기억된다. 작고 여린 존재들이 호랑이를 물리치는 과정은 참으로 기발하고 통쾌하다. 그리고 자라가 엉금엉금, 밤톨이 떼굴떼굴, 맷돌이 왈강달강, 쇠똥이 어기적어기적, 지게가 겅중겅중 같은 흉내 내는 우리 말들은 움직임을 실감나게 살려 주고 이야기의 맛을 한층 살려 준다. “할멈 할멈 왜 울고 있수?” 하고 아이들이 물으면 “아이고, 오늘 밤 호랭이한테 잡아먹히게 생겨서 우는디 왜 그려?” 하고 메기고 받듯 내가 뒷 구절을 이어 간다. 그러면 아이들은 다 같이 큰 소리로 대답한다. “나한테 팥죽 한 그릇 주면 내가 호랭이 물리쳐 주지.”

그 순간 아이들은 따분했던 학습 시간, 짓눌렸던 마음을 떨쳐 버리고 맘껏 웃기도 하고, 요즘 말로 ‘끼’ 있는 녀석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어흥 어흥’ 하면서 짝에게 두 앞발을 쳐들고 덮칠 듯 덤벼드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한 녀석이 앞으로 나오면 다른 녀석들도 덩달아 나와서 호랑이나 다른 등장 인물들 흉내를 내고, 그러다가는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어 내가 앉은 자리를 에워싼 채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들은 마지막 부분이 가장 재미있나 보다. 여러 약한 존재들이 힘을 합쳐 호랑이를 물리치는 장면이다. 그 장면만 들려달라고 졸라대는 녀석도 있었다. 호랑이가 할머니를 잡아먹으려고 부엌에 가서 불을 댕기다가 밤톨에 눈을 얻어맞고 자라에게 손을 깨물리고, 맷돌에 머리를 찧고, 송곳에 똥구멍을 찔리는 장면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나 듣는 아이들도 우습고 통쾌하여 눈물이 날 정도로 웃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두 번째 들려준 날, 짓궂은 한 녀석이 친구들에게 똥침을 놓은 것이었다. 서로 친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똥침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적 있었고, 주로 자기보다 힘이 약한 상대를 골라서 불현듯 똥침을 놓고 달아나며 고소해 하였기에 당한 아이는 울면서 내게 다가와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는데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특히 이 녀석은 여학생에게도 똥침을 놓고 달아나서 원성을 샀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똥침을 당한 여자 아이가 “선생님 우리도 재용이한테 똥침 놓게 해 주세요.” 하였다. 나도 이 녀석이 얄미웠던 터라 그러자 하고서는 당한 아이들에게 똥침을 놓으라고 하였더니 이 녀석은 조롱하듯 웃으면서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어서 허탕을 치게 하였다. 그 때였다. 여자 아이가 “선생님, 재용이를 호랑이 시켜요.”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퍼뜩 ‘바로 그거야, 연극으로 해 보면 재밌겠는 걸.’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좋다. 재용이 녀석을 호랑이 시켜서 우리 연극 한번 해 보자.” 하였더니 그 아이들이 좋다고 난리였다. 서로가 하겠다고 앞에 나와서 시늉을 하고 야단들이었는데 시간이 없으니 한 부분만 연극으로 꾸며 보자고 했다. 할머니를 잡아먹으려고 온 호랑이를 물리치는 장면, 즉 호랑이가 부엌으로 가서 불을 켜다가 죽는 마지막 장면이다.

마침내 연극을 하게 되었다. 무대 장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책걸상만 뒤로 조금 밀어 내고 칠판에 아궁이 모양만 분필로 그려 놓았을 뿐이다. 소도구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은 교실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등장 인물들의 특징에 알맞은 도구들을 금방 찾아 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들이 서로 하겠다고 난리여서 다음에 시간 날 때마다 번갈아 가면서 하자고 설득하면서 겨우 배역을 정하였다.

