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통권 제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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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만드는 이야기]
달콤한 인문고전 맛보기

김준영 | 2008년 04월

바야흐로 ‘논술 시대’가 되었다. 서점에는 논술 관련 책이 넘쳐나고, 수많은 논술 학원들이 성업 중이다. 또한 해마다 대학 시험의 논술 고사 출제 경향이나 예시 문제 등이 발표되기도 한다. 그런데 매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으니, 천편일률적인 모범 답안을 외워 쓴 학생들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남의 유명 논술 학원인 ‘ㅁ’ 학원 원장은 “논술에 강하려면 그만큼 많은 책을 보고 많은 글을 써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 고전이 있다. 논술 시험은 남의 글을 인용하고 남의 주장을 대신 써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밑바탕에 깔린 지식을 가지고서 분명한 자기주장을 논리 정연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이 단순히 옛날 책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고전의 사전적 의미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인데, 여기서 주목할 내용은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이라는 대목이다.

처음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의 기획이 시작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기획에 포함된 몇몇 인문고전들을 알고 있는지 조사해 보았다. 대부분 대학 교육을 받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제목만 알았지 책을 읽어 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도 요약판을 보았거나 줄거리만 아는 정도였다. 인문고전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지만 역시나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었던 것이다. 사업적인 검토를 위한 회의를 가졌을 때 자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 팔리겠는데.”라는 반응이었지만, 또 한편으로 “그런데 과연 그 어려운 인문고전을 만화로 만든다 한들 재미있을까?”라는 우려도 있었다. 학습 만화든 창작 만화든 만화 기획의 첫 번째 과제는 당연히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을 밀어붙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찌되었건 인문고전 읽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서울대에서 발표한 인문고전 100선의 도서 목록을 보면 수업 시간에 제목만 들어서 알고 있거나, 혹은 어디서 들어본 듯한, 기억이 날듯 말듯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키아벨리도 알고 마키아벨리즘도 알지만 막상 『군주론』을 읽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알지만 그 진화론이 집대성된 『종의 기원』을 읽어 본 사람은 전공자 중에도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이처럼 인문고전은 ‘인류의 지혜가 응축된 지적 양식’이자, ‘지난 날 우리들 삶의 뿌리와 줄기가 되어 왔으며 우리의 삶을 창조적으로 풀어 나가게 하는 인류 공통의 언어’지만 어른은 물론 한창 공부해야 할 청소년들도 학교 공부에 치여 고전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큰맘 먹고 고전을 읽어 보려 해도 막상 책을 사서 펼치면 왠지 딱딱하고 어려워 채 몇 문장을 읽기도 전에 포기해 버리게 된다. 그래서 만화가 필요한 것이다. 어찌 보면 어렵고 딱딱한 인문고전과 말랑말랑한 재미를 주는 만화가 서로 어울릴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문고전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선 만화만큼 좋은 매체가 없었다.

