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통권 제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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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읽었어요]
숨기면 위험한 것과 숨겨서 유쾌한 것

신미희 | 2008년 04월

“제가 욕 안하고 참았으면 되는데……. 그러면 싸움도 안 일어나고, 여자 아이들도 안 울고 그랬을 텐데……. 제 잘못이에요.”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을 억지로 참아가며 예진이가 한 말이다. 누가 보아도 예진이 잘못이 아닌데, 유독 자기 혼자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 예진이의 그림 그리는 연습장을 철범이가 허락 없이 보았단다. 돌려달라는 예진이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예진이가 연습장을 빼앗듯 가지고 오면서 혼잣말로 “씨발”이라 했단다. 그러자 철범이가 화가 나서 예진이에게 더 심하게 욕을 해댔고, 예진이는 겁이 나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단다. 그 모습을 본 유선이가 화가 나서 철범이에게 따지자, 자기 일도 아니면서 왜 참견이냐며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친 거였다. 싸움은 더 크게 벌어져서 주위에 있던 여자 아이들도 유선이를 거들고 나서니, 철범이는 더 흥분해서 화를 낸 모양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철범이가 달려들어 때릴 것 같아 무서워서 울었다고 했다.

공개재판에서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번 일은 철범이 잘못이 크다고 했다. 그런데도 예진이는 계속 울었다. ‘참 예민한 아이구나.’ 하고 넘어가려던 차에 내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예진아, 왜 자꾸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니? 혹시…… 부모님 이혼 때문에 그래?” 이 말을 듣자마자, 예진이는 펑펑 울었다. 유치원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는데, 이혼을 하기 전에 자기 때문에 많이 싸우셨다고 한다. 예진이가 유치원에서 싸우고 오면 집에서 아이를 어떻게 가르쳤느냐며 싸우고, 예진이가 넘어져 흉터가 생기면 아이도 안 보고 뭘 했느냐고 또 싸우고 그랬다는 거다. 그래서 예진이는 부모님의 이혼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저 아이는 정말 착하고 성실한 아이구나.’ 하며 넘어갔던 예전 일이 떠올랐다. 예진이는 청소 시간에 아이들이 빈둥거리며 놀 때, 단 한번도 아이들에게 싫은 말을 하거나, 나에게 고자질을 하지 않았다. 그냥 매우 힘들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구역을 열심히 청소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게 착하고 성실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속이 상해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러면 싸움이 될까 봐 그냥 꾹 참아 버린 것만 같다. 비단 그 일 뿐이겠는가. 5년을 넘게 수많은 일들을 그냥 혼자 꾹꾹 참았을 거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겪게 될 많은 일들을 또 그렇게 가슴 속에 묻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속병이라도 들면 어쩌나, 카밀라처럼 병에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든다.