팥죽 할멈은 여자 아이가 맡았다. 재용이는 호랑이를 맡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나 송곳(여섯 명의 친구들)에게 똥침을 당해야만 하였다. 밤톨은 아이 한 명이 빨간 사인펜을 손에 감추고 있다가 호랑이가 아궁이(교사용 책상) 속을 들여다볼 때 호랑이 얼굴에 동그라미를 그려 주기로 하였다. 자라는 동물이어서 배역을 맡은 아이가 호랑이 앞발(재용이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기로 하였다가 물 항아리 속에 숨어 있어야 하였기에 고무 양동이(물 항아리) 속에 서류 집게를 든 팔을 담그고 있다가 재용이 손가락에 물리기로 하였다. 맷돌은 탬버린을 쓰기로 하였는데, 키 큰 아이가 들고 있다가 호랑이가 펄쩍 뛰어오르면 위에서 소리는 크게 나되 아프지 않도록 가죽이 있는 가운데 부분으로 머리를 내려치기로 하였다. 송곳은 무생물이지만 재용이에게 똥침을 당한 아이들 모두가 송곳이 되었다. 재용이도 잘못한 것이 있었기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쇠똥은 마땅한 물건을 고르지 못해 비닐 봉지로 하였고, 나중에 급식으로 바나나가 나오면 껍질을 쓰자고 하였다. 멍석은 내가 입던 운동복 상의로 정했으며, 지게는 아이들 넷이서 각자 호랑이 팔 다리 하나씩 붙잡아서 밖으로 들고 나가기로 하였다.

호랑이 : 할멈, 불은 왜 꺼!
팥죽 할멈 : 날 잡아 먹으려거든 불이나 켜고 잡아 먹어라 이놈의 호랑이야.
호랑이 :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댕기는 시늉을 한다.)
밤톨 : (아궁이 속에서 갑자기 팔이 불쑥 나와서 빨간 사인펜으로 호랑이 눈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호랑이 : 아이고, 호랑이 눈 살려!(손으로 눈을 감싸 쥐며 물 항아리를 찾아 손을 넣는다.)
자라 : (고무 양동이 속에서 호랑이 손에 집게를 물린다.)
호랑이 : 아이고, 호랑이 손가락 살려!(손가락 끝을 물린 호랑이가 펄쩍 뛰어 오른다.)
맷돌 : 탱!(뛰어오른 호랑이 머리를 탬버린으로 세게 친다.)
호랑이 : 아이고, 호랑이 머리야!(머리를 감싸며 부엌 바닥으로 떨어진다.)
송곳 : (아이들이 두 손바닥을 모아서 호랑이 엉덩이에 차례로 똥침을 놓는다.)
호랑이 : 아이고, 호랑이 똥꼬 살려!(두 손으로 엉덩이를 감싼다.)
쇠똥 : (콰당! 호랑이가 비닐봉지를 밟고 넘어진다.)
호랑이 : 아이고, 호랑이 나 죽었다!(죽어가는 목소리로.)
멍석 : (운동복 상의를 들고 나와 재빨리 쓰러진 호랑이를 감싼다.)
지게 : (넷이서 호랑이 팔 다리 하나씩 붙잡고 교실 밖 복도로 나간다.)

연극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난리였다. 일찍 끝난 옆 반 아이들까지 복도 창가에 서서 구경하며 웃고 즐거워하였다. 연극을 통해서 재용이 녀석에게 당한 아이들은 반 전체 아이들 앞에서 통쾌한 복수를 했고, 재용이 또한 반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인 벌을 받은 셈이었다.

연기에 재주가 없어도 되는 연극,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연극, 대사를 외우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연극, 배우나 관객이 모두가 하나가 된 유쾌한 연극이었다. 한편, 옛이야기를 연극으로도 보여 줄 수 있다니, 그 때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 옛이야기는 들려주기도 재미있지만 연극으로 꾸며도 재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2월 말경 ‘어린이와 문학’ 총회에서 서정오 선생님을 만나 옛이야기에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묻다가 권정생 선생님께서 쓰신 「팥죽 할멈과 호랑이」의 극본이 있다고 들었다. 극본을 찾아 보내 주신다고 하셨으니 올 해 새로 옮긴 학교에서는 학예회 때 「팥죽 할멈과 호랑이」로 연극을 해 볼까 생각 중이다. 여의치 않으면 내가 직접 써 보거나 아이들과 함께 써서 연극을 해도 좋으리라. 새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연극까지 할 생각에 벌써 마음이 바빠지고 설렌다.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팥죽 할멈과 호랑이』(서정오 글, 박경진 그림, 보리, 1997)에서 가져왔습니다 ━ 편집부.
김은영│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동시로 등단하였고, 동시집 『빼앗긴 이름 한 글자』 『김치를 싫어하는 아이들아』 『아니, 방귀 뽕나무』를 펴냈습니다. 지금은 남양주 창현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시를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