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통권 제65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사진과 시
책 세상 나들이
즐거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속 깊은 책 이야기

[책·그림책 이야기]
외로움과 허기, 그리고 책

이상희 | 2008년 04월

스쳐 지나가는 많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문득 우리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이 시시때때 우리의 생을 찬란히 물들이듯, 우리를 둘러싼 숱한 책들 속에서 한 권의 책이 자기 앞에 ‘출현’하는 때가 있는 법이지요. 걸핏하면 앓아눕곤 하는 막내를 위해 넷째 오빠가 사다 준 『얄개전』이, 내게는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가랑가랑 시름시름 앓느라 자꾸 뜨거워지는 베개를 뒤집어 베며 천정의 격자무늬를 세어 보고 또 세어 보던 유년의 퀭한 시간은, 그 때, 책이 출현한 순간부터 비로소 견딜 만해졌더랬습니다. 비록 고전 명작은 아니었어도 교과서 말고는 처음 가져 본 내 책이었으니까요.

우리 집에는 나하고 터울이 크게 진 오빠들과 책 읽기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한 ‘이광수 전집’이며 ‘한국문학전집’이며 월간지 『신동아』 같은 것이 쌓여 있었을 뿐 늦둥이 초등생 눈높이에 맞춰 따로 마련된 책이라곤 없었습니다. 『얄개전』과 또 누군가에게서 선물 받은 어린이 잡지 『새소년』을 읽고 또 읽고 닳도록 읽고 나니, 더는 읽을거리가 없었지요.

이제 막 글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만나게 된 나……. 나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궁핍이었습니다.

그 궁핍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한 번은 온 가족이 봄맞이 대청소를 하면서 오빠 둘과 다락 정리를 맡았다가 언니 오빠들의 해묵은 교과서 묶음 속에서 국어책을 찾아 내고는 ‘금광’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그 속에는 진짜 동화책까지 두어 권 있어서 ‘어, 그거? 옛날 옛적에 학교에서 빌려와서 안 갖다 줬나 봐.’ 하는 누군가의 뻔뻔스런 설명을 듣고도 이건 틀림없이 ‘천사가 내게 주고 간 선물’이라고 믿었지요.

그 날 내가 맡은 일은 아래에 있는 오빠 둘이 올려 주는 물건들을 받아 다락 안쪽으로 차곡차곡 밀어두는 것이었는데,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책을 뒤지고 읽느라 다락 구석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야유를 한 몸에 받기도 했어요. 어쨌든 남쪽 바닷가 도시의 그 적산 가옥(얼마 전 부산 강연 갔던 길에 찾아가 봤더니 집은커녕 동네가 몽땅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락은, 드디어 책이 출현한 덕분에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내게 도서관이자 요긴한 밀실이 되어 주었습니다.

『브루노를 위한 책』 또한 브루노 앞에 처음으로 책이 출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울라의 안내로 책을 만나기 전까지 브루노는 새 바지·새 스웨터·새 신발·새 벨트·새 스티커 같은 소비 사회의 부모가 제공하는 사랑의 물품으로 연명하며 (우리 모두가 그렇듯)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적 외로움과 허기를 달래려 애쓰지요.

울라와 브루노, 브루노와 울라…… 둘 다 ‘대가족 제도나 잘 화합된 공동체’의 포근한 양육과는 거리가 먼 현대 가정의 아이들이지만, 책(이야기)을 통해 어느 정도 만족스런 존재로 독립성을 확보한 채 새로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지혜를 짜 내기도 하는 울라에 비해 브루노는 훨씬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브루노를 책과 이야기의 세계에서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로 이끌기 위해 매번 새로운 꾀를 짜내는 울라/ 울라하고 놀고 싶지만 함께 나눌 것도 없고 울라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브루노…….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는 두 아이의 같고도 다른 상태를 작가 특유의 선명하고도 정치한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발과 옷과 양말이 똑같은 채로 등장하는 울라/ 장면마다 다른 신발이며 옷을 입고 등장하는 브루노, 아빠가 허용한 온갖 책에 둘러싸여 자족감을 누리는 울라(그러나 또래 친구와 그 자족감을 현실에서 나누고자 하는 울라)/ 부모에게서 얻은 새로운 물건으로 자기를 감싼 채 문을 두드리는 브루노(그러나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가 버리는 브루노)…….

울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루노는 좀처럼 책과 ‘만나’지 못합니다. 울라의 부탁을 들어 주듯 울라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몇 페이지 들춰 보고, 어른들이 보는 책에서 무서운 그림들을 보기도 하지만, 아직 ‘책의 출현’에 맞닥뜨리지는 못하는 거지요. 마치 우리가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더없이 소중한 것을 보고도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해, 깨달을 때가 못 되어, 속절없이 비껴 지나가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제 울라는 브루노의 방문이 뜸한 사이에 좀 더 심오한 꾀를 생각해 둡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시도는 적중해, 브루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울라는 브루노 앞에 바짝 다가섰어요.
목에 붙인 반창고가 잘 보이게 말이에요. 브루노는 놀라며 목이 왜 그러냐고 물었어요. “뱀이 물었어.” 울라가 말했어요.
“뱀이 어디 있는데?”
“책에서 나왔어.”
“정말? 어떤 책인데?” 브루노가 물었어요.
“저 파란 책. 마술 책인 것 같아. 거기 있는 건 모두 살아있어. 뱀뿐만이 아냐. 그 책은 아주 조심해서 읽어야 해.”
“거짓말! 누가 그걸 믿어? 어디 보여 줘 봐!”


브루노는 울라의 인도로 책 속으로 들어갑니다. 용이 공주를 잡아채어 가고, 왕자가 새의 도움을 받아 바다 건너 저 멀리 바위섬 꼭대기의 용을 해치우고 공주를 구해 내어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지요. 그 책은 울라네 것이고 울라네 집 책장 높은 데 있지만, 이제 꼭 ‘브루노를 위한 책’이 되었습니다. 브루노의 생에 출현한 책 중의 책, 모든 책들의 총화가 된 거지요.

브루노는 지혜의 뱀에게 물린 채 우리와 같은 독자가 되어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똑같이 자기 앞에 출현한 책을 통해 지혜의 뱀에게 깨물린 이들을 알아 보고 친구로 삼아 책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쓰기도 하면서 살아가겠지요. 울라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꾀를 내어 아직 책을 모르는 이를 데리고 책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면서요.

세상 모든 아이들이 ‘브루노’ 아니면 ‘울라’라고 생각하면, 내 손을 탄 책이 그들 앞에 출현할 한 권의 책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오늘 책을 쓰고 만들고 건네는 나의 일들이 또 한 번 마음 뜨겁게 다가옵니다.
이상희│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지금은 시와 그림책 글을 쓰면서 원주에서 그림책 전문 꼬마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새끼 서 발』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잭과 콩나무』 등이 있고, 아주 많은 영어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