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통권 제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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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우리 동화 깊이 들여다보기]
귀신 이야기의 다양한 진화

김지은 | 2008년 04월

1. 대관령에서 귀신을 보았다

요즘처럼 어린이를 위한 책이 충분하지 않던 시절, 이야기가 고픈 어린이들은 말맛을 아는 어른을 붙잡고 늘 뭔가 근사한 걸 좀 얘기해 달라고 조르곤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으스스한 ‘귀신 이야기’였다. 상상만 해도 맨들맨들 기분 나쁜 달걀 귀신으로부터 무용실 귀신을 비롯한 온갖 학교 귀신, 게다가 이웃 나라에서 수입해 온 강시 귀신, 흡혈 귀신까지 이야깃감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자세로 듣느냐에 따라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도통 안 무서운 이야기가 되기도 하므로 날깃날깃 해진 담요라든지 거미줄이 무성한 다락방과 같은 몇몇 속 보이는 연출도 필요한 터였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귀신 이야기를 두려운 이야기로 만들어 주는 것은 이 한 마디이다. “이게 진짜로 있었던 일인데 너한테만 얘기해 주는 거야. 잘 듣고 어디 가서 말하지 마.”

귀신 이야기는 대표적인 환상 이야기이다. 듣는 사람도 그걸 뻔히 알면서 접어줘 가며 듣는다. 그런데 그 환상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니 이처럼 흥분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흥분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열쇠는 ‘너한테만’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으슥한 비밀의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그라든다. 공포는 고립감과 관계가 깊다. 필자가 지금도 가장 무서운 이야기로 꼽는 것은 ‘출장길에 대관령에서 직접 귀신을 보았다.’고 고백한 사촌 오빠의 이야기였다. 혼자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대관령 고개에 귀신이 살고 있을 것 같아 몸서리를 쳤다. 그 후로 집을 지킬 때마다 오빠가 들려준 대관령 귀신의 형상이 떠올라 괜히 그 얘기를 들었다고 후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서운 이야기, 특히 귀신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을 사로잡는 이야깃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동화는 귀신 이야기를 옛이야기의 영역에 놓아 두고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워낙 쟁쟁한 옛이야기 공포물이 많았던 탓도 있겠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진지한 작품 세계를 펼치는 데 ‘귀신’이라는 소재가 너무 허무맹랑하거나 얄팍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동화가 너무 끔찍하거나 무서우면 안 된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대개의 공포 영화는 어린이에게 관람 불가 조치를 내리지 않는가.

그러나 귀신 이야기야말로 사실 세계와 환상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흥미진진한 새로운 이야기의 영토이면서 동화 작가들이 도전해 볼 만한 섬세한 이야깃감의 보고다. 그래서인지 최근 몇 해 동안 귀신을 데리고 동화를 쓴 작가들이 부쩍 눈에 띈다. 단지 그런 소재의 작품이 창작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따돌림 당했던 귀신을 매개 삼아 신선하고 다채로운 이야기 본을 선보이고 있기에 깊은 관심이 간다. 그 중 몇몇 작품을 살펴보면서 ‘귀신 옛이야기’가 어떻게 ‘귀신 새이야기’로 진화하고 있는지 짚어 보겠다.

2. 유쾌한 귀신은 동화에 나와도 좋은 귀신이다

앞서, 그동안 동화 작가들이 도깨비 이야기는 쓰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잘 쓰지 않았던 건 어린이에게 불필요한 공포감을 주지 않겠다는 배려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경혜의 귀신 이야기는 동화에 나와도 좋은 유쾌하고 친근한 귀신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뜻깊다. 「귀신친구」(『달려라, 그림책버스』)는 조금도 무섭지 않으며 오히려 귀신에게 정이 가는 따뜻한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겁쟁이 미솔이가 어느 날 밤 화장실에서 귀신과 맞부딪친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귀신은 사람이 무서우니 제발 불을 켜지 말아 달라고 더듬더듬 사정한다. 미솔이보다 더 어리고 훨씬 겁 많은 귀신 토희는 오히려 미솔이 덕분에 귀신으로서 살아가는 일에 조금씩 적응하게 된다. 옆집 아줌마 귀신의 헐렁한 소복을 빌려 입었지만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귀신 본분에 적응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런 토희를 달래고 도와주면서 미솔이는 한결 씩씩해진다.

