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통권 제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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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 읽어 주는 의사 선생님]
탐욕, 우리 삶의 포식자

이나미 | 2008년 02월

이형진 그림 (『불가사리』, 웅진주니어 1998)

필요도 없는 물건을 꼴사납게 탐하는 모양을 게걸스럽다며 부끄러워했던 시절이 있긴 했었다. 숲에서 나무를 해올 때, 산나물을 따올 때, 땔 만큼 먹을 만큼만 해 와야 산신이 노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겸손한 심성이 우리 조상들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이젠 “부자 되세요.”가 무슨 정겨운 덕담이라도 되는 양, 재물을 신봉하는 삶의 덕목은 잘 먹고 잘 쓰는 것에 불과하다. 하시라도 부끄럼 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라고 끝없이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시류에 토악질 나는 이들은 그저 세상모르는 낙오자 취급받기 십상이다.

남보다 좋은 차, 호화로운 집 갖는 게 만약 부자의 정의라면, 이젠 부자라고 행복하게 자족할 날이 절대 올 리 없다. 나보다 더 잘 사는 ‘남’이 그 어딘가 꼭 존재할 터이니. 남보다 젊어 보이고 서양 인형처럼 얼굴을 바꾸는 것이 행복과 미의 기준이고 목표라면, 그들의 미래는 끔찍하다. 누구나 세월이 가면 늙고 추레해지니까. 돈 많이 휘감고, 겉모습 잘 꾸미고 있으면, 짐승 같은 심장을 지니고 있건, 악마에게 정신을 팔았건, 상관 않는 이 허랑방탕한 시대, 도덕이나 윤리란 단어는 마치 사어(死語)처럼 낯설다. 돈에 인생의 모두를 쏟아 붓는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욕망교 신자들의 종말은 과연 어디인지, 사는 게 어지럽고 무섭다. 무엇이든 다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가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이 같은 한국인들의 탐욕에 대한 엄정한 경고가 아닐까.

더운 여름, 산 속에 혼자 살던 할머니는 땀이 줄줄 흘러서 때를 밀다 무심하게 때 뭉치를 만든다. 한데 그 작은 때 뭉치는 생명체가 되어 방 속 쇠붙이들을 하나씩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란 괴물로 변한다. 할머니 방을 빠져나간 불가사리는 마침내 온 마을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먹어 치워 사람들을 도탄에 빠트린다. 창으로 찔러도 구덩이에 파묻어도 불을 질러도 불가사리의 식탐을 막을 길 없으니 온 마을이 다 황폐하게 된다.

불가사리의 미친 식성 때문에 난리 난 마을을 보고 할머니는 큰일 났다 싶어 결국 산에서 내려와 해결사가 된다. “이놈 불가사리야, 왜 이리 장난이 심하냐.” 하고 등을 탁탁 치니 불가사리 입에서 쇠붙이가 쏟아져 나오더니 다시 조그만 때 뭉치가 되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들고 산으로 돌아가고 그 후론 아무도 그 불가사리를 본 사람이 없다. 영화 「괴물」에선 불화살에 급소를 맞아 괴물이 죽어 버리지만, 옛날 얘기 「불가사리」에선 그저 할머니의 싱거운 말 한마디와 허술한 손아귀에 힘을 잃고 만다.

산 속에 사는 할머니란 마귀할멈이나 마녀(Witch)의 원형적 이미지(Archetypal image)이다. 외로운 마녀는 주류사회에서 버림받은 망각의 대상이다. 자손 많아 다복하고 행복한 동네 할머니들과는 달리, 산 속에 혼자 사는 외로운 할머니에겐 한과 화만 가득할 수도 있다. 생식능력도 노동력도 없으니, 만들어 내는 거라곤 말라 버석거리는 피부의 더러운 때밖에 없다. 그처럼 별 볼일 없는 할머니의 유일한 산물인 때 뭉치가 불 같은 복수극을 벌이는 것은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았던 마을사람들에게 내리는 사필귀정의 징벌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굶주렸던 할머니의 유일한 자식 같은 때 뭉치가 쇠붙이를 몽땅 먹어 버려 마을 사람들을 기아에 빠뜨리는 것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못 먹고 못 살았던 한(恨) 때문에 무분별한 탐욕으로 세상을 척박하게 바꾸어 버린 현대 한국인들의 못된 심성처럼, 불가사리는 평화로운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만다. 궁상맞고 비루한 삶을 살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금은보물 앞에 광란의 삶에 빠진 이 시대 졸부들의 광기와 다름이 없다.

한데,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때 뭉치가 할머니의 ‘장난치지 말라.’는 주문 한마디로 다시 제 모습을 찾고 산 속으로 사라지는 이야기를 현실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폭군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질식시키던 욕망의 범람을 할머니의 싱거운 말 한마디가 치료해 준다니. 도대체 어떻게?

숨을 골라 깊이 들여다보면, 숲 속 할머니의 철저한 외로움에 그 치유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의식에서 제멋대로 자라난 탐욕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리 정신을 깨우쳐 주는 매서운 죽비는 버림받은 할머니의 철저한 가난과 외로움인 것이다. 혼자가 되어, 바닥을 치는 결핍을 경험해 본 다음, 물질적 풍요는 절대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없다는 엄정한 인생의 진실을 설파할 수 있는 이들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사부가 될 수 있을 듯. 배고픔과 고독이 역설적으로 가르강튀아의 멍청한 탐심을 치유해 주는 그림자인 사실을 아는 이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시하고 깔보고 따돌려 왔던 가난과 고독이라는 흥청망청한 삶 뒤의 그림자가 갖고 있는 가치를 우리가 다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마음의 병인 탐욕이 나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천박한 밤, 어지러운 네온사인 뒤에도 누군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구린내 나는 욕망에 굴복한 자신이 끔찍한 괴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수 있다면, 그래서 적어도 불가사리처럼 끝없이 먹어 대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장난치지 말라는 할머니의 평범한 말 한마디로 아주 많이 아프게 맞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한다. 뱃속의 빵빵한 쇠붙이들로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지 않다면, 그래서 늦게나마 다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꺼칠하지만 부드러운 손길과, 늙어 쉬었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미친 불가사리 같은 우리 탐심을 치유해 주는 할머니시여, 정말 언제까지 꼭꼭 숨어 모습을 감추고 계실 터인가.
이나미│서울대학교에서 정신의학을, 뉴욕에서 분석심리학과 신학을 공부한 정신과 의사입니다. 단편 소설 「물의 혼」으로 『문학사상』에서 등단하였고 2002년에는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를 펴냈습니다. 꿈과 신화,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을 분석심리학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