기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먼저 시중에 나와 있는 인문고전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웬걸, 정말로 너무 어렵거나 단 한 종만 있는 것, 심지어 아예 국내에 번역서가 나와 있지 않거나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들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하여 그중 우선 『헤로도토스 역사』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마키아벨리 군주론』 『루소 사회계약론』 『다윈 종의 기원』 『데카르트 방법서설』 『플라톤 국가』 『홉스 리바이어던』 『갈릴레이 두 우주 구조에 대한 대화』 『밀 자유론』 『애덤 스미스 국부론』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논어』 『노자 도덕경』 『맹자』 『사마천 사기열전』 『쑨원 삼민주의』 『명심보감』 『법구경』 『일연 삼국유사』 『김부식 삼국사기』 『유성룡 징비록』 『이익 성호사설』 『정약용 목민심서』 『이중환 택리지』 『신채호 조선상고사』 『백범일지』 『박은식 한국통사』 이렇게 30권을 추려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막상 작업에 들어가려니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 대부분의 학습 만화는 만화가나 혹은 만화 콘티를 쓰는 작가가 원전을 가지고 원고를 만들어 내는데, 인문고전의 경우 원전이 너무 어려워 이전 방식대로 작업할 경우 내용상의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려면 시간도 엄청나게 들어갈 판이었다. 그래서 우선 원전을 정확히 이해하고 독자들 수준에 맞춰 새롭게 재해석해 줄 수 있는 전공자들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고른 분들이 현재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의 글 작가 선생님들로, 제1군이 대학교수, 강사 등 전공 박사, 제2군이 현직 학교 선생님, 제3군이 해당 분야를 전공한 전문 작가 들이다. 이 가운데 학교 선생님들은 전공자일 뿐더러 오랜 시간 수업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한 강의 감각으로 책을 읽는 독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최적의 필진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의 작업 방식은 먼저 전공 선생님들이 ‘밑글’을 쓰고 그 글을 가지고 만화가가 원고를 진행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 뒤 여러 글 작가 선생님들을 섭외하다 보니 어찌어찌해서 서울대 출신 현직 선생님들이 대거 합류하게 되어 그야말로 ‘서울대 인문학부가 선정하고, 서울대 출신 선생님들이 쓰고, 서울대 교수가 추천한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만화적인 표현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5등신, 2등신 등 몇 등신의 캐릭터를 등장시킬 것인가에서부터, 원고지는 몇 단으로 나눌 것인가, 한 페이지마다 전체 컷 수는 몇 개로 할까, 대사와 대사가 이어지는 스토리 물로 할 것인가 지문을 따라가는 내레이션 만화로 할 것인가, 중심 캐릭터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때그때 다른 캐릭터를 등장시킬 것인가 등등.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기획의 주안점은 고전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그러나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것이었기에 만화적인 과장과 왜곡은 제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다 보니 자연 4단으로 원고를 분할하기로 하여 『먼나라 이웃나라』(이원복 지음, 김영사)를 모델 삼기로 하였다. 그러나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기본은 4단으로 하되 그 안에서 만화가의 자유로운 컷 구성을 기대하였다. 또한 4단으로 원고 형식이 결정되니 자연 지문 중심의 내레이션 만화가 되어 캐릭터 역시 2~3등신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실제 원고 작업에 있어서 결정적인 난관에 봉착하였는데, 원전 자체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전공자들에게조차 어려운 인문고전을 만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리 쉽게 정리된 밑글이 있다 해도 만화가가 내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만화가들은 실제 원고는 단 한 장도 그리지 못하고 원서와 씨름부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글 작가들과 만화가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여러 번역서 중 옥석을 가려내고 사상과 지식의 핵심을 뽑아 내는 작업을 함께 했다. 또한 인문고전이 짧게는 백 년부터 많게는 수천 년 전의 저작이다 보니 저작의 정확성과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필요로 했다. 해서 다시 수백 수천 건의 자료를 검색하여 해당 시대의 정확한 의복과 건축물, 여러 물건들과 지도를 만들어 냈다. 이외에도 여러 문제와 난관들을 거치다보니 애초에 잡았던 발간 일정으로부터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완성 원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만화가는 너무 힘들어 눈물을 흘리며 그만두고 싶다고 어려움을 호소했을 정도로, 다른 만화 원고에 비해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그러나 역시 공들인 책은 표가 나는 법. 원고가 완성되어 편집 작업을 진행하며 추천사를 받기 위해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님을 비롯해 서울대 권재일 교수님,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등 여러 분들을 만나 뵈었는데 한결같은 반응이 “정말 좋은 기획이다,” “인문고전 읽기는 정말 필요한 작업이다,” 등 칭찬 일색이었다. 첫 두 권인 『군주론』과 『역사』가 나오자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후속권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또한 작업을 진행 중인 작가들 역시 힘을 얻어 작업 속도를 높여 갈 수가 있었다.

인문고전을 만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뜻깊은 기획이라는 것도, 아이들과 청소년에게 꼭 필요한 책인 것도 알았지만 워낙 작업 분량이 많다 보니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20년, 30년 유지시킬 생각으로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결과 이제 그 작업물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책은 독자가 먼저 알아 본다.”는 말처럼 책의 진가를 알아 보는 독자들의 성원이 이어지고 있다.

인문고전은 인류가 살아오며 쌓아 온 공든 탑이자 인류 역사의 지혜가 모아진 보고이다. 흔히들 고전은 고리타분하며 어렵고 재미없는 옛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초가 다져지고 주춧돌이 놓이고 기둥과 서까래가 놓여 집이 완성되듯 한 권 한 권의 지혜가 쌓여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왔으며 인간이라는 종족의 정체성을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 덧셈을 모르고서 곱셈을 알 수가 없고 ㄱ, ㄴ, ㄷ을 모르고서 글을 읽을 수 없듯 고전은 우리 삶의 기초 중의 기초이다.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은 그 기초 중의 또 기초만을 뽑아서 보다 이해하기 쉽게 전하려 노력했다. 물론 고전을 직접 읽는다면 더 좋겠지만, 약효만 제대로 나타난다면 살짝 설탕을 입힌 약을 먹는 쪽이 안 먹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제 곧 『루소 사회계약론』, 『정약용 목민심서』가 나온다.
김준영│주니어김영사 편집부 만화팀장. 1995년 『아이큐점프』를 시작으로 8년여 동안 만화 잡지를 만들다 단행본으로 옮겨 현재 어린이 학습 만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중간에 소설, 경제 경영서, 인문서까지 여러 분야를 거쳤지만 만화가를 만나고 만화책을 만들 때 가장 행복합니다. 최근에는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시리즈를 비롯해 정통 학습 만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