이 작품은 ‘귀신’이라는 장치를 통해 이승의 어린이와 저승의 어린이가 나누는 동등한 우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미솔이에게 귀신이 익숙하지 않듯 토희에게는 사람이 익숙하지 않아 둘은 자연스레 의기투합한다. 옛 귀신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은 저승에 적응하지 못해서 구천을 떠도는 불쌍한 존재들이었다. 삶의 대척점에 놓인 죽음은 항상 불길한 것이었고 이승의 사람은 저승 귀신의 한을 풀어 줘야 했다. 하지만 토희는 좀 다르다. 귀신의 세계에서 해야 할 본분이 있는 밝은 존재다. 미솔이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죽어서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 미솔이는 토희에게 애처로움을 나타내지만 토희는 산뜻하게 그 걱정을 물리친다.

“아직 어린데, 어쩌다 귀신이 됐어?”
“그건 나도 몰라. 귀신이 되면 살았을 때 기억은 다 잊어버리거든.” (「귀신친구」, 『달려라, 그림책버스』 141쪽)

이들이 대척점에 놓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어린이와 어른이다. 귀신 세계든 사람 세계든 어린이들이 지내기에 불리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린이끼리 서로 보듬어 주고 정답게 격려해 준다. 이경혜는 귀신을 유쾌하게 다룬 또 다른 단편을 선보이기도 했다. 「귀신이 곡할 집」(『귀신이 곡할 집』)은 사람도 울리고 귀신마저 울려 버린 장난꾸러기 물건들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정신을 판 사이에 미슬이랑 슬미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은 달리기와 숨바꼭질을 즐긴다. 물건도 사람처럼 좀이 쑤시다는데 숨바꼭질쯤 하면 어떠랴. 하지만 리모콘을 못 찾아 사람이 울듯 버선을 못 찾아 귀신도 울었다는 대목에 이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원래 ‘귀신이 곡할 집’이라는 표현은 사람과 귀신의 대결 구도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들 둘이 서로 동병상련이다. 사람과 귀신이란 한 존재의 두 가지 다른 국면인 것이다. 삶과 죽음을 심각하게 분리시키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이 작품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3. 섬뜩한 귀신의 현대적 복원

유쾌한 귀신들이 귀신 동화의 새 출발을 열었다면 섬뜩한 귀신들은 동화의 지평 자체를 넓혀 놓았다. 방미진의 「금이 간 거울」, 「기다란 머리카락」(『금이 간 거울』)이나 선자은의 「개구리」(『공주의 배냇저고리』)는 귀신 옛이야기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탈바꿈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어린이에게 충분한 공포감을 안겨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귀신 옛이야기들도 상당한 수위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귀신 새이야기가 무섭다고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런데 왜 그동안 동화에서는 무서운 이야기를 별로 다루지 않은 걸까. 어린이의 감정이 흐르는 길을 어른이 자의적으로 차단하거나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에는 어린이들에게 굳이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일이 틀림없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 전광판에 올라오는 참혹한 사건 사고의 목록 앞에서는 눈을 가려 주고 싶고 그저 정신적 외상으로만 남을 지나치게 명징한 어떤 장면은 감당할 나이가 될 때까지 가능하면 숨겨 두고 싶다. 하지만 어린이의 감정이 흐르는 길에는 순한 것과 거친 것이 함께 있다. 웃음 뒤에는 비탄이 있고 호기심의 끝에서 공포에 직면하기도 한다. 어린이의 마음에 버젓이 있는 다양한 감정을 어른의 경험 위에서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바람직한 것 중심으로만 재편하려는 태도는 그야말로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다른 골을 따라 문방구에서 구입한 잔혹한 이야기 시리즈를 돌려 읽는다. 동화가 공포감을 단호하게 외면한 결과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무서운 동화의 출현을 반기는 입장이다. 어린이 독자에게도 자신들의 마음 밑바닥에 존재하는 공포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더 깊게 들추어볼 권리가 있다. 방미진의 「금이 간 거울」은 읽고 있으면 서늘해진다. 하지만 주인공과 내가 동시에 이 불길한 거울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단순히 말초적인 자극으로 치닫지 않는다. 귀신 옛이야기에서도 거울은 자주 쓰였다. 밤에 거울을 보면 칼을 물고 피를 뚝뚝 흘리는 귀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더라,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게 바로 나더라고 읊어 대는 상황 설정은 고전 급에 속한다. 하필이면 왜 거울일까. 나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만큼 섬뜩한 일이기 때문이다. 피도 안 흘리고 째려보지도 못하는 거울이지만 「금이 간 거울」도 옛 거울 귀신 못지않다.

