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통권 제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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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가 있는 풍경]
아이들 마음에 가득한 예술 감각

강승숙 | 2007년 11월

그림책을 어릴 때부터 읽으면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자기 안에 갖고 있던 어떤 문제가 풀리기도 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십 년 가까이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면서, 이런 주장을 실제로 경험하며 즐거울 때가 있다. 더욱이, 우리 반 아이들이 조금은 다르다는 말을 다른 이들로부터 들을 때 교사로서 더욱 큰 기쁨을 느낀다.

“선생님 반 아이들은 확실히 미술 시간에 색을 쓰는 게 달라요. 색을 자유롭게 잘 쓰는 것 같아.” 미술 전담 선생님이 얼마 전 내게 한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쑥스러우면서도 속으로는 무척 고맙고 기쁘다. 꼭 그림책을 많이 보여 준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림책 영향이 클 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림책을 보여 주는 일 말고도 나는 특별히 일상에서 아이들이 예술 감각을 넉넉히 표현하는 데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편이다. 제 각기 손으로 만드는 수첩이나 보고서 제목 쓰는 일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이게 한다.

“얘들아, 미술은 미술 시간에만 하는 게 아니야.” 일상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 미술이 있다는 점을 애써 강조한다. 보고서 표지나 수첩 표지를 예쁘게 해 놓으면, 이어지는 장에도 정성을 들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만든 견학 보고서, 독서 목록 수첩, 동시 감상 자료집 표지는 나름대로 멋을 부린 것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그림책을 보여 줄 때마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화면은 아이들의 예술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고니』에서 단순한 색을 입힌 판화가 화면 가득 펼쳐지면서 마음으로 메아리쳐 들어오는 슬픈 여운, 점점이 찍어 낸 그림 속에서 신비롭게 이야기가 펼쳐지는 『칠기공주』, 곱디고운 민화풍으로 그려진 『아씨방 일곱 동무』 같은 그림책을 보면서 아이들은 때로 그림책 보는 일보다 종합장에 그림 그리는 일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보여 줄 그림책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도 시간이 없어 읽어 주지 못한 날이면 눈치 빠른 아이들은 살살 다가와 제 종합장에 그림책 표지를 미리 그려 놓기도 한다. 그리고는 언제 읽어 줄 거냐고 보채는 것이다. 이런 귀여운 투정은 나를 즐겁게 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 대부분이 살림살이가 썩 넉넉하지 못하다. 해외 영어 연수는커녕 평소 학원 다닐 형편조차 안 되는 아이들도 많다. 이 아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여든 살 노인이 되어서도 시를 쓰고 동무들과 모여 시 낭송을 즐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쳐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 받기 어려울 때 책으로부터 힘을 얻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으로 아이들에게 동시를 가르치고 책을 읽어 준다. 가진 것을 바탕으로 삼아 소박한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게 하는 법도 알게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교실을 작은 도서관처럼 꾸미려고 애쓴다. 우리 교실 바로 옆에 있는 도서관 사서는 가끔 우리 교실에 와서 여기는 늘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따금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우리 교실은 좀 복잡하다. 열심히 정리하고 닦고 하지만 뭐가 많고 복잡스럽다. 그렇지만 볼거리는 많다. 교실 앞쪽 게시판이나 뒤 게시판에는 아이들 솜씨가 묻어난 작품은 물론 게시판 제목들이 붙어 있다. 책은 교실 뒤, 앞, 옆에 고루 있다.

아이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가운데 하나는 교실 앞문 쪽에 놓인 조그만 책상이다. 키 작은 책상 두 개를 붙인 뒤 짙은 쑥색 책상보를 덮어놓은 이 책상 위에는 나무 책꽂이가 있고, 내가 즐겨 보는 시집들이 꽂혀 있다. 아이들이 들춰보기도 한다. 책꽂이 바로 앞에는 신문에서 오려 끼운 권정생 선생님 사진이 손바닥만한 액자에 들어 있고 그 앞에는 아이들이 ‘데코레이션 찰흙’으로 만든 동화 속 주인공들이 줄줄이 서 있는데 모두 메모꽂이를 달고 있다. 여기에 『열린어린이』나 『아침독서신문』에서 오린 책 정보들을 꽂아 둔다. 아이들이 그린 종이 인형도 꽂아 두었다. 복잡해 보이기도 하는 이 책상이 나는 참 좋다. 형편이 되는 대로 교실 곳곳에 그림책과 어울리는 인형이나 그림도 같이 전시하고 싶다. 색깔 있는 예쁜 책꽂이를 준비해서 권정생 선생님 작품 한 칸,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소재로 한 작품 한 칸, 그밖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주제별로 책을 돌려가며 꽂아 놓을 칸도 마련하고 싶다.