『줄무늬가 생겼어요』의 주인공 카밀라는 친구들의 눈치를 엄청 본다. 옷을 고를 때도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옷을 입으려 하고, 아욱콩도 정말 좋아하지만 친구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옷을 한참 고르고 잠이 든 다음 날 아침, 카밀라의 몸은 온통 무지개 색 줄무늬가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물방울무늬가 보고 싶다고 하면 카밀라의 몸은 물방울무늬로, 아이들이 바둑판이라고 하면 또 카밀라의 몸은 바둑판무늬로 바뀌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유명한 의사, 박사가 카밀라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모여들지만 어느 누구도 고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는 박사의 말에 카밀라 몸에 바이러스가 생겼기 때문이다. 카밀라의 몸은 주위 사람들 말에 따라 시시각각 변했다. 알약 모양에서 세균 덩어리로, 결국은 “그리고 이제 네 방이랑 하나가 되는 거야.”는 환경 치료사 말대로 방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카밀라는 원래대로 돌아올까? 할머니 한 분이 아욱콩을 들고 찾아왔다. 먹어 보지 않겠냐는 할머니 말에 카밀라는 아이들이 생각나 거절하지만, 돌아선 할머니의 뒷모습에 용기를 내어 아욱콩을 좋아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아욱콩을 먹자, 카밀라는 귀엽고 예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카밀라의 병은 자신의 속마음을 숨겨서 생긴 것이기에 카밀라에게 필요한 치료법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수많은 의사, 박사, 치료사들은 카밀라의 병을 오직 외적이고 물리적인 것에서만 찾으려고 했으니……. ‘나돌팔 의사, 주저해 의사, 왕재갈 의사, 새파란 의사, 한머리 박사, 난천재 박사’ 등 이들의 이름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책을 읽은 뒤, 예진이 일을 곱씹으며 내가 ‘나몰라 선생’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의 속마음은 숨긴 채 참고만 있던 아이에게 “화도 잘 참고 아이들과 잘 지내는구나.” 하며 아이가 더 마음을 숨기도록 부추겼던 것만 같았다. 나도 아욱콩을 건네 주는 할머니가 되고, 예진이도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번 싸움으로 철범이와 여자 아이들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도서관 도우미 어머니와의 만남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의 1학년 담임선생님이 참 특이하고 좋았다며 꺼낸 그 말은 무척 즐거웠다. 그 선생님은 1학년 2학기에 처음 보는 학교 시험을 일부러 아이들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 당일, 아이들이 깜짝 놀라자 선생님은 “이건 시험이 아니야. 그냥 너희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나 알아 보려는 거란다.”며 안심을 시켰다고 했다. 다른 반 아이들은 1학년 때부터 시험 친다며 잔뜩 겁먹고 있을 때, 그 반 아이들만 선생님 말대로 “응, 별거 아니구나.”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보았단다. 그리고 1학년이 끝날 무렵, 내년에는 어느 반 선생님이 될 거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제 배낭을 메고 우주로 여행을 갈 거야.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선생님이 지구로 돌아오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했단다. 다음 해 그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단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3학년이 되었는데도, 그 말을 믿는 것 같다며 웃으셨다. 내가 들어도 이 선생님은 뻥을 제대로 칠 줄 아는 멋진 선생님 같았다. 모든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모든 일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멀리서 오는 애인을 보고 몰래 담장에 숨었다가 휙 하고 나타나 깜짝 놀라게 하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남 속이기’ 놀이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놀이를 하기에 앞서 놀이를 이해시켜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파리의 휴가』가 제격이다.

파리가 휴가를 맞아 수영을 하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너무 안 좋다. 깜깜해지더니 천둥소리도 나고 급기야 하늘에서 커다란 것이 떨어졌다. 무시무시한 파도가 일고, 파리는 죽을힘을 다해 헤엄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파리가 휴가 온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 변기였던 거다. 마치 작가와 독자가 숨바꼭질하는 것 같다. 작가는 화장실 변기라는 걸 숨기려고 애쓰고, 독자는 파리에게 왜 저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고 애쓴다.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은 그 숨바꼭질에서 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가 정말 기가 차게 잘 속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파리의 입장에서 파리 눈으로 본 세상을 그렸다. 그러니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야기 배경은 파리 눈에 보이는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닷가 같은 피서지라 여기게 되었고, 파리의 행동에만 집중했다. 이때부터 나와 아이들은 벌써 작가의 꾀에 넘어간 거다. 파리가 변덕스럽다고 생각한 날씨는 아이가 변기에 앉아 똥 누기 전에 방귀를 뀐 것이었지만, 우리는 작가의 뜻대로 이런 날씨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번 작가에게 속았다. 똥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똥이 버젓이 크게 그려져 있지만, 우리는 똥인지 몰랐다.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여 바느질한 부직포로 똥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의 정체를 밝히려고 애쓰기 전에, 매우 특이하다며 표현기법에 먼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작가에게 완패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아니 완패를 했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남에게 속아서 이리 즐거울 수 있다니, 우리도 ‘남 속이기’ 놀이를 하기로 했다. 바로 ‘수호천사’ 놀이이다. 무작위로 친구를 뽑아, 뽑힌 아이의 수호천사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잘해 주어야 하는 놀이이다. 잘 속이지 못해 누구의 수호천사인지 들통 나면 지는 거다. 나도 아이들도 속이기 위해 눈치작전에 들어갔다. 아무도 모르게 쪽지를 가방에 넣고, 티 나지 않게 좀 더 칭찬을 하려고 하니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아무도 몰래 ‘수호천사’하는 게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서로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예뻤다.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있듯, 거짓말도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음이 될 수도, 양이 될 수도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하지 않고 남을 속이려고 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거짓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의 눈치를 보며 나를 속이는 것 또한 스스로에게 매우 비겁한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은 모두에게 상처만 준다. 이제 모두를 유쾌, 상쾌, 통쾌하게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실컷 거짓말하며 살면 좋겠다.
신미희 | 선생님도 나이에 따라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보다 나이가 들면서는 인자하고 푸근한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신나게 노는 것을 제일 잘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김해 영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어울려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