내가 집어던져 깨 버린 거울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다. 거울에는 깨진 흔적은커녕, 흠집 하나 없었다. 금이 하나 더 늘어 있을 뿐이다. 금 네 줄이 꼭 거미줄처럼 가운데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금이 간 거울」, 45쪽)

이 거울은 주인공의 도벽을 알고 있다. 주인공은 거울에게서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다. 귀신 같은 거울은 계속 주인공을 따라다닌다. 따지고 보면 거울은 주인공 자신이다. 못 본 척하려고 해도 자기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또 하나의 나이다. 방미진의 다른 작품 「기다란 머리카락」(『금이 간 거울』)은 더욱 본격적인 귀신 동화에 도전한다. 집안 곳곳에서 눈에 띄는 정체모를 기다란 머리카락은 읽는 사람의 잠재적인 공포감을 예리하게 자극한다. 그 머리카락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저마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드러내놓고 묻지 못한다. 정체를 알았다가 더 큰 두려움을 만나게 될까 봐 무섭기 때문이다. 아빠는 머리카락을 무시하고 엄마는 아빠를 의심하고 나는 엄마에게 토라진다. 식구들이 각자 날선 마음만 겨루는 사이에 공포는 최고조에 이른다.

이 작품의 안타까움은 여기부터다. 작가는 방바닥에서 자라고 움직이는 머리카락 귀신을 보는 순간 아주 갑자기 깨닫고 만다. 깨달을 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 명시된 언어로 그 정체를 분석하고 해설하기까지 한다.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는 건, 집이 무너져 버리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었다. 가족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이미 빠져 버린 내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고 있었다.’라고 말해 버린다. 독자들의 긴장과 공포에 대한 배려는 온데간데없다.

옛 귀신 이야기의 결말도 종종 맥이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던 무시무시한 붉은 띠 귀신의 정체가 사실은 효심 깊은 요절 처녀의 댕기였다, 뭐 이런 이야기 말이다. 댕기를 들고 처녀의 효심을 설명하는 이장님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독자는 맥이 풀려 버린다. 머리카락 귀신을 앞에 두고 반성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런 구태의연한 결말로부터 크게 나아간 것 같지 않아서 아쉽다. 주인공이 독백하지 않아도 공포의 원인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선명하게 유지해 온 긴장의 끈을 적당히 유지할 수 있었다면 전형성을 탈피한 더 세련된 새 귀신 이야기가 탄생했을 것이다.

선자은의 「개구리」(『공주의 배냇저고리』)는 귀신 이야기라기보다는 추리 동화에 가깝다. 담력놀이라든가 시골 폐가, 삐거덕거리는 대청마루와 귓가에 쟁쟁 울리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같은 귀신 이야기의 오래된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이 이야기가 성공을 거둔 열쇠도 작품 안에 깃든 나 자신에 대한 통찰이다. 주인공은 담력놀이를 하기 위해 폐가에 갔다가 귀신이 무서워 도망 나온다. 도망치는 내내 논두렁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개구리 소리는 괴물 같기도 하고 괴이한 귀신 울음 같기도 하다. 겨우 집에 돌아와 잠든 주인공이 모든 사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침이다.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오는 동안 주인공은 수없이 많은 개구리를 밟아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작가는 자연이 질러 대는 수없이 많은 비명을 모른 척하는 사람들의 귀를 열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 한 번 들어 봐라. 이게 너희들이 한 짓이다.’라고 경고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귀신을 무서워하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이다. 작가의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이 있어, 그저 흔한 폐가 모험담에 그쳤을 동화 한 편은 새로운 귀신 이야기로 한 걸음 나아갔다. 아쉬움이 있다면 작품에 나타난 폐가의 긴장 상황이 썩 무섭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서움을 더 무섭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귀신 이야기의 성공 요소라면 그 부분에서는 방미진의 역량이 더 정교했다는 생각이 든다.