게시판 곳곳에는 아이들이 만든 작품들이 걸려 있다. 내가 즐겨서 이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날마다 몇 시간씩 지내는 이 교실 공간을 즐거운 공간, 아름다운 공간으로 느끼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놀잇감도 두루 있어서 공부가 끝나고 남아서 놀다 가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이런 분위기가 두루 아이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풍부하게 만들어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주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이들한테 거는 내 기대는 얼마 전 반 아이들 모두가 참여한 한 출판사의 독후감 행사 때 멋지게 드러났다. 나는 그 날 몹시 흥분했다. 아이들이 세 시간에 걸쳐 만든 작품을 보면서 아주 놀라웠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참여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독후감 공모 행사였는데 깜빡 잊고 있다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생각나서는 허겁지겁 그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먼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갑작스레 참여하게 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하고는 상금도 걸려 있으니까 한 번 열심히 해 보자고 말했다. 아이들은 이미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책 고르는 일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교실과 도서관에 있는 책을 더 넉넉히 준비해서 교탁에 올려놓았다. 독후감을 써도 좋고 미술 표현을 해서 나타내도 좋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못 심각하게 책을 고르고는 표현 방법을 정한 뒤 밑그림을 그려 와서 내게 보여주고 어울리는 재료를 받아갔다.

아침 자습 시간부터 3교시가 지나도록 작업을 하면서도 아이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는 놀라움을 보였다. 물론 상품에 대한 욕심도 컸으리라. 아이들은 활동을 하면서 몇 차례나 내게 와서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보면서 며칠 전에 이 행사를 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빚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기도 했다. 아이들이 알맞은 재료를 준비하고 구상할 시간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보여준 창의성과 열정은 눈부실 정도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3교시가 끝나 가면서 완성된 작품이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다. 수첩 한 권에 그림책에서 느낀 감동을 그림과 색종이 접기, 글로 표현한 작품도 있고 붓 펜과 사인 펜을 써서 마음에 남는 그림 한 장면을 정성껏 그려온 아이도 있었다. 작품이 칠판에 걸릴 때마다 아이들 입에서 “와아!” 하는 감탄사가 쏟아졌다. 나와서 완성된 작품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저기서 “아, 허리 아프다.” “아 힘들어.” 하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가 하는 일에 열중했다. 작품이 거의 완성되고 행사에 제출할 작품을 추려 보니 열다섯 편이 되었다. 하나하나 개성이 넘쳤다. 출품작을 아이들한테 보여 줄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검정 도화지 두 장으로 동화책을 본 느낌을 표현한 작품이 있었는데 그 작품은 내가 보기에도 놀라웠다. 검정색 표지에 색종이와 색연필로 제목을 쓰고 안쪽에는 주인공 두 명을 흰 종이에 그려서 붙여 놓았는데 화면에 배치한 그 감각이 대단했다. 작품들을 봉투에 넣기 전에 아까워서 모두 디지틀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고는 작품을 가지고 도서관에 가서 사서한테 보여주었다. 사서는 작품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작품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 있으면서도 아주 세련되었다고 했다. 작품들은 한 학부모 도움을 받아 겨우 시간에 대어 우체국에서 부칠 수 있었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이 부쩍 자랐다. 움직임이 왕성하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한 4학년 아이들, 늘 시끌시끌하고 다툼도 잦지만 열심히 해 보려는 의욕 넘치는 눈빛으로 가득하다. 앞으로는 그 동안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인형극이나 연극 같은 발표회를 해 볼 생각이다. 모둠별로 전지 같은 큰 종이에다 커다랗게 주인공을 그리고 갖가지 재료로 꾸며 보는 활동도 해 볼 생각이다. 완성된 작품 옆에서 기념 사진도 찍으면 좋을 것 같다. 아이들 마음에 자라고 있는 예술 감각이 펼쳐질 자리를 넉넉하게 마련해 볼 생각이다.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칠기공주』 (웅진주니어, 2006)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편집부.
강승숙│20여 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지금은 인천 주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냅니다. 아이들하고 동시 낭송하기, 시 쓰기, 그림 그리기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며 틈틈이 동화책을 읽어 주거나 옛이야기를 들려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