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통권 제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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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잊고 있던 단골을 만나다

김정미 | 2008년 02월

면지에서 퀴퀴한 냄새가 배어 나옵니다. 자려고 불을 끄고 뒤척이다가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 잠깐 일어나 앉았을 때, 바로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색깔. 뭔가 생소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어둠이 눈에 익을 즈음, 피부에 닿는 서늘함이 면지에 스며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꽁꽁 숨겨 놓은 색 검정과 오묘한 보라, 그 밖에 뒤섞인 색들이 음습한 기운마저 가져옵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찾는다는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연이네 엄마는 ‘무당’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주 찾는 단골무당이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연이 엄마를 ‘단골네’라고 부릅니다. 화려한 그림이 그득 담긴 방에는 귀를 틀어막은 연이가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연이는 사람들이 부르는 엄마의 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손님이 찾아와 엄마를 부릅니다. “단골네, 단골네.” 스멀스멀 피어나는 희뿌연 연기에 모습을 감추고 시커먼 손님이 문 앞에 섰습니다. 하지만 입을 앙다문 엄마는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 며칠간 찾아오는 그 손님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오늘 밤에도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며칠간 문을 두드리던 바로 그 손님입니다. 엄마는 굿을 하러 나가며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연이 마음이 엄마와 같을 리 만무합니다. 신발을 잃어버렸다는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낡은 고무신을 던져 주었으니까요. 손님은 신을 신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고, 다음 날 마을은 희뿌연 연기에 휩싸입니다. 큰 기와집에 사는 영감이나 작은 초가에 사는 아이, 너 나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온통 곰보처럼 변했습니다. 마마가 퍼진 것입니다. 삽시간에 온 마을을 삼켜 버린 마마는 사람들 정신까지 이지러뜨립니다. 정다웠던 사람들은 누가 들어올 새라 대문을 걸어 잠그고, 얼굴을 대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다툼을 벌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굿을 해 달라며 단골네를 부르지만, 엄마는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않지요. “이렇게 싸우기만 하면 뉘 댁에도 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 조용해진 마을. 가시 돋친 넝쿨이 담장이 되어 집집을 흉하게 휘감았습니다. 엄마는 정성껏 상을 차리고 바닷가로 나가 노래하며 춤추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홀로 굿을 하는 엄마를 멀리서 지켜보는 연이의 뒷모습이 크게 자리합니다. 이제 ‘단골네’를 부르던 소리에도 귀를 틀어막던 연이가 엄마 곁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엄마를 찾아왔던 사람들을 이번에는 연이가 불러 모읍니다. 마을에는 가시 넝쿨이 사라지고, 하나 둘 문이 열립니다. 모두를 위해 굿을 하고 있다는 말에 사람들도 굿판으로 나오지요. 밝은 노랑과 어두운 파랑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지만, 그 여백은 오히려 조화롭습니다. 굿판은 신명 나게 커집니다. 어느새 연이는 장구를 메고 엄마와 장단을 맞추고, 사람들은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춥니다. 반달눈이 된 연이, 좀처럼 표정 없던 엄마의 얼굴에 살짝 자리한 미소가 반갑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절정에 이를 무렵, 사람들 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손님은, 슬그머니 바다로 빠져 나갑니다.

『단골손님』은 ‘무당’을 다룬 그림책임에도 불구하고, ‘무당’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첫 페이지에서 연이 엄마가 단골무당이라고 짧게 알리고, 마마가 온 마을을 삼켰을 때 굿을 하러 나가는 엄마의 입을 통해 “이게 바로 단골무당이 해야 할 일이란다.” 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저 연이와 연이 엄마의 모습으로 무당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무당이 가진 이런저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제를 지내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에 주목한 것입니다.
면지를 다시 보았습니다. 퀴퀴한 냄새가 아니더군요. 생소함, 두려움, 음습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던 이들의 삶,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 그리고 우리 문화가 깃들어 있는, 향기였습니다.
김정미│오픈키드 컨텐츠팀. 여기저기 정겨운 단골이 많습니다. 동네 반찬 가게에서 장아찌를 사고 졸래졸래, 집 바로 옆 슈퍼에서 강냉이를 끼고 쫄래쫄래. 운동복 차림으로도 부담스럽지 않아 좋고, 얼굴색이 다를 땐 먼저 알아봐 주어 더욱 고마운 달골이지요. 저는 그들에게 늘 반가운 단골손님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