4. 귀신 이야기이면서 귀신 이야기가 아니면서

많은 귀신 이야기들은 항상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 ‘한’이라는 것도 실은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다. 우리 귀신들 중에는 나름대로 한이 없는 귀신이 없으니 이 땅에서 귀신은 기억 때문에 존재하는 셈이다. 기억의 문제와 기억을 다루는 전문가인 무당 얘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김려령의 『기억을 가져온 아이』이다. 판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사실 사라진 기억 속에 파묻혀 버린 귀신들 입을 빌려 이야기를 끌어 간다. 꼬마 무당 다래는 산신을 만난 아이다. 그래서 신엄마랑 같이 산다. ‘신’과 ‘귀신’의 차이가 우리 무속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다. 민속 신앙에서는 서양 종교처럼 하나의 신을 모시지 않기에 이 귀신, 저 귀신 모두 내가 지성으로 섬기면 신이 된다. 작품 속에 나오는 ‘기억의 호수’는 바위 뒤의 딴 세상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저승이나 다름없다. 다래는 이승과 저승의 나들이에 함께 따라가 주면서 차근이와 할아버지의 끊어진 기억을 이어 준다. 삶과 죽음이 동전 하나의 양면이라지만 그래도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은 더 이상 둘의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잘 포착하여 귀신 아닌 귀신이 아주 많이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일구어 냈다.

은이정의 『나를 찾아 줘』도 주목할 만한 귀신 이야기이다. 교문 기둥에 남은 ‘나를 찾아 줘’라는 말은 곰곰이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무 일없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과연 나를 찾아 달라는 낙서를 남긴단 말인가. 귀신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실종된 친구 김진수가 귀신이 되어 자신을 찾아 달라며 전교에 낙서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사라진 김진수에 대한 흉흉한 소문까지 떠돈다. 정작 귀신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귀신의 낙서 주변에는 수상한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 간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족과 인간 관계의 문제다. 가족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집은 흉가나 다름없다. 친구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는 같은 교실에 있되 귀신이나 다름없다. 작가는 귀신 이야기를 쓰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를 찾지 못하고 귀신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썼다. 귀신에 대한 이미지는 여기 활용된 도구다. 이 귀신 모티프는 무관심하게 지내던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을 때 귀신을 만난 것보다 더 큰 놀라움으로 그의 존재가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5. 귀신 이야기의 진화를 꿈꾸며

오늘날 가장 끔찍한 악몽은 우리 현실 속에 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럽다. 그러기에 작가들이 더 많은 귀신 이야기를 시도하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신문을 펼쳐 들면 차라리 귀신이면 모를까, 사람이면 이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험악한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귀신 이야기는 오늘날의 무시무시한 문제를 한 겹 걸러 보여 주면서 우리의 성찰을 도와 줄 수 있는 지혜로운 틀이다. 최근에 읽은 귀신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한과 기억을 넘어 오늘의 문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미래에 한이 될 만한 일에 대해서 오늘 어떻게 하면 잘 해 볼 것인가 하는 전망을 담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귀신 이야기냐고 물었을 때, 단지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동화를 써 보면 재미있겠다는 욕심에서 출발한 작품도 있겠고 귀신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파고들어 보려는 작품도 있겠다. 어떻든 귀신 이야기의 진화는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우리는 예로부터 그 누구보다 다채로운 귀신 이야기를 즐기던 민족이 아닌가.
김지은│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심리 철학과 철학 교육을 전공했습니다. 동화 작가이며 철학자로, ‘어린이를 위한 철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평론 「어린이의 도덕, 어른의 도덕」